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55
10월26일[연중 제2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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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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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_ZYPqHGFu0
(수원교구 이지성 임마누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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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더 큰 아버지, 영원불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묵상할 때 유의할 사항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의미,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 노력입니다. 어떤 부분은 있는 그대로 수용해서는 절대 안 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전후 맥락도 살펴보고 말씀이 의도하고 강조하려는 요지가 무엇인지도 따져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51~53절)
예수님께서는 평소 하느님 공경에 이어 이웃 사랑 역시 아주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복음 10장 27절)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족끼리 서로 등지고 갈라서라는 의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불효자나 패륜아가 되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최 우선권을 드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 앞에 배치시키라는 요청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부모 사랑이나 자식 사랑을 금지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 모든 인연 위에 하느님을 모시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자녀는 실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복입니다. 그러나 복을 내리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보다 복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더 큰 아버지, 영원불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기도(조이수 詩人)
주님 제가 아이들 곁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도록 하소서.
지난날은 아버지 없는 아이들로
거리를 헤매도록 했습니다.
이제, 눈 내리는 겨울 창가를 보며
말씀의 벽난로에 둘러앉아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도록 도와주소서.
눈이 멎고 찬미가가 울리는 날 제 아이들이
마지막 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되게 하소서.
아이들에게 참된 아버지는 제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란 걸 뼈져리게 가르치고
훨훨 떠나도록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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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3_62VP2Z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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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불은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갈라지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와 맞서는 새로운 체제를 갖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창시자로 기억됩니다. 많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수도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실현할 수도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젊은 안토니오는 약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을 때 부자 청년의 복음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문제가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팔고 사막으로 들어갔고 20여 년을 수련한 후에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은둔 수도회의 초창기 형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안토니오에게 떨어졌던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이는 혼자만 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불타도록 만들라는 명령과 같았습니다. 불은 붙어 있는 것들을 함께 태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혼자만 타게 만드는 불은 없는 것입니다.
동방의 수도회 시초가 성 안토니오라면 서방은 성 베네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연대상으로 2백 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청년 때 로마에서 교육받다 도시의 부도덕한 생활에 실망하여 수비아코라는 곳의 바위 동굴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창설하고 “일하고 기도하라”라는 깨달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체제는 진실보다 강합니다. 공동체는 진리보다 강합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바보 마을에서 해시계는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공동체에게 합당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진리에 합당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성령의 감도가 숨을 쉴 수 없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소화성 궤양과 위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발견은 의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발견은 궤양이 주로 스트레스, 매운 음식 또는 과도한 위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오랜 믿음에 도전했습니다. 이 발견을 한 호주의 두 과학자인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 박사는 수년 동안 의료계에서 거부당해왔습니다.
이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샬 박사는 헬리코박터균 배양액을 마셨습니다. 며칠 내에 그는 위염이 발생하여 박테리아가 위염을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체 실험은 위험했지만,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직화된 의학계가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연구하는 집단을 세우고 끊임없는 반복 실험과 결과를 제공하자 어쩔 수 없이 의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력이 10년 뒤에 결실을 거둬 둘은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수도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교회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중에야 교황이 회개하여 탁발수도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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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의 날개만으로는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는 서로 대립하거나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 주는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는 여당과 야당이 있습니다. 여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일정기간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입니다. 야당은 국민의 선택은 받지 못했지만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이 국가를 위한 것인지 살펴보고, 다음에는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정당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야 합니다. 국민은 보지 않고 상대방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정당만 있다면 그런 국가는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3류 국가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1류 국가를 만들어 복지와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3류 국가를 만들어 독재와 폭력으로 가난과 공포가 만연하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냉철한 판단과 불의에 맞서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는 시민들의 용기만이 문화와 복지가 넘쳐나는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땀과 열정, 때로는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라보는 성찰입니다. 깊은 성찰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낳습니다. 회개와 결심이 없는 성찰은 울리는 징과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있지 못하는 불충한 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때리고, 주인이 보낸 외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나쁜 소작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곳간에만 재물을 채우고 좋아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만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었던 부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면서 남들도 들어가기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하고 회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가진 것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는 늘 ‘패자부활전’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입니다. 