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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겸손한 것으로 충분치 않다. 등 )
* 06: 55 ,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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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08 05:49
사순 3주 금요일
<사순 3주 금요일-2018. -겸손한 것으로 충분치 않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랑이 으뜸가는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으뜸 계명이라면 이런 말이 가능하겠습니다.
겸손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만하지 않은 것으로는 더더욱 충분하지 않다.
또 죄와 관련지어 얘기하면
교만한 것은 그리 큰 죄가 아니다.
겸손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그리 큰 죄가 아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충분치 않고
사랑치 않는 죄에 비하면 교만도, 겸손치 않은 것도 그리 큰 죄 아니다.
교만이 죄인 이유도 사랑치 못하게 하기에 죄이고
겸손이 중요한 이유도 겸손해야 사랑의 기초가 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난과 사랑의 관계도 얘기할 수 있고,
사랑과 모든 덕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모든 덕은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덕의 완성은 사랑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코린토전서 13장, 사랑의 찬가에서
다른 덕들의 완성인 사랑에 대해서 칭송을 하는 거지요.
사랑이 없으면 예언의 능력도 지식도 믿음도 소용이 없고,
반대로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 친절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그것을 알면 되고,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면 되는데 자주 하찮은 것에 매달리고,
하찮은 것에 걸려 넘어져 사랑하지 못함을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어제 너무 많은 일로 늦게 잠들고,
그래서 오늘 늦잠을 자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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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싱크 어게인’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우리가 성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생각하기’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이제껏 배운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당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지요. 이것은 정체성의 위상을 지키려는 본능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을 바꾸면 안 될까요?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지요. 계속해서 완성되어 나갈 뿐입니다. 따라서 다시 생각하면서 ‘정체성’을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해 봤자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생각할 수 없을까요? ‘전에 해봤는데 소용없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 또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너무 어려워. 나는 절대 못 해.’라는 생각도 다시 생각해야 할 말이 아닐까요? 만약 당신과 가장 친한 사람이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나 친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다시 생각하라고 정중하고 간곡하게 부탁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며칠 전에 지방으로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너무 늦은 시간이고 너무 피곤했습니다. 씻는 것도 귀찮고 얼른 침대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녁기도와 끝기도를 바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생각했습니다. 피곤해서 곧바로 침대에 눕고 싶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줄이고 기쁘게 기도를 마치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랑의 계명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신명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셨던 사랑의 계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만든 세부 조항 613개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세부 조항 613개 모두 중요하다고 하니, 만약 두 개의 조항을 동시에 지켜야 할 상황이라면 어떤 조항을 지켜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정작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랑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다른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잘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모습을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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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질서 있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결정한다(펄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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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레위 19,18)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레위 19,34)에 한정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루가 10,30-37),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암수동체와 같은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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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행하거나 판단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는 이중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 학자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 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 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 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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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수첩’이었습니다. 주인공 최민식은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수첩을 꺼내서 연락처를 찾았습니다. 그 수첩에는 주인공 최민식을 위험에서 꺼내 줄 ‘동아줄’이 있었습니다. 최민식은 집안의 어르신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는 검사에게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수첩은 아니지만 제게도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에는 그동안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연락처가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께 스마트폰에 있는 연락처를 알려드렸습니다. 신문홍보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휴스턴 본당에서 잠시 머물 때입니다. 본당 봉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몇 마디 대화를 하니 함께 아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 자매님은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유치원생이었다고 하는데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혼배 주례 사제가 저를 신학교에 추천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이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동창신부님의 동생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저와 같은 고향이었고, 제 사촌 형제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5명만 거치면 지구촌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LA에 가면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차량 봉사를 해 주던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에 후원을 해 주고, 아침이면 같이 미사를 하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 서부지국의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토론토에 가면 공항까지 나와 주고, 차량 봉사를 해 주던 분이 있습니다. 버지니아에 가면 가족처럼 살갑게 대해 주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형제님은 박학다식하여서 버지니아에 있는 성당들의 순례를 도와주었습니다. 보스턴에 가면 늘 맑은 목소리로 보스턴의 명소를 알려주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자매님의 안내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갔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머물렀던 ‘월든’ 호수에도 갔었습니다. 5년간 머물렀던 뉴욕에는 제게 힘을 주고, 저를 도와주었던 분들이 많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지냈던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미사를 하였던 브루클린 공동체가 있습니다. 특수사목을 하다가 12년 만에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을 하는데 많은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남의 재물이나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죽음의 골짜기를 갈지라도 안전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늘 싱싱하게 열매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죄인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잡으려는 동아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동아줄은 튼튼해 보여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동아줄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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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하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은 분명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일까요? 왜 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말입니다. 생각이 정신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빠졌습니까? ‘목숨’이 빠졌습니다.
