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들과 개천에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진 두 아이를 구하였으나 자신은 개천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은 고교2년생 소년의 장례식장엘 갔었다. 국화로 단장된 빈소에는 향이 타오르고 있었고 가족들의 흐느낌과는 무관하게 엷은 미소를 띤 소년의 밝은 얼굴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향을 꽂은 뒤 기도를 하는 잠시의 순간, 내가 보지 않았지만 소년의 일상과 당시의 순간을 짐작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항상 밝고 명량하며 의협심이 강했다는 소년의 아름다운 삶이 이 세상에서는 짧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아름답고 행복하며 영원하길 잠시 기도해보았다.
‘아름다운 사람일수록 생이 짧다’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진정으로 오래 살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젊어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부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장례식장에서 더욱 나를 혼란스럽거나, 작은 분노 같은 심정을 만든 것은 주변 사람들의 대화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구출된 아이의 부모들은 경기, 서울 쪽에서 놀러온 가족들이었는데 이 소년이 혼수상태로 되어 병원에 실려가 죽은 후, 경찰에서 아이 부모들을 상대로 경위조사를 하였는데 그 것을 마치고는 바로 상경하고 이후 장례식장을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화석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한다. 우리네 옛 시골에서는 ‘두레’라는 말이 있었다. 서로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기쁜 일, 슬픈 일, 아프거나 괴로운 일들을 서로 나누며 함께 해주는 아름다움이 먹는 자리도 함께하여 ‘두레 먹다.’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과 함께 ‘돈 맛’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더 많은 부, 더 많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삶의 전쟁터’로 만들어 갔다. 전쟁은 반드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논리위에 있다. 그러나 인류가 사회를 구성한 것은 서로 더 안정하게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자연스럽게 조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얻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삶’은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지극히 간단한 논리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잘못되어가는 사회 현상 속에서 옳지 못한 현상을 배우고 답습하며 그러지 않아도 될 사람들마저 당연하게 잘못된 현상을 따라하고 오히려 특권인양 누리려 하고 있다. 직무교육을 받던 시절, 오웅진 신부가 운영하는 음성꽃동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죽어야 할 사람들, 먹고 잠자는 삶의 모든 일상을 다른 사람이 돌보아 줘야 하는 중증 장애자가 많이 있었다. 침대보에 싸서 목욕탕에 옮겨 목욕을 시켜주고 수건으로 닦아준 후 다시 옷을 입혀 침대에 옮겨주는 힘겨운 활동이었지만 뿌듯한 보람이 있었다.
‘먹을 능력만 있어도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류 최고의 선과 행복은 남을 돕는 일이다.’라는 신부의 말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젓갈장사로 번 돈 23억원을 사회에 기부해오며 열심히 살아가는 유양선 할머니의 삶, 그 외에도 수많은 일화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우리사회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못한 사람, 많이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 심지어 그릇된 삶을 위하여 범죄 하는 사람들조차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 해가 되는 그런 것들도 좋든 싫든 우리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있다. 바람직한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서로 돕고 나누며 함께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는 수많은 전쟁과 인류말살의 참혹한 현상이 점철되어 있다. 삼백 만 명의 유태인이 가스 속에서 사라진 홀로코스트, 밀로세비치의 인종청소, 스탈린 등 그런 아비규환의 현상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이어지고 있다. ‘왜? 무엇을 위해서?’ 사람들은 세계 유적지를 관광하면서 그 유적의 장엄한 모습에 감탄하곤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추어진 참혹한 인류말살의 역사에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 유적지 중 대표적으로 만리장성을 꼽는다. 변방의 오랑케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만리장성은 실제 국토방위에 별 효과를 보지 않았는데 이 성을 쌓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수십만에 이를 것이라는 말도 있다. 처음에는 노예들을, 나중에는 범죄인, 환자나 파렴치한으로 이어진 노동자들은 대부분 성곽축조 현장에서 죽어 갔는데 이들 수 백 명을 한꺼번에 매장한 무덤들이 최근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일화, 그것이 이 만리장성을 축조한 노동자들의 애환의 실례라는 말을 중국여행에서 알게 되었다.
‘노블레스 오브리제’라는 말, 영국의 이튼스쿨이나 하버드출신의 2차 대전 참전과 희생, 제주도 김만덕 할머니의 일화, 일제항쟁과 6.25전란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의 사진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들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던 선과 덕, 자애, 나눔과 베품, 관용과 배려, 사랑과 희생, 정의, 진리 같은 용어들을 떠올려 어렵지만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들 삶에 적용하고 애써 그 가치를 지켜보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과 격려로 키워줘야 한다.
망자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 죽음의 가치가 소중하고 위대하다 한들 그것은 망자가 받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희망을 주거나 고통을 주거나 나은 삶을 만들어 가게 하는 지침이 되게 하는 것도 모두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 된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를 다 하여라.’는 말, 살아 있는 자에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죽은 뒤 호화무덤을 만들고 무엇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들 망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살아있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최근 독도가 다시 우리나라 뉴스의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일제강점을 통하여,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우리나라와 아시아 전역에 수많은 생명살상과 고통을 안겨준 일본은 경제발전을 등에 업고 1세기가 다가도록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기고만장하고 있다. 선진국인 일본이 선진국민이 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그들의 파렴치한 사고 개념일 것이다. 적자해지라고 했다. 그들로 인해 반 도막난 우리나라와 분단의 현실,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민족의 고통에 반성하지 못하며 이러한 역사 모두를 그들 내부에 감추려 하고 있다.
유족의 오열을 뒤로 하며 장례식장을 나서는 하늘이 바로 비가 올 듯 컴컴해졌다. 보석보다 소중한 자신의 아이를 구출해준 이 소년의 아름다운 희생을 외면하지 말고 아이들의 부모가 찾아와 소년의 명복을 빌고 통곡하는 유족의 손을 맞잡고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는 마음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럼 이 하늘도 금새 맑아 질 텐데....
첫댓글 슬픈 이야길세.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