성찰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라면 식별은 그런 성찰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입니다. 고독과 위안이 식별의 기준은 아닙니다.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우리는 악으로부터도 고독과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적인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욕망과 욕심에서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방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채워지는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를 육적인 고독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육적인 위로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던 부자입니다.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아놓고 좋아했던 부자입니다. 명예와 권력, 재물에 취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적인 위로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독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영적인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산상수훈’은 영적인 위로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런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불은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불은 영적인 위로와 고독을 식별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찰과 식별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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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 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 이 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동반자가 되게 한다.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으로 단련시킨다. 사랑은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 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 사랑은 환해졌고 정의는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이 세례는 피와 순교의 세례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 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로,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면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서나, 가정 안에서나 갈등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이 둘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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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 평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이 구절의 '불'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을 지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점화'이고,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수가 가득한 오아시스로 인도한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마워하면서 그 물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맹물은 맛이 없어서 싫다면서 다른 음료수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실천해서 참 행복을 얻고,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은 싫다면서 자기가 바라는 세속적인 쾌락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길을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그 길이 너무 좁고 험해서 싫다고 하면서 다른 길로 갑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냅니다.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죽게 되는 길'로만 가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입니다."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 구절의 '세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로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당신이 희생하고 헌신해도 하느님께 반역하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고집스러운 모습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온갖 고생을 하는 부모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고생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고생을 해도 정신을 못 차리고 빗나가기만 하는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말씀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뜻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건만 인간들은 평화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분열만 일으키고 있다."입니다. 이 구절의 '평화'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 구원,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열'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과 얻지 못하는 사람 사이의 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참 평화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움과 박해는 식구들마저 분열시킵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루카 12,52) 식구들이 예수님 때문에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이 구절의 말씀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이 분열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심한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통치자들의 박해보다 식구들의 박해가 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라고 하셨는데, 미워하고 저주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의 식구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욱더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그 식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면서 그에게 계속 잘해 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데, 식구라면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미움과 학대를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면, 언젠가는 그 식구도 신앙인이 될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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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서 24일과 25일의 복음에서(12,35-48 참조) 준비되었습니다. 주인, 사람의 아들, 도둑과 같은 설정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견 목적을 설명하시는 바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파견되신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불은 구약 성경에서 정화(레위 13,52; 민수 31,23 참조), 구분이나 분별(예레 23,29; 이사 22,14 참조), 또는 심판의 수단을(창세 19,24; 탈출 9,24; 이사 43,2 참조)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심판’의 수단으로 쓰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심판자의 역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 기대하였던 역할과 차이를 보입니다. 루카 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신 평화의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으며(1,79; 2,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방문하는 집에 평화를 빌어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5-6 참조)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할은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으로 예고되었습니다.(2,34-35 참조) 시메온의 예언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도 있지만 반대하는 자도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배웁니다. 예수님의 자기 소개는 우리를 향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를 성찰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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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립되는 의미의 단어들이 줄곧 등장하여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분 맞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한때 평화라 믿었던 현실이 안주와 고착으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을 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하여 현실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진실이었던 것이 여전히 진실인지, 그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직도 공동선에 유익한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는 이가 필요하지요. 그 안에서 질문을 일으키는 존재는 불, 곧 성령이십니다.
