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에서 뮈델 주교와 안중근을
생각하다
수안보는 과거 중원군 상모면이었지만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충주시 수안보면이 되었다. 그러나 지역 간 거리는 제법 멀다. 나는 충주터미날에서 제천행 버스에 올랐다. 제천까지 버스로
1시간 거리다. 과거 나는 여러 번 박달재를 넘어 제천에 갔었다. '울고넘는' 박달재 정상에는 주막이 있어 도토리묵과 묵국수를 팔았었다. 그
맛을 보려고 가족들과 몇번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박달재 밑으로 직선도로가 생겨 예전같은 정취는 없다. 제천 터미날에는 나와 오랜 친분이
있는 김한기 신부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신부는 삼척 출신으로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하다 성소를 느껴
다시 가톨릭 대학에 입학해 졸업한 후 호주 골롬바노 신학교를 마치고 1983년 사제가 된 분이다. 김 신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사제서품
이듬 해 첫 본당 임지로 풍수원 성당에 부임하면서이다. 당시 나는 서울의 레지오 단원이나 꾸르실리스따들을 풍수원 성당으로 안내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자연히 후원회가 조직되어 강원도의 유서깊은 풍수원 성당을 성역화하는데 작은 힘을 보탰다. 당시 풍수원 성당 주일헌금은 30년
전이지만 2만원도 채 안 되었다. 그 때는 원주나 춘천, 안동 등 지방교구들이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 농촌이 따로
없을 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 후 나는 이민길에 올랐고 김 신부와는 소원해졌는데 뜻밖에도 김 신부가 뉴욕에
교포사목을 나오게 되어 미국에서 반갑게 재회한 것이다. 이날 터미날에 마중나온 그는 머리가 하얗게 변한 늙은이 모습이다. 풍수원 시절 젊었던
모습이 떠올라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날 김 신부가 사목하는 청전동전성당은 부활절을
열흘 앞두고 지역사제 10여 명이 합동으로 판공성사하는 날로 무척 바쁘다. 이날 저녁 신부들 모임에서 식사했는데 낮익은 신부님들이 보여
반가웠다. 나는 신자들과 십자가의 길을 바친 후 판공성사하는 동안 성당 회장 위성태 씨가 나를 의림지로 안내했다. 의림지(義林池)는 내가 40년
전 와 보았던 곳이다. 나는 당시 접시물에 헤엄치는 빙어를 젓가락으로 집어 초고추장 찍어 먹던 생각이 난다. 몬도가네식 식사법이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에 축조된 인공저수지로 의림지는 현재까지도 관개기능을 하는 유일한 삼한시대 저수지이다. 저수지 축조당시
제방에 조림된 소나무, 버드나무 숲인 제림(堤林)은 의림지와 더불어 국가명승지 20호로 지정되었다. 의림지는 그동안 몇차례 보수했다지만 2천 년
가까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랍다. 또한 1.8킬로 호수 둘레에는 편안한 산책로가 만들어져 제천의 으뜸가는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호숫가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과 경호루(鏡湖樓) 정자와 누각은 이조시대 것을 6.25후 복원한 것이다. 위 회장과 나는 의림지 호숫길을 산책하면서
야경을 감상했다. 산책길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성당 부근으로 옮겨 식당에서 가볍게
한잔하면서 성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이튿날 새벽 성당에서 기도를 바친 후 김
신부와 설렁탕으로 식사하고 10시 아침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중 김 신부는 나를 신자들에게 미국에서 온 순례자라고 소개했다. 이날 김 신부는
나를 배론성지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방에서 배낭을 갖고 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오래 기다리시다 내가 나오자 여비에 보태라며 얼른
봉투를 건네준다. 몇번이고 사양하는데 자신의 사순절 선행이라며 굳이 쥐어주고 떠나셨다. 지금도 그 할머니 이름조차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밖에서는 위 회장이 기다리다 우리와 함께 배론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배론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면모가 바뀌었다.
