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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나라의 통일전쟁
진나라의 통일전쟁 – 진조대전과 한나라의 멸망
전국말 진조대전(秦趙大戰) 진행과정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한왕(韓王)을 유인하여 항복을 받아 내기 전에, 진왕 정(政)은 최우선적으로 조나라에 대한 군사작전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모두 9년 동안 5회에 걸쳐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향해 출동시킨 끝에 마침내 조나라를 멸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조나라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던 도중에 전격작전을 펼쳐 한나라를 먼저 멸했다.
1. 제1차전-기원전 236년
진왕(秦王) 정(政) 11년 ( 조도양왕(趙悼襄王) 9년), 즉 기원전 236년 당시 조나라의 주력군은 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진나라는 그 기회를 틈타 대군을 일으켜 남과 북 양쪽의 길을 취해 조나라로 진격시켰다. 환의(桓齮)와 양단화(楊端和)는 남로군을 이끌고 지리상의 이점을 살려 안양(安陽 : 지금의 하북성 안양시 서남)과 업성(鄴城 : 하북성 임장현(臨漳縣) 서남)으로 진격하고, 왕전(王翦)은 북로군을 이끌고 요양(橑陽 : 지금의 산서성 좌권현(左權縣))과 연여(閼與 : 지금의 산서성 화순현(和順縣))로 진공하여 점령했다. 남북 양로의 진군은 모두 9개의 조나라 성읍을 점령하고 초전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했다. 남로군은 장수(漳水)를 건너 북상하고 북로군은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남하하여 조나라의 수도 한단성을 남북에서 협공함으로 해서 일거에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때 국내 형세가 매우 위급한 처지의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조도양왕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조왕 천(遷)이 뒤를 이었다. 조왕 천은 연나라 정벌에 나가 있던 군사들에게 작전을 취소하고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나라는 한단성의 남쪽은 장수(漳水)와 그 연안을 따라 축조되어 있던 장성에 의지하고, 북쪽으로는 태항산의 험함을 이용하여 진나라의 남북 양로군에 대해 굳게 지킴으로 해서 진나라 군사들과 대치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진나라에서는 내정과 외교 문제가 터져 조나라에 대한 공세를 늦출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하나는 여불위(呂不韋)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노애(嫪毐)의 반란사건과 연루된 여불위가 승상의 직에 면직된 후 자기의 봉지인 하남에 돌아가자 관동(關東)의 여러 제후국들이 빈번히 사람을 보내 왕래를 했다. 이에 진왕 정은 여불위의 행동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진왕 정은 마침내 여불위와 그 일족들을 하남의 영지에서 사천(四川)으로 옮겨가 살라는 명을 내렸다. 다음 해에 여불위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의 일족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두 번째는 관동에 있었던 진나라 령의 4군(郡)이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던 문제였다. 당시 진(秦)과 위(魏) 두 나라는 우호조역을 체결하여 진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는데 유리한 여건을 마련했었다. 이와 함께 위나라는 진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기도했다. 또한 진나라에도 역시 위나라와 협력하여 초나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에 진나라는 공격목표를 조나라에서 초나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조나라 정벌작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진나라로서 조나라 전선에 증원군을 파견할만한 여력을 갖지 못하게 되어 결국은 진과 조 두 나라는 1년간의 휴전기간을 갖게 되었다.
2. 제2차전- 기원전 234년
제2차 정벌전은 진왕 정(政) 13년, 조왕 천(遷) 2년, 기원전 234년에 있었다. 당시 진나라 상층부는 진(秦)과 위(魏) 두 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는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어 이윽고 조나라를 다시 공격하기로 그 전략을 수정했다. 2차전도 1차전과 마찬가지로 진군은 조군과의 초전에서 승리를 취한 여세를 몰아 남로군에 대한 병력을 집중시켜 한단성에 대한 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환의가 이끈 진군 본대는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臨漳縣) 서남의 평양(平陽)에서 조군 주력부대와 회전에 들어가 조군 대장 호첩(扈輒)을 죽이고 10만의 조나라 군사들 목을 벰으로써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이에 환의는 승세를 타고 진군을 이끌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북상하여 한단의 배후로 진출하여 당시 조나라 북방에서 흉노를 방어하고 있다가 한단을 구하기 위해 남하하는 이목(李牧)의 군사들을 요격하려고 했다. 조나라의 주력이 섬멸되자 조왕 천은 위기감을 느끼고 이목에게 명하여 북방의 군사들을 모두 데리고 남하하여 한단을 구하라고 했다.
