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맑은 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누군가를 창 밖에 세워둔 채 혼자 차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아슬아슬한 그리움을 훈기와 함께 들이마시면서 보는 세상은 차마 내 품안에 들어오지 못해 흘리는 눈물로 온통 얼룩져 있다. 창문에 붙은 물기를 손으로 훑어보면 짠 내가 담긴 빗물은 스며들지 못하고 차마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냉담한 연인처럼 가볍게 손을 털며 문을 닫고는 그 비참함을 즐기는 못된 심리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여하튼 창 밖에 장마를 세워두고는 내내 딴청이다.
...흐린 하늘을 볼 때마다 햇빛 가득했던 나날이 거짓말 같다. 푸르러 잡티 없는 하늘을 볼 때 역시 반대편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 증거가 손에 쥐어져 있고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부르짖는다면 피할 수 없이 인정 해아겠지. 머리는 말하는데 손은 부정한다. 손에 든 것이 몇 장의 사진 뿐 - 누가 찍었는지 알게 무어랴? 어쨌든 그것들은 오렌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햇님 같은 오렌지... 의심이 간다. 비 때문이다.
주차장에 서서 한참을 갸웃거렸다. 서둘러 부산하게 뛰어내려왔으니 차림새는 분명 엉망일 것이고 일단 그 넓은 데서 어떻게 찾나, 싶어 암담함 때문에 전화를 넣었다. 한 쪽으로 식당과 가게가 있었고 그 어디쯤 오라고 말했더니 그 쪽으로 오신단다. 키가 좀 크고 굵게 웨이브 진 여자 한 분이 수화기에 대고 뭐라고 하는 거 같아 기울였더니 입 모양이 내 쪽에서 들리는 것과 일치한다. 그제서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눈을 감고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그 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사진 한 장 뿐인 그녀, 다정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품고 처음 보는 어린 연배의 사람에게도 끝까지 친절했으며 역시나 청춘이라 입고 있던 옷만큼이나 푸르렀던. 울산에 가서 장비를 가지고 서둘러 왔다며 연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데 에이, 혼자서 잘 놀았어요... 하고 웃어주었다. 만나기로 한 또 다른 분은? 하고 찾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서 포기해야겠다니까 얼굴이 더 흐려지고 말았다. 그럴 것 없었는데. 애초에 올 때는 아무도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그리고 말이 혼자였지 실제로 너무도 많은 이들에게 도움 받아가면서 함께 도착했는데.
햇빛이 정통으로 내려쬐는 벌판에 서 있다가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 날 먹은 것은 고작 물 한 병 정도? 다비따시옹 님을 만나는 김에 맛난 것을 먹고 싶어졌다. 낮에 길 안내 해 준 아주머니 생각에 '오리고기' 를 추천했더니만 그 새 울산에서 그 쪽 직원들과 중국요리, 일명 짱께로 거히 회식하셨단다. 우째 이런 일이... 싶었지만 일단 그 곳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 새벽에 두텁게 발라두었던 썬크림을 믿어볼 밖에. 차안도 처음에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생각보다는 서 있는 시간이 짧았었다.
상당히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아 부산 외곽 쪽으로 빠져나갔다. 풍경은 갈수록 근사해져갔다. 푸른 숲과 간간히 비치는 바다가 아닌 호수들, 계곡... 아마 초봄에 여릿하게 새싹이 올라와 갓 피어오를 때나 단풍 들었을 때 - 워낙 남쪽이라 눈 내렸을 때가 상상이 안 간다 - 에는 아마 장관이겠지. 보름도 지난 나, 잠시 손을 놓고 그 곳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면서 잠시 뜸을 들인다. 심심해서 틀어놓은 라보엠의 선율에 귀를 맡겨놓고... 감은 눈 너머 보이는 영상... 로돌포가 미미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미미 역시 그렇게 한다. 나 역시 다비님께, 다비님 역시 나에게... 낯선 신비로운 선율 담긴 목소리와 서로를 더듬어 나가는 예민한 더듬이로.
...아아, 선동 수원지였구나. 당신의 이름...
얼마나 굽이굽이 흘러갔을까. 눈웃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건넨다. 이 근방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아 사람은 많지 않아도 풍광은 좋아요... 오리고기 집도 몇 군데 있는데. 아, 예전에 제가 잘 가는 단골이 있었는데... 아는 분이 하는 곳이었거든요? 그림 그리시던 분이었는데... 그만 두셨다던가?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네... 하며 몇 군데 요리집 외에는 한적한 골목에 차를 대었다. 필요 없을 것 같은 짐은 다 두고 쭐레쭐레 따라갔다. 넓게 트이면서 온 주변이 환히 들어오는 곳은 사람이 좀 북적였다. 망설이다가 조금 더 가서 한적한 방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들어섰을 때 주인 아주머니께서 거칠지 않은 싹싹한 어투로 반겼다. 어디를 찾으시는지, 어떤 메뉴를 원하는지 이것저것 살피는 폼에 그 날 얼마나 잘 먹을지 예상했다. 다비따시옹 님께서도 처음 온 사람이므로 잘 해주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아무래도 우리가 차지한 방이 그 집 안방인 거 같았다. 작은 창문 바깥의 나무들도 그랬고 깔끔하면서도 적당히 낡은 방과 옛날 집 같은 구조 - 댓돌과 대청마루, 또 요즘은 흔치 않은 붉은 글씨의 대들보에 붙은 부적... 80년대 이후로는 본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는 오렌지였다. 바다에서 물고기가 아닌 과일을 건졌다는 이야기에 다비님도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떤 경로로 돌아서 배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고 노포동까지 올라왔는지 듣고는 탄성과 미안함을 보이셨다. 처음부터 함께 하시고 싶으셨다나? 그러시고는 댁이 바다 쪽이니 저녁 때 다시 한 번 광안대교로 데려다 주시겠단다. 어머나 고마워라... 냉큼 고맙다고 받아버렸는데.