율법 학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을 따른다면 그는 분명 ‘목숨’을 거는 행위를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많은 사람의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일입니다.
주님 곁에 있던 사도들과 율법 학자와의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목숨’ 말입니다. 사도들은 목숨을 예수님께 걸어봅니다. 생명으로서의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 삶 속에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내 삶을 모두 누군가에게 내어 거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순교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늘나라를 선택한 이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세례로서 받아들이고 성체성사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이제 우리의 생명과 예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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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라는 훈장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는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도 실수하는 사람인 것을….
그리고 그 실수는 크든 작든
몸과 마음에 흉터를 남깁니다.
한동안 아픕니다.
잊혔다가도 다시 깊은 곳에서 올라와
나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흉터가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흉터는 교훈이 되어줍니다.
다른 상처를 얻지 않도록….
그 흉터는 길 안내자가 되어줍니다.
다시 아픈 곳으로 걷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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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회개와 사랑, 새로운 삶-
오늘의 다산 어른의 말씀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사랑 하나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사랑으로 정리된다. 내 마음의 바름을 다른 이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다.”-다산
사랑이 답입니다.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가 사랑입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이요 삶의 의미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삶은 ‘사랑의 학교’로 정의하곤 합니다.
“공자가 ‘삼아! 내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스승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논어
공자 역시 충서의 사랑, 용서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용서의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새로 구입한 소설의 문장 표현들이 너무 아름다워 처음 두페이지를 소리내어 읽어봤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아름다움이 감동을 주고 마음을 정화합니다. 어제 강론중 인용된 “산과 강”이란 제 자작시에 감동하여 보내준 댓글도 잊지 못합니다.
“내가 머물면 산이고 움직이면 강이다. 와! 신부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사랑합니다. 최고세요.”
한 자매는 ‘산과 강’을 시화(詩畫)로 만들어 보내줬고 덕담의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자매님 시화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네요! 축하드립니다.”
