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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 이야기 (1)
퇴계 선생의 고매한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프롤로그] — 퇴계 선생 귀향길 세 번째 걸음을 내딛으며 …
1569년 3월 따스한 봄날 어린 선조 임금의 간청에도 퇴계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 도산으로 마지막 귀향을 떠났습니다. 겸손과 곧음의 선비정신을 실천하여, 온 백성들로부터 중망을 받던 퇴계 선생의 700리 여정에는 선생의 참모습인 ‘물러남[退]’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귀향길의 매력은 퇴계 선생의 정신유산이 걷는 길 곳곳에 산재해 있는 데 있습니다. 물러난 고향에서 선생이 추구하려던 가치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는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배워 실천할 것인가. 저절로 선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정신유산을 즐길 수 있는 이 길은 이 시대 우리에게 딱 좋은 성찰과 구도의 길입니다.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 450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3월에 도산서원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주최/주관하고 경상북도와 안동시의 후원을 받아 귀향길 걷기 재현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전 구간에 누계 2,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였고, 이구동성으로 ‘구도의 길을 걸었다’, ‘걸을수록 오히려 심신이 가벼워졌다’, ‘재현행사를 매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행사를 일회성으로 마치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의견이 많아, 이듬해에 2회 행사를 준비하였다가 뜻밖에 닥친 ‘코로나19’로 인해 연기하였고, 다시 1년 뒤인 2021에 제2회 귀향길 행사를 소규모 인원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 사이 누구나 언제나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길로 만들기 위해, 일반 대중을 위한 인문 답사기《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를 발간하였습니다.
올해 2022년에도 제3회 퇴계선생 귀향 재현행사를 시행함으로써 날로 불안감과 갈등이 커지고 있는 이 시대에 융합과 화합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을 기대합니다. ―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단 단장 김병일
☆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 김병일(金炳日) 단장은 서울대 사학과 및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하고, 미국 USC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71년에 제10회 행정고등고시 합격하여 관직에 들어섰습니다.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공보관을 거쳐, 1995년 국회예산결산특위 수석전문위원, 1997년 통계청장, 1998년 기획예산위원회사무처장, 1999년 조달청장, 2000년 기획예산처 차관, 2002년 금융통화위원을 거쳐, 2004년 기획예산처 장관을 역임하고, 2005년 한국개발연구원(KDI)에도 봉직하였습니다. 35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2008~2014년에는 한국국학진흥원장, 2008년부터 현재까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2015년부터는 도산서원 원장으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1년 설립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퇴계 이황선생(1501~1570)을 모신 도산서원 부설기관으로 퇴계 선생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참신한 선비정신’으로 인성교육을 실시하는 수련원입니다. 퇴계 16대 이근필(91) 종손의 주창 하에 민간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2001년 설립 이후 20년만인 2022년 1월 4일, 수련한 연 인원 1,000.023명을 기록함으로써 ‘선비수련 100만 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일정 ★
▶ 4월 04일 (월)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1일)] ☆ 경복궁→ 두뭇개공원 (8km)
▶ 4월 05일 (화)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2일)] ☆ 두뭇개→ 봉은사 (7km)
▶ 4월 06일 (수)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3일)] ☆ 봉은사→ 미음나루 (19km)
▶ 4월 07일 (목)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4일)] ☆ 미음나루→ 국수역(한여울) (29km)
▶ 4월 08일 (금)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5일)] ☆ 국수역→ 이포보 (23km)
▶ 4월 09일 (토)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6일)] ☆ 이포보→ 강천섬 (31km)
▶ 4월 10일 (일)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7일)] ☆ 강천섬→ 충주 가흥창 (29km)
▶ 4월 11일 (월)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8일)] ☆ 가흥창→ 충청감영(관아) (20km)
▶ 4월 12일 (화)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9일)] ☆ 충주관아→ 청풍관아 (25km)
▶ 4월 13일 (수)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10일)] ☆ 청풍→ 단양향교 단성(면) (21km)
▶ 4월 14일 (목)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11일)] ☆ 단양향교→ 풍기향교 (22km)
▶ 4월 15일 (금)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12일)] ☆ 풍기향교→ 영주 두월리 (20km)
▶ 4월 16일 (토)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13일)] ☆ 두월리→ 도산 삽골재 (20km)
▶ 4월 17일 (일) *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제14일)] ☆ 삽골재→ 도산서원 (고유제) (1km)
* [제1일] 4월 4일(월) 경복궁 사정전(개막행사)→ 동호(옥수동) 두뭇개공원 (8km)
▶ 제3회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 출행식이 2022년 4월 4일 오후 1시 20분 경복궁 사정전 앞에서 거행되었다. 안동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신종주 실장의 개회선언과 경과보고에 이어, 김병일 재현단장(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김현모 문화재청장, 이배용 한국의 서원 통합관리단 이사장, 김광림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 등 각계 명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특히 오늘 출행식에는 이광호(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 이기동(국제퇴계학회 회장), 김언종(퇴계학연구원 부위원장), 이동수(전 안동문화원장), 이강호(도산서원 참공부선비), 이한방(대구 박약회 부회장), 이원태(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황희만(전 MBC 부사장), 홍덕화(연합뉴스 기자), 김인규(국립고궁박물관장), 정성조(궁릉유적본부장), 최재혁(경복궁관리소장) 권상범(안동시 문화관광국장), 이문원 님 등 수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국제퇴계학연구회 강희복, 이영자, 황상희, 정학섭 박사를 비롯하여 각계의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별유사 이동신, 이태원, 이동채 님이 배석했는데, 이동신 별유사는 이번 행사전체를 진행하는 주무이다.