물론 그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기득권자들을 불안하고 성가시게 한 죄로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반동세력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지요. 그가 제기한 논점은 사라지고 질문을 제기한 자체로 상종 못할 인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이제 그가 감히(?) 깨뜨린 평화가 진정한 평화였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라 믿던 안위와 무탈과 야합의 가면을 찢고 진정한 평화에 이르려면 균열과 진동, 맞섬과 갈라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을 이루는 두 진영을 선명히 대조시켜 줍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로마 6,19)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더러움과 불법을 일삼고, 결국 죄와 악의 종이 되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끝은 결국 죽음이지요. 그가 어떤 제도에 속한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자기 선택에 따라 영혼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질식되고 악이 기승을 부리는 놀이터가 되고 말지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그간 죄와 맺었던 달콤한 동맹을 깨고 죄에서 갈라져 나와 그동안 주인이었던 죄와 맞서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기울기대로 굳어져서 존재의 방향으로 틀어 올리려면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 주인 자리를 다시 내어드린 이는 그간의 더러움이 어떠했어도 다시 거룩함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구원 의지를 믿는 그 자체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얕은 살얼음판 같은 거짓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영혼에 놓으신 성령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면,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에 귀 기울여 볼 일입니다.
시편 저자는 죄와 오래되고 끈질긴 동행을 끊어내고 거룩함의 길에 들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진리의 불길이 닿으면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인간적 세속적 관계들에 얽혀 있다면 그 관계가 어디서 양분을 받으며 유지되는지, 이 관계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곁으로 모아 주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진정한 평화를 향해 흔연히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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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어떻게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의 삶을 둘러보면 평화롭거나 쉬었던 일은 없고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으셨던 힘겨운 나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순탄하거나 영광의 길은 아니었고 집도 없는 뜨내기 삶이셨습니다. 주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혈육으로 맺어준 가족에게서 떠나는 삶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보통 사람의 삶을 사셨다면 고향에서 가족들과 오손도손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다운 고향에서 혈육으로 부모인 요셉의 직업을 대물림하시면서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셨을 것이지요. 물론 복음서는 주님께서 나자렛에서 어떻게 유년 시절을 보고 어떻게 성장하셨는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았어도 부모에게 순명하신 주님께서는 가족이나 이웃을 힘들게 하시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합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표현 중에 오늘 말씀은 강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
주님의 길을 좀 더 가까이 보면 나자렛에서 사신 삶 외에는 가족을 떠나신 삶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공생활을 하시면서 가족과의 연결에서 자유로우신 삶을 사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강하고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소명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분열도 혼란도 싫어합니다. 그저 안일무사하고 평화의 시간을 갖기를 내심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앞 날이 결코 평탄하지 않고 박해의 연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그렇게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것은 혈육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족을 떠난 것처럼 이제는 인간이 가장 약하고 걸려 넘어질 것 같은 혈육을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육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말이 쉽지 가족을 떠난다는 것, 서로 가치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뛰어넘기가 사실 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갈라지는 가족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장 52-53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준엄한 일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관계를 놓고 적당히 넘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사실 중요한 가족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적대와 분열의 관계로 이끌어 가시려고 합니다. 이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부정도 그렇고 어떤 계획이 좌절되는 것 중에 대부분 가족이나 혈연에 막히는 일을 자주 봅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은 그 만큼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며 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른 제자에게 아버지 장례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절대적입니다. 인간적 관계나 어떤 이익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소극적이거나 평온의 길 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역동적이고 과감한 도전의 끝과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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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분심이 심하더라도>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지리라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든 것과 대항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가족에게까지 몰이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 복음의 불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 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 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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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생각하지 말고 다음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천재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자는?’ 저의 경우 이에 대한 대답으로 모나리자,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빌 게이츠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 없이 답변하면 ‘뻔’한 결과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처음에 나오는 자동적으로 나오는 대답은 썩 재미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이나 의미 있는 대답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나오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철저히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즉,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너무 섣부르게 생각합니다. 이 섣부름이 예수님을 자기와 상관없는 분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지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천천히 떠올리려 하기보다 ‘나를 미워하신다, 불공평하신 하느님이다.’ 등의 불평불만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나왔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그리고 이어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말씀도 하시지요.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말만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은 폭군인가? 예수님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회 부적응자인가? 등의 생각이 곧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느린 사고를 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단순히 힘 앞에서 굴복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과정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의 불을 심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평화보다 주님의 평화를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천천히 그리고 느린 사고를 받아들여 보십시오. 분명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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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길 걷는 이여>
루카 12,49-53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대, 길 걷는 이여>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그대, 길 걷는 이여
이 길은 저 길이 아니요
저 길은 이 길이 아니니
이 길 저 길 맘대로 섞지 마시게
그대, 길 걷는 이여
이 길은 저 길이 아니요
저 길은 이 길이 아니니
아무 길이나 그저 걷지 마시게
그대, 길 걷는 이여
이 길은 저 길이 아니요
저 길은 이 길이 아니니
다만 걸어야만 할 길을 걸으시게
그대, 길 걷는 이여
마침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이 길 저 길 탓하지 않는
자랑스러운 그대를 만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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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같이 타오르고, 칼같이 끊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얼핏 보면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의미가 있고 옳은 말씀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보면 이 분열은 틀림없이 좋은 분열이고 거룩한 분열일 것입니다.