배론은 제천 10경에 드는 아름다운 곳으로 산 계곡따라 형성된 지형이 배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론성지의 핵심은 신학교터와
황사영 토굴 그리고 최양업 신부 묘소이다. 그밖에 대성당과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길 등은 순례자들의 미사와 기도를 위한 시설들이다. 나는 이날
김 신부의 안내로 토굴과 신학교를 들러보고 언덕 위 원주교구 성직자 묘지에 들러 지학순 주교와 몇달 전 성탄전야에 선종한 안승길 신부 묘소를
참배했다. 또한 우리는 오른 쪽 산 중턱 최양업 신부 묘소를 찾아 큰 절을 올렸다. 우리는 대성당과 성당 앞에 마련된 미로공원 등을 둘러보고
성지를 떠났다.
배론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신해박해(1791년) 무렵이다. 강그레고리오와 김귀동 가족이 먼저 정착했는데 신유박해인 1801년 8월 황사영이 김한빈과 이곳으로 피해 김귀동
집 뒤 토굴에 은신하면서 백서를 작성했다. 이를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황사영은 11월 김한빈, 황심과 함께 대역무도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황사영 가족들의 눈물겨운 사연은 나의 추자도 기행문에서 다룬 바 있다. 나는 이날 배론성지 순례를 계기로 그동안 궁금했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서울 절두산 순교기념관에는 황사영 백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바티칸 박물관에 있다. 나는 황사영 백서 원본이 어떻게 바티칸에
있는지 궁금했었다. 이날 저녁 숙소에 컴퓨터가 있어 원주교구 홈페이지를 방문했는데 경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원주교구에 따르면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에 둘도 없는 흉한 글이라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 속에 집어넣고 백년가까이 숨겨오다 1894년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라며 간직했다가 그의 천주교 친구인 인건영에게 넘겨주고 이 씨는 민 주교께
바쳤다.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민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민 주교는 백서의 실물 대사본 2백여
매와 불문 번역본을 그때 교회 내외 인사들에게 배부했다."고 되어 있다. 조선교구 8대 교구장 뮈델(1854-1933 한국명 민덕효) 주교는
종교자유가 이루어진 1890년 입국하여 1933년 사망할 때까지 43년 간 주교로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일제 식민지
통치에 협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안중근 의사에 대한 그의 태도는 지금도 한국교회의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출생한 뮈델은 1873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77년 사제로 서품되고 한국 선교사에 임명되었으나 계속된 박해로 입국하지 못했다. 그는 만주에서 한국관련 문서들을
정리하고 일본교회 순교자 시복과정을 견학해 훗날 한국 순교자 시복에 대비했다. 1880년 11월 황해도에 상륙한 그는 백천에 은거하면서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했다. 1885년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파리에 귀환했던 그는 1890년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뮈델 주교는
그해 8월 주교 성성식을 마친 후 다음 해 2월 신부 2명과 조선에 재입국했다. 이때는 이미 한불 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조선에는
20명 선교사와 7개 성당 및 신자 1만 2천 명이 있었다. 그는 사목표어를 '순교자들의 꽃이 피어나게 하라'로 정하고 순교자 현양과 79위
순교자 시복을 추진했다. 뮈델 주교는 현석문의 '기해일기'와 함께 '병인일기'를 편찬하여 한국교회사 기초를 정립했다. 또한 그는 메리놀회
한국진출을 도와 평안도 지역 사목을 이양했다. 뮈델 주교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대구교구를, 함경도와 간도지방에 원산교구 설립을 추진했다.