* [1569년 음력 3월 4일 퇴계 선생]
○ 판중추부사를 제수 받은 퇴계 선생(69세)은 무신일(음력 3월 4일)에 대궐에 들어가 성은에 감사하고 야대청(경복궁 사정전)에 입대하여 선조 임금에게 물러갈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 드디어 물러가니 호피 요 한 벌과 후추 두 말을 하사하고 본도에 명하여 쌀과 콩을 내리게 하였으며 말과 뱃사공을 주어 돌아가는 길을 돕게 하였다. ○ 정오에 하직하고 성을 나와 동호 몽뢰정에서 잤다. — 이상《퇴계선생연보》
○ 선생의 귀향길은 쉽게 허락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 전 해인 1568년 7월 당시 17세의 소년 임금 선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던 선생은 여러 달을 조강·주강·석강의 경연에 입시하여 선조 임금을 교도하고 보필하기에 성심을 다하였다. 유명한 〈무진육조소〉와〈성학십도〉를 올린 것도 이때의 일이다. 임금에게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한 선생은 그해 12월부터 여러차례 치사(致仕, 벼슬을 그만둠)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선생에게 우찬성, 이조판서 등 고위의 요직을 내려 주었고, 높은 벼슬을 바란 것이 아니었던 선생은 벼슬을 사퇴하고자 하는 상소를 거듭 올리면서 조정에 출사도 하지 않았다.
○ 이렇듯 서너 달이 지난 끝에 1569년 3월 4일에야 겨우 일시적인 귀휴(歸休)를 허락받은 것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야대청에서 선조 임금을 알현한 선생은 오전 내내 임금과 대화하였다. 선생의 연보와 연보보유에는 그중에 중요한 것을 간추려 수록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 바른 정치를 위하여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 2. 기묘사화 이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伸寃, 원한을 풀어줌)을 하고 부당하게 쫓겨난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 3. 임금 자신이 학문에 열중하여 덕성을 기를 것 등이었는데 특히 ‘태평성대와 명철한 임금에 대하여 경계하시라’고 당부하였다. 임금은 앞서 선생이 올린 〈성학십도〉의 뜻을 재차 물었고, 지금 조정에 쓸 만한 인재가 누구인지 추천하라고 명하자, 선생은 당시의 수상 이준경과 기대승을 천거하였다. 이렇듯이 선생은 조정을 떠나는 날까지 바른 정치 실현을 위한 진언을 아끼지 않았다.
○ 두뭇개나루 가까운 곳에 있는 몽뢰정이 있다. 몽뢰정 주인은 판서 정유길이다. 그는 일찍이 호당에서 선생과 함께 공부하였고 뒷날 좌의정을 지낸 명사이다. 일찍이 명종 임금에게 “이황은 뛰어난 학술과 재주를 가졌습니다. 한 시대의 인물은 드물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나라에 그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라고 하여 선생을 중용하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 [2022년 4월 4일 월요일 귀향길 재현단]
○ 13:20 경복궁 사정전 앞에서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 행사 출행식’이 개최되었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신종주 실장의 개회선언과 경과보고에 이어, 이번 행사를 주도하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김병일 이사장의 개회사에 이어, 임현모 문화재청장, 이배용 한국의 서원 통합관리단 이사장,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등의 축사가 있었다. 출행식을 마친 ‘재현단 일행’이 광화문을 나섰다.
▶ 4월의 날씨는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맑은 봄기운 완연하다. 김병일 원장을 필두로 한 귀향길 재현단은 경복궁 사정전을 출발하여 광화문-종각-광교-명동 입구-명동대성당 앞-건천동(퇴계 선생 우거)-광희문-금호동고개-옥수동 두뭇개공원까지 8km를 걸었다. 재현단 기수 이한방 교수를 비롯하여 참공부 모임의 이광호 박사, 이기동 박사, 안동의 이동수 박사, 퇴계학연구원 김광림 이사장, 김언종 박사, 정학섭 교수, 강희복 박사, 이영자 박사, 윤재철 님,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홍덕화 전 연합통신 부국장 등 개막식에 참석한 많은 인사들이 함께 걸었다. 700리 전 구간 종주자로 동인문화원 오상수 운영위원을 비롯하여, 이상천, 송상철, 오상봉, 조민정, 진현천 님 등이 함께 걸었다. 450여 년 전보다 도시가 많이 변하였으나 이 길은 당시 퇴계 선생이 가신 길이다.