이목은 조나라의 명장으로 오랫동안 흉노와 싸운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정예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목의 군사들은 야전과 기병전에 능하고 기동성을 장기로 삼은 용맹한 군사들이었다. 조왕의 명을 받은 이목은 대군(代郡)의 군사들을 모두 징발하여 한단성을 구하기 위해 신속하게 남하를 하다가 도중에 환의(桓齮)가 이끌던 진군 주력부대와 조우했다. 진과 조 두 나라의 대군은 지금의 하북성 고성현(藁城縣) 서남의 비하(肥下)라는 곳에서 회전에 들어갔다. 이어서 전쟁터는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동남의 의안(宜安)으로 확장되었다. 이목이 이끄는 조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진군에게 치명타를 날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진군 대장 환의(桓齮)는 패잔병을 거두어 진나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2차전에서 진군은 각 부대간의 협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병력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북쪽의 길을 이용하여 태항산 쪽으로 진격했던 북로군은 남로군에 대한 지원이나 대응책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남로군이 초전에서 승리를 취한 후에 곧바로 다음의 전투에서 패하여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뿐이었다. 조나라는 진군에 대한 방어전에 승리를 취하고 그 공으로 이목은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3. 제3차전- 기원전 233년
3차 정벌전은 진왕 정 14년, 조왕 천 3년, 기원전 233년에 행했다. 3차전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환의(桓齮)를 대장으로 삼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함과 동시에 각 부대간의 임무를 조정한 다음 새로이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 경계로 진군을 개시했다. 당시 조군 대장 이목은 이미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대군으로 돌아가 흉노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이에 진군은 조나라 경내로 진입하여 지금의 하북성 자현(磁縣) 부근의 무성(武城), 평양(平陽), 의안(宜安)을 점령한 다음 예전처럼 군사를 2대로 나누어 남로군은 한단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북로군은 북상하여 이목의 남하를 중간에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나라의 한비(韓非)가 진나라에 들어가 이사와 진나라의 향후 전략에 대해 논쟁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진나라의 상층부는 한나라와 조나라 중 어느 나라를 먼저 공격해야 할 지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3차 조나라 정벌전도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중지되었다.
4. 제4차전- 기원전 232년
4차 정벌전은 1년 후인 기원전 232년에 있었다. 그때는 한비가 이미 죽고 한왕은 진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있었다. 진왕은 한비를 죽인 것에 대해 후회하고 이어서 대군을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했다. 진군을 양대로 나누어 남로군은 업성(鄴城)에 집결시키고, 북로군은 태원(太原)에 집결시켜 남북에서 한단을 협공하려고 했다. 태원에서 출발한 북로군은 지금의 산서성 양곡현(陽曲縣) 부근인 랑맹(狼孟)을 점령한 다음 태항산을 넘어 계속 진격하여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남쪽의 반오(番吾)를 점령했다. 그때 조왕 천(遷)은 한단성 남쪽을 방어하던 조군을 강화하고 이목에게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한단성을 방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목이 다시 한단성 방어전에 참석하자 조군은 진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한 결과 진나라의 북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진나라의 남로군은 장수(漳水)와 그 강안에 축조된 장성에 막혀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었다. 후에 다시 북로군이 이목이 이끈 조군에 의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로군 역시 군사를 파하고 물러갔다. 4차전에도 진군이 물러선 것은 전투에서 아무런 실리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 상층부의 의견이 또다시 바뀌어 한나라를 먼저 멸해야 한다는 의견을 좀 더 깊이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진나라는 전략목표를 바꾸어 조나라를 정벌전은 또다시 뒷전으로 놓이게 되었다.
상술한 4번 째의 조나라 정벌전에서 진나라가 비록 조나라를 멸망시킨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조나라 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조나라의 국력은 더욱 쇄약해져 멸망 일보직전까지 간 것이다. 당시의 어떤 사람이 진나라의 4차에 걸친 조나라 정벌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조나라는 진나라와 황하와 장수(漳水) 강안에서 두 번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취했고, 다시 반오의 남쪽의 두 번 싸움에서 모두 이겼다. 이 네 번의 싸움에서 조나라는 수십 만의 군사를 잃었으며 한단은 근근히 지킬 수 있었다. 비록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했다는 이름은 얻었으나 나라는 거의 멸망직전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진나라가 4차에 걸쳐 벌린 조나라 정벌전은 먼 장래를 내다본 심모원려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진나라의 전략적인 목표는 주요 적대국들의 국력을 약화시킨 후에 한, 위, 조 등의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목(李牧)이 비록 진군을 여러 번에 걸쳐 패주시켰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정세를 반전시킬 수 없었으며 조나라의 역량만을 소모시켜 결국은 조나라의 멸망은 시간문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때 진시황은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4차정벌전 직후 한나라를 먼저 멸하기로 그의 대외전략을 수정했다.