이 또한 사랑의 덕담입니다. 의도적, 의식적으로 누구든 저는 이름 앞에 과감하게 “사랑하는” 이란 말마디를 꼭 붙입니다. 고백하라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백하다 보면 사랑이 뒤따라 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고백하며 막 살 수는 없으니 나를 위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전례가 좋은 것은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집 피정집 벽에 붙어있는 제 자작시 “사랑”이란 시화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27년전 시이지만 당신으로 지칭된 주님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늘 새롭게 타오르고 있음을 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습니다. 사랑의 열정, 사랑의 순수, 열정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강조되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주님은 이웃 사랑까지 덧붙여 답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갈림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이자 하나인 사랑이되 우선순위는 하느님 사랑에 이은 이웃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공감, 감동한 율법학자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고 화답합니다. 호세아서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
신의의 사랑, 예지의 사랑입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거룩한 전례의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삶이 바탕된 참된 전례에 대한 강조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가 아닌 삶과 전례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는 공허(空虛)하고 전례가 없는 삶은 맹목(盲目)일 수 있습니다. 전례와 삶은 둘이자 하나요 함께 가야함을 봅니다. 미사전례는 삶으로 확산(擴散)되고 하루의 삶은 미사전례로 수렴(收斂)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흡족해 하시며 그를 격려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율법학자는 지금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궁금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화신이자 그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며 평생 예수님께 보고 배워 살아야 할 사랑의 이중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회개하라, 사랑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끝납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영혼의 화장에 사랑의 기도와 회개보다 더 좋은 화장품도 없습니다. 사랑의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아름답고 깊어지고 향기로워지는 영혼입니다. 호세아가 우리 모두에게 거듭 요청하는 바,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날까지 숨쉬듯, 밥먹듯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집중적 회개의 시기, 정화와 성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와 사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축복이요 날로 새로워지는 사랑에, 삶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호세아 예언자처럼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이자 시인인 호세아의 사랑의 시가 호세아서의 대미를 참 멋지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 하나하나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주님의 미사축복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회개에 따른 하느님 사랑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호세14,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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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하느님, 하느님의 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나의 하느님께서
나를 있게 하시니
내가
나의 나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로 있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나를 살게 하시니
내가
하느님의 나로서
하느님의 나답게 사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내게 너를 주시니
내가
하느님의 나와 같이
하느님의 너를 품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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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최고의 덕
이것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참조: 마태 22,39; 마르 12,31; 루카 10,27).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지체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이라고 말씀하신 분을 기억하여 큰 자비를 보여 줍니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 드린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초라한 겉모양새를 따지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것은 곧 당신께 해 드린 것으로 받아 주시기로 약속하신 분의 위대하심을 생각합니다(마태 25,31-46 참조).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영성의 대가는, 이러한 생명의 형식을 지닌 존재에 이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시간에 매여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에 매인 것은 무엇이든지 죽게 마련입니다. 영성의 대가는 하늘의 길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시간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은혜에서 멀어져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늘의 길은 영원합나다. 그것은 시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순수한 형식의 존재 안에 붙박여 있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거스르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체적으로 대립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립이란 무엇입니까? 사랑과 슬픔, 흰색과 검은색 – 이러한 것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존재 안에서 대립은 영원하지 않습니다.(133)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새로 세례받은 사람들의 모범인 바오로
이 땅 전체의 스승이신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도 세례는 그러했습니다. 그는 먼저 교회를 박해했고, 온 땅을 샅샅이 뒤져 남녀 신도들을 붙잡아 끌고 갔으며, 광란에 사로잡혀 미쳐 날뛰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내렸습니다. 올바른 인식의 빛으로 그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알게 되어 착각의 어둠을 벗어버리고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는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완전히 유다인 편이 되어 교회를 완전히 없애려고 했던 사람이 그와 똑같은 열정으로 다마스커스에서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이 하느님의 이들이시다” 라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 안에 있는 그의 고귀하고 똑바른 신조를 보십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행동 안에서 그가 이전에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행동했다는 것을 보십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통해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일어난 사건을 통해 하늘나라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격과 진리의 길로 인도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보십니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품위 있고 올바른 신조를 가진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섭리로 그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노력히여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이 거룩한 사람을 통해서 봅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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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도 이와 비슷한데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가는 계명을 우리는 자주
이웃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인간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에는
우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담고 있기에
인간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가는 계명과 함께 보자면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은 누구만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다보면
세상 모든 것이 좋아보이고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같은 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 둘은 실제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더 나아가서
인간 말고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데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합니다.
그 사람과 맺는 관계가 다르기에
사랑의 깊이가 다르다고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미워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까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한 사람을 정말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랑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관계를 통해
내 안의 사랑이 충만해질 때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 다른 피조물,
더 나아가 하느님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발점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누구는 하느님
누구는 나 자신
누구는 옆 사람
누구는 내 주위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면서
더 넓게 확장되는 사랑도 함께 느낄 수 있는
나날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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