▶ 재현단 일행이 명동대성당 앞을 지나 접어든 길목은 건천로. 마른내골은 삼일로 네거리에서 퇴계로6가까지 이어지는 개천인데, 지금은 복개된 도로이다. 퇴계선생의 집이 지금의 건천로 명보극장 부근에 있었으므로 이 길을 걷는 것이다. 걷기 재현단 일행은 광희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금호동고개를 넘어 옥수동 두뭇개나루터 공원에 도착했다.
두뭇개나루는 한강의 동호(현재 옥수동)에 있었는데, 인근에 있었던 몽뢰정(夢賚亭)과 함께 현재는 확인할 길이 없다. 1569년 음력 3월 4일 당시 퇴계선생은 이곳 두뭇개 나루 근청에 있는 몽뢰정에서 숙박하였다. 임당 정유길의 정자인 몽뢰정(夢賚亭)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한양을 오가는 수많은 선비들의 시문에 자주 등장한다. 동호의 독서당터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극동아파트 앞에 표지석이 있다. 퇴계 선생은 41세 때 선발되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 오후 5시, 오늘의 목적지인 '두뭇개공원'에 도착하였다.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두모포(豆毛浦, 두뭇개)는 한강과 중랑천의 물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두 물이 서로 어우러진다는 의미로 두뭇개라고 불렀고 한자로 옮겨지면서 두모포가 되었다. —
두모포 기해동정기념비
그런데 소공원의 가장자리 장방형의 비석(碑石)이 있다. ‘두모포 기해동정기념비(豆毛浦 己亥東征記念碑)’였다. … 다음의 기념비 해설판의 내용이다.
… 세종 1년 (기해년 1419년 5월 18일), 상왕 태종 이방원과 세종대왕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러가는 삼군도제찰사 이종무와 여덟 장수를 격려하기 위해 친히 이곳 두모포까지 행차하여 무기와 술을 내리고 승리를 다짐하는 출정식을 가졌다. 두모포를 출발한 이종무 장군은 경상도 견내량에 모인 삼도수군 병선 227척과 군사 1만 7천여 명으로 6월 19일 출발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이후로 왜구의 세력이 약해져서 약탈 행위가 줄고 외교통상정책으로 왜구의 대규모 노략질이 없어지게 되었다. 대마도는 경상도의 속도(屬島)가 되었으며 군신의 관계를 맺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와 해좌전도, 대동여지도 등 1800년대 조선의 고지도에는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표기하였다. 총사령관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 우박·이숙무·황상을 우군절제사, 유습을 좌군도절제사, 박초·박실을 좌군절제사, 이지실을 우군도절제사, 김을화·이순몽을 우군절제사, 영의정 유정현을 삼군도통사로 감도하도록 편제하였다.
▶ 두뭇개나루터공원에서 김병일 원장의 첫날의 걷기행사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이 자리에서는 선생의 절친한 벗으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홍섬(洪暹, 1504~1585)이 시를 읊었는데, 이 시는 홍섬의 후손인 홍덕화(연합뉴스 기자) 님이 낭독하였다.
흰 갈매기처럼 훨훨 날아서 가는가 白鷗波浩蕩 백수파호탕
만리를 나는 그를 뉘라서 길들일 수 있으리 萬里誰能馴 만리수능순
라고 귀향하는 퇴계선생을 백구(白鷗)에 비유하였고, 이에 퇴계 선생은,
아직도 종남산에 미련이 남았는지 尙憐終南山 상련종남산
위수 가를 떠나가며 고개 돌리네 回首淸渭濱 회수청위빈
라고 화답하였다. 전 안동문화원장 이동수 박사가 선생의 시(詩)를 창수하고 해설하였다.
홍섬(洪暹)은 벼슬을 그만두고 자유롭게 떠나는 선생의 귀향을 아쉬워하는 것이고, 선생은 고향으로 떠나면서 조정과 지인들을 그리워하리라는 내용으로 화답한 것이다. 위 시 구절은 모두 두보(杜甫)의 시 〈송년좌승〉에 보이는데, 홍섬과 선생 두 분이 같은 시 안에서 각자의 심회를 담은 구절을 빌린 것이 참으로 절묘한 절구이다. 홍섬을 뒷날 영의정에 올라 선조 임금 초기의 국정을 오래 담당한 명신인데, 당시에 선생의 귀향을 가장 아쉬워하였다.
▶ 당시 두뭇개 근처에는 정유길의 몽뢰정(夢賚亭)이 있었다. 퇴계선생은 정유길과 절친이어서 이날 퇴계선생는 두뭇개의 몽뢰정에서 유숙했다. 전 고려대 김언종 박사는 정유길의 몽뢰정(夢賚亭)을 짓게 된 내력을 풀어주었다. 몽뢰정은 꿈속에서 하사받아 지어졌다고 했다. 동래 정씨 정유길은 퇴계 선생의 제자인 문봉 정유일의 형이기도 하다. 임당 정유길의 후손 정우석 님이 퇴계 선생과 정유길 공의 우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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