진왕 정 17년 기원전 230년, 진왕 정은 한나라를 멸했다. 당시 연이어 확대된 진나라의 조나라에 대한 공세로 한과 위 두 나라는 두려움에 떨며 그들의 입장은 더욱 고립되고 위태롭게 되었다. 진왕 정 14년 기원전 233년 한왕 안(安)은 그 영토와 옥쇄를 바치며 신하의 나라가 되기를 청했다. 16년 기원전 231년 한나라는 남양(南陽)의 땅을 진나라에 바쳤으며 위나라도 자기들의 땅을 떼어 바쳤다. 같은 해 9월 진군이 4번째로 벌린 조나라 정벌전에서 싸움에서 지자 진왕 정은 한왕이 땅을 바침으로 해서 진나라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있던 한나라를 멸하기로 결심했다. 진왕 정은 즉시 내사등(內史騰)에게 한나라에서 바친 남양(南陽)을 지키라는 명을 가장하여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로 진격하라고 이르고는, 남양을 접수한 즉시 비밀리에 한나라를 공격하여 멸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230년 진왕은 내사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 수도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때 한왕은 오랫동안 영토를 진나라에 떼어주고 받들며 투항정책을 견지함으로 해서, 진나라 군사들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해 전혀 대비를 할 수 없었고, 또한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진군의 공격을 저지할만한 무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한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나라 역시 4차에 걸친 진나라의 공격을 간신히 물리치고 난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입장이라 한나라를 구원할 겨를이 없었다. 위, 제, 연 등의 국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유독 초나라만이 한나라를 구할 여력이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진나라의 전격작전에 의해 한나라는 망한 상태였고, 또한 미리 알았다하더라도 구원군을 보낼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진나라 군사들은 순조롭게 한나라의 도성 신정(新鄭)으로 진군하여 입성하여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의 전 영토를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진나라는 전국칠웅 중의 하나인 한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나라를 멸한데 이어 진나라는 조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공격을 하기 위해 군사를 다시 출동시켰다.
5. 제5차전 - 기원전 229년
진왕 정 18년, 조왕 천 7년에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국내에 전년에 이어 계속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연이어 한해와 기아가 들어 민심이 흉흉하게 되어 조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조나라의 민간에는 다음과 같은 요언이 나돌았다.
“ 조나라는 통곡하고 진나라는 웃으리! 이를 믿지 못한다면 맨땅에서 터럭이 자랄 것이다!”
진나라 군사들은 조나라의 국제정세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대군을 일으켜 남북 양로의 길을 취하여 조나라 경내로 진격시켰다. 북로군은 왕전(王翦)을 대장으로 상군(上郡)의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여 지금의 섬서성 수덕에서 출발하고, 남로군은 양단화(楊端和)를 대장으로 삼아 하내의 병력을 동원하여 업군으로 진격하여 한단성을 남북에서 협격하려고 했다. 조나라는 그 때도 이목(李牧)을 대장으로, 사마상(司馬尙)을 부장으로 삼아 조나라의 군대를 2대로 나누어 진나라 군사들의 진격을 남북 양쪽에서 저지하도록 했다. 북로군은 태항산의 험지에 의지하고 남로군은 장수(漳水)와 그 강안을 따라 축조한 장성에 의지하여 지형상의 유리한 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필사적으로 진군의 진격을 저지켰다. 그 결과 진조 양군은 두 군데의 전선에서 대치상태로 들어가 1년이 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진나라는 조나라에 잠복시켜 놓은 간첩을 최대한 이용하여 조왕의 최측근인 곽개(郭開)를 막대한 황금을 풀어 매수했다. 이윽고 곽개는 조왕에게 이목과 사마상이 모반을 하여 조나라 정권ㅇ르 탈취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조왕은 곽개의 말에 넘어가 이목과 사마상을 파면하고 조총(趙葱)과 안취(顔聚)를 대신 임명한 다음 전선으로 보냈다. 그러나 적군과 대치 중인 장수는 왕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목은 군사들의 병권을 순순히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왕은 별도의 사람을 보내 이목을 잡아 살해하고 사마상은 죽음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이어 해가 바뀌어 기원전 228년 진나라 군사들은 맹렬한 진공작전을 펼치자 장수가 바뀌어 지휘계통이 혼란해진 조군은 사기가 꺾인 나머지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조총은 전사하고 안취는 도주해버리고 말았다. 진나라의 북로군은 승승장구하여 태항산의 동록의 땅을 전부 점령하고 이어서 업성의 남로군과 함계 한단성을 남북에서 공격하자 한단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조왕 천은 진군의 포로가 되고 조나라는 망했다. 한단성이 진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원래 조도양왕의 적자였던 공자 가(嘉)가 조씨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북쪽의 대군으로 달아나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라 대왕(代王)이라 칭했다. 대왕은 연군과 연합하여 상곡(上谷)에 주둔하며 진군의 북상을 저지하려고 했다.
시황 20년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나라가 군사를 보내와 연을 침공할 것을 걱정하여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진왕(秦王)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진왕이 알고 형가를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고 백성들에게 보였다. 또한 왕전(王翦)과 신승(辛勝)을 장군으로 삼아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연과 대(代)가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군사를 맞이해서 싸웠으나 진나라 군사들이 연(燕)과 대(代)의 연합군을 이수(易水)의 서쪽에서 파했다.
시황 25년 기원전 222년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왕분(王賁)을 장수로 삼아 요동의 연왕을 공격하게 했다. 왕분이 싸움 끝에 연왕(燕王) 희(喜)를 사로잡았다. 회군하던 길에 대(代)를 공격하여 대왕 가(嘉)를 잡아 포로로 하였다. 이로써 조나라의 사직이 끊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