그는 1920년 교황청 작위를 수여받고 1925년 3월 대주교로 승품되면서 그해 7월 5일 숙원이던 79위 순교자 시복식이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무엇보다도 뮈델 주교의 상징적인 업적은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황제 어머니인 민대부인에게 세례를 준 것이다. 이는 박해자들에
대한 천주교의 완전한 승리로 평가된다. 세례명이 마리아인 민대부인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천주교를 신봉했다. 그녀는 남편을 천주교로 인도해 줄
것을 주교에게 희망했으나 대원군은 부인의 일에 감사하다며 뮈델 주교에게 선물을 보내면서도 만나는 것은 왕실사정을 핑게로 끝내
사양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뮈델 주교는
지나치게 일제에 협력하는 방법으로 교세 확장을 도모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려는 신학생들을 퇴학시키겠다는
위협으로 억눌렀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당시 일을 기록했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신학생들이 울며 애원하는 독립운동의 열망을 단호히 외면한 것이다. 그와 안중근 의사의 악연은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안중근은 조선이 국력을 키우려면 교육이 절대적이라 생각하고 다른 선교사와 의논한 후 뮈델
주교를 찾아가 서양의 수도원을 진출시켜 대학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이때 뮈델 주교의 대답은 조선인들이 학문을 배우면 천주교 신앙에
좋지 않다는 엉뚱한 이유를 들면서 재론하지 말라고 못박았다. 안중근은 그에게 실망하여 천주교의 교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은 믿을 것이 못된다며
그때까지 배우던 불어공부를 중단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났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하자 뮈델 주교는 그를 살인자로 단죄하고 잘못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안중근이 응하지 않자 뮈델 주교는 그를 파문하고 성사를 받지 못하게 했다. 황해도를 사목하던 홍빌렘 신부가 안중근을
면회하고 처형직전 성사를 베풀자 뮈델 신부는 그에게 2개월 성무집행 정지명령을 내렸다. 뮈델 주교는 1933년 1월 23일 80세로 서울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훗날 노기남 대주교는 해방 이듬해
명동대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안중근에 대한 교회의 처사를 공식사과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에서 "일제
치하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어른이 안중근 의사 의거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가지 과오를 범한데 대한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일제당시 제도교회에 한국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친일적 행위가 있었음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사람으로서
마음 아파합니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김 추기경은 안중근 행위에 대해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로 즉 의거로 보아야 합니다."라고 안중근 의사
행위는 살인이 아닌 의거임을 명확히 밝혔다. 현재 서울대교구는 안중근에 대한 시복까지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날 내가
배론성지를 순례하면서 느닷없이 뮈델 주교를 생각한 것은 황사영 백서가 그에 의해 바티칸에 기증된 것을 확인하고 자연히 그분과 안중근의 관계까지
떠올리게 된 것이다. 또한 안중근과 관련해서 이곳에 묻힌 지학순 주교와 안승길 신부의 생전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두 분다 유신독재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분들이며 안중근에 대한 공경심 또한 각별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안승길 신부가 특강을 통해 안중근 의사를 재조명하자고
강조하는 것을 들었고 지학순 주교도 안중근 도마의 신앙을 본받자고 강론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 배론에서 잡혀간 황사영, 김한빈은 물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장주기 등 이곳과 관련된 20여 명의 순교자들 모두 어두웠던 당시에는 대역죄인이었으나 대명천지인 오늘날에는 공경받는 성인의
무리들이다.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암울했던 당시에는 살인자로 처형되었으나 밝은 세상에서는 독립 영웅이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일제 때만 하더라도 그 당시 세상물정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천황에 충성하는 것이 올바른 황국신민의
도리로 생각하고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마적이나 다름없이 생각했을 수도 있다. 군부 독재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하는 학생들과 지식인,
사제들까지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좌경화된 사람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민주화된 밝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좁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닐 것 같다. 이날 김 신부는 나를 제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숯불갈비집으로 안내했다.
여행길에 몸보신하라는 배려인 것 같았다. 여비까지 보태 주면서 나그네를 따뜻히 맞아주는 김 신부께 미안한 마음이었다. 하필 가장 바쁜 날 찾아
와 너무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다음 행선지인 영월까지 안내해 주지 못해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해 그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터미날에서 영월행 버스에 올라탔다. 또 무슨 인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2014.8.7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