그 분열은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그러나 타파해야 할 그런 분열이 아니고 분명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는 분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분열은 자기중심적 분열이고 악마적이지요. 우리는 이해득실을 따져 이합집산하고, 좋으면 합치고 싫으면 갈라서는 그런 분열이잖습니까?
그리고 악마가 노리는 것은 늘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고
그 백성을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거잖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하느님 뜻을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분열이고 그래서 거룩한 분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평화롭지 못하면서도 평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치를 살지 못하면서도 일치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일치를 원하면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평화와 일치를 살지 못하는데 거룩한 일치와 분열은 더더욱 살기 힘들겠지요. 그런데 거룩한 일치는 무엇이고 거룩한 분열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일치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일치는 알겠는데 거룩한 분열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분열의 두려움이 있지요. 그래서 신자들조차 하느님과의 분열보다 사람과의 분열을 더 두려워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불의와 타협하며 같이 사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일치도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열은 악령들과는 결단코 맞서고 갈라서는 분열이고,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칼같이 끊는 분열입니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반대하는 육신의 아버지와 칼같이 갈라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버지로 모시기로 하였지요.
그런데 불의를 칼같이 끊기 위해서는 사랑이 불같이 타올라야겠지요? 뒤집으면 하느님 사랑이 불같이 타올라야 불의를 칼같이 끊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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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답이다” -
“성화되십시오.”
언젠가 수도형제에게 배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요즘 강론 주제로 우리 믿는 이들은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중에 있다고 많이 강조했습니다. “성화의 여정”, 얼마나 긍정적이요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마디인지요.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성화라는 말마디가 반가웠고 즉시 강론 제목을 성화의 여정으로 택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참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은 불법의 종이 아니라 의로움의 종이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이라는 복된 신원임이 드러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화의 여정 결과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성화의 여정을 충실히 살고 있는 분들을 대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2023년도 분도 계간지 가을호, “훈훈한 대담”에 소개된 서경윤 알벨토 원로사제 역시 성화의 여정중의 모범이며 그분의 인터뷰 마지막 대목입니다.
“나도 마지막에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갖게 된 것도 은총입니다.”
삶은 모두가 은총이란 자각에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도 샘솟습니다. 신부님의 고정 칼럼 “노수老樹단상”이란 제목도 산뜻했습니다. 기품있는 노년을 상징하는 노목老木같은 어른이 바로 노수老樹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름드리 노송老松이나 노목老木은 제 삶의 스승입니다. 어느 절이나 수도원에 가든 맨 먼저 살펴보는 것이 두 보물인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 1면에 소개된 제16차 주교 시노드 회의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 “교회는 누구나에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라는 제하의 마지막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시다.”