좀 민망한 말이지만 다비따시옹 님의 진짜 이름도 그 곳에서 알았다. 물론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되는 이들에게 본명이 무어냐 기타 등등 호구조사 한 적이 거의 없다. 그 사람이 그 닉을 쓰게 되면 그만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사람에게 맞기 때문 아닐까 하고 의문을 말아버리기 때문이다. 헛, 이럴 수가. 나와 먼 종친이라니... 평해 황씨... 살다가 종씨 만나기는 간만이라 귀가 쫑긋, 섰다. 그 뒤로 다비님, 보다는 세홍언니... 쪽으로 기운다. 아직 허락받지는 못했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물론 다비따시옹 님이지만.
다비따시옹... 건축에서 유래된 닉이었다. 르 코르뷔지에... 앞으로도 종종 님께서 언급하셨지만 근대 건축가 중에서 좋아하는 양식이셨다. <유니떼 다비따시옹> 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단다. 인체 측정학적 비례... 르 모듈라의 구체화 된 표현이었던가? 이름만 들어봤지 잘은 모르는 쪽이었지만 열심히 들었다. 기껏 알마 말러 때문에, 그리고 바흐하우스에서 나오니까 알게 된 발터 그로피우스 이름 하나 주워 섬겨왔던 내가 어쩌겠는가? 건설 현장에 계시는 분이라 대충 기초 이론서만 감 잡아 읽었던 아마추어와는 격이 다르다.
살아온 이야기나 회사 이야기 - 특히 현장이야기는 생생했다 - , 그러다가 번진 건축화제라 한참 문답이 오가는 새에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온 반찬과 오리불고기에 살짝 넋이 나갔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은 아주머니께 감사하며 이왕 이렇게 된 거 또 하나의 파계를 감행했다. 기세도 좋게 아주머니! 하고 부른 후 술을 시켜버렸다. 차를 가져오신 다비님, 아니 세홍언니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제가 (아주 많이) 거들어 드린다니까 살짝 안심. 우리가 시킨 술이 없어서 매취순? 매화수? 였던가? 대신에 여하튼 영남 쪽에서만 난다는 매실주로 주종을 살짝 틀었다.
반주 삼아 꼭 한 병을 둘이 나누어 마시고 구워지는 대로 기름지고 쫄깃한 오리를 쌈과 각종 야채에 섞어서 꼭꼭 씹어 먹었다. 세홍언니는 한창 재미있다가 갑자기 회사로 사장님이 납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상당히 긴장했던 듯. 식사가 어디로 넘어가는지... 그러다가 현장에서 일이 마무리되고 다들 퇴근한다는 연락이 오고서야 한시름 놓으셨단다. 참, 현충일인데도 어림도 없다면서 투덜거려드렸더니 최근에 정신이 없었다가 그나마 공사가 마무리되어서 좀 낫다신다.
둘이 앉았는데 혼자만 맛나게 먹은 거 같아 되게 죄송스러웠다. 슬쩍 화장실 가러 일어났다가 주인 아주머니께 미리 셈을 치러두었다. 반찬들도 간만에 싱그러운 야채들이라 배 두들기면서 먹었다. 좀 맵고 강할 줄 알았더니만 맛은 담백했다. 씁쓸한 즙이 가득 배어나오는 쌈 허리를 뚝뚝 끊어서 장 찍어서 아사삭거리면서 음미했다. 이만하면 점수는 후했다. 무엇보다 새벽부터의 허기가 메워지면서 무언가가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오렌지가 바닷물 묻은 그대로 한 가운데 들어앉았다.
...물고기와 작은 나무들... 그리고 몇 개의 직소퍼즐조각. 여전히 컴컴한 곳 짠 물 속에서 갈피 없이 헤매는 유령선.
계산을 치르려는 다비님 끌어내느라 애를 썼는데 눈치 없는 아주머니의 한 마디 때문에 더 민망했다. 식사 후에 나오면서 근방을 좀 더 산책했다. 이 곳 저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알려주시는데 나중에 다시 한 번 가야 할 거 같다. 풍광 좋은 호수에서는 웬 신랑 신부가 결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길게 나 있는 길 한 가운데 서서 그들을 보고 웃어주고 간만에 마음 맞는 사람들처럼 매달려 좀 돌아다니다가 다시 차로 돌아왔다. 이제는 저녁으로 넘어가니까 다시 터미널에 가는 건가... 천만에. 그것이 또 다른 시작이다.
첫댓글 이제 어디까정 왔나? 아마 카페 역사상 최고로 긴 연재글이 될 듯한 공포(?)의 분위기...끝까지 지켜봐야지.ㅋㄷㅋㄷ 글구 글루미 썬데이 너무 많이 듣지 마세요. 자살병이 전염될까 심히 걱정되어서..
아직도 멀었음! 인제 부산에서의 반나절이 흘러서 저녁 때로 향하고 있음... 에휴우... 쓰다보니 저도 수습이 안됩니다. 여기서 물리자니 베슈타인님의 도끼눈이 두렵고(재워주는 대신에 쓴다고 했으므로...). 쩝~ ㅠ,.ㅠ 오늘은 가족사진을 찍고와서 넉다운... 졸려엽! 미래드림. 그루미 썬데이? 팍팍 들어야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