성화의 여정의 궁극 희망이자 목표가 예수님이요 새삼 성화의 여정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얼마전부터 아침식사후 수도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수도원 하늘길을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또한 저에겐 깨어 있음의 기도와 훈련입니다. 메타세콰이어 거목巨木을 바라볼 때마다 내적성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2009년 심을 때는 작은 나무였는데 14년이 지나니 거목이 되었습니다. 성화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의 내적성장도 이 가로수들처럼 계속 성장 중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육신은 노쇠해도 성화의 여정 중에 있는 영혼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고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제 마음은 26년 전 써놨던 “사랑”이란 시의 마음 그대로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예수님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바로 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의 충격적 말씀이 회개와 더불어 우리의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 봅니다.
1.“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 성령의 불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불붙여 주시어 새롭게 타오르게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주님의 불이 되어, 사랑의 불이 되어 타올라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불, 사랑의 불이 되어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어둠을 밝히며 주님의 영원한 현역으로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2.“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죽음의 세례입니다. 물론 부활로 이뤄지는 죽음의 세례이지만 주님은 늘 죽음을 예견하며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파스카의 삶을 사셨음을 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가 우리 역시 날마다 이런 종말론적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성 베네딕도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이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3.“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은 결코 거짓 평화를, 값싼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주심으로 거짓 평화를 폭로 하십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요, 빛이요, 선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임재 자체가 분열입니다.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이요 결코 악의적, 고의적, 파괴적 분열이 아닙니다.
참평화 앞에 거짓 평화는 탄로되고, 빛앞에 어둠이, 선앞에 악이, 진리앞에 거짓이, 생명앞에 죽음이, 희망 앞에 절망이 폭로되니 저절로 분열입니다. 잠정적 일시적 분열로 참평화와 빛, 선과 진리, 생명과 희망의 일치에 이르는 과정상의 분열일 뿐이요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뎌내야 합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이런 한결같은 지혜와 주님향한 신망애 덕을 지니게 합니다. 참평화는 지난한 창조적 분열후의 열매들로 결코 값싼 평화가, 거짓 평화가 아닌 겁니다. 우리는 파괴적 분열이 아닌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로 성화의 여정도 날로 깊어져 주님을 더욱 닮아가게 됩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의 회개 은총이 우리 모두의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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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49.51)
<불과 분열의 의미!>
오늘 복음(루카12,49-53)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불을 지르러 왔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어제 복음은 자비가 아니라 매를 드시는 주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고, 오늘 복음은 불과 분열을 주러오신 주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례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앙의 본질 안에서 바라보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이 나라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우리의 신원 안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을 지르러 왔다.'의 의미가 '성령의 불'과 '성령의 충만함인 하느님의 나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또한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의미가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많은 것들이 정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가정의 분열'을 언급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결정적으로 말해주고 있듯이, '부활의 대전제인 죽음'의 의미로, '내가 죽어야, 서로 서로가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바라보면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화와 하나됨(일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 은총의 선물이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하는 십자가', '예수님처럼 내가 죽어야 하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 안에, 나의 가정과 나의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부활이 함께 하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요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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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MPtH-TCr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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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타오르고
번져가는
단풍의 불길이다.
자연의 순리에서
너무나
뜨뜻미지근한
우리들 삶을
반성한다.
깊어져야 할
우리들
신앙이다
하느님의
뜨거운
탄생이
죄많은
우리들을
다시 비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삶을 태워서
복음이 되셨다.
꺼지지 않을
사랑이시다.
잊어버린
삶의 의미를
환하게
보여주신다.
복음이 되면
모든 것은
뜨거운
사랑이다.
복음의 불로
마음이 갈라진
우리를 뜨겁게
타오르게 하신다.
세상에 불을
지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과
거짓, 욕심
교만을
태우십니다.
타오른
그 불은
우리 마음을
향합니다.
죽어야 사는
역설의 불이다.
복음의 삶은
뜨겁게
나아가는
마음의 길이다.
타올라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이 마음이
타오르길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뜨거운 마음이
뜨거운
신앙이다.
뜨거운 신앙은
세상에 불을
지르신
예수님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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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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