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권 놓고 쪼개진 美, 시위-충돌 확산… 30개주 낙태 금지할듯
[美 낙태권 폐지 판결]
텍사스 등 공화당 성향 주 즉각 환영, 뉴욕 등 민주당 주지사 주는 반발
곳곳서 예정됐던 낙태수술 취소, 낙태 찬성 시위대에 트럭 돌진도
美국토안보부, 테러 가능성 경고… 바이든 “美를 150년전으로 돌려놔”
11월 중간선거 핵심 쟁점 삼기로… 트럼프는 “신이 내린 결정” 반겨
25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서 ‘낙태를 끝내라’고 적힌 포스터와 확성기를 든 낙태 반대론자 여성(앞줄 왼쪽)과 낙태할 권리를 지지하는 여성(앞줄 오른쪽)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전날 연방대법원이 임신 24주 이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고 50개 주 정부에 낙태권 존폐 결정을 맡기자 미 전역이 찬반 논쟁으로 분열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워싱턴=AP 뉴시스
“미국은 대법관들의 나라가 아니다.”
25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서 낙태권 폐지 반대 시위를 벌이던 13세 소녀 애니 씨는 기자에게 “우리가 어른이 된 세상은 지금보다 어두운 곳이 될 것”이라며 대법원의 전날 낙태권 폐지 결정을 분명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서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왔다는 캐시 씨도 “워싱턴주는 주법으로 낙태권을 허용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여서 시위에 나왔다”고 했다.
24일 미 연방대법원이 1973년부터 49년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해 50개 주정부가 독자적으로 낙태권 존폐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자 미국이 사실상 두 동강 났다. 텍사스, 루이지애나주 등 야당 공화당 지지층이 많은 보수 성향 주는 환영했다. 뉴욕, 캘리포니아주 등 집권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있는 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날부터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미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대법원의 결정을 둘러싼 격렬한 찬반 시위가 벌어지고 양측의 충돌이 확산되자 미 국토안보부는 테러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번 사안을 11월 중간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규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낙태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미 사회를 분열시키는 현안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판결이 미 문화 전쟁(culture-war)의 불길에 휘발유를 끼얹었다’는 칼럼을 실었다.
○ 미 곳곳 병원에서 낙태 수술 취소
이날 북서부 아이오와주에서는 낙태 반대론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는 트럭이 낙태 찬성 시위대에 돌진해 여성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낙태권 찬성론자들은 판례 폐지에 찬성한 클래런스 토머스, 브렛 캐버노 등 보수 성향 대법관의 자택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대법원의 판결 직후 미주리, 아칸소, 오클라호마주 등 9개 주가 즉각 주법으로 낙태를 금했다. 텍사스, 애리조나주 등 12개 주는 곧 금지 조치를 도입할 예정이고 인디애나, 노스캐롤라이나주 등 9개 주 역시 금지 조치를 도입할 가능성이 있어 미 50개 주 중 30개 주에서 사실상 낙태가 사라질 가능성이 생겼다.
곳곳에서 예정됐던 낙태 수술도 속속 취소됐다. 아칸소의 한 병원에서는 24일에만 여성 17명의 임신 중절 일정이 취소됐다. 남동부 앨라배마주의 한 병원에서는 중절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에 환자 대기실이 눈물바다가 됐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미 시민단체 ‘플랜드페어런트후드’는 3600만 명의 가임기 여성이 낙태권을 박탈당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재임 중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등 3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했다.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 법관으로 채워지면서 현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일찌감치 나왔다. 실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3명 모두 판례 폐기에 찬성했다.
○ 美 여야-행정부 대 사법부 갈등 확산
이번 판결은 민주당 대 공화당, 행정부 대 사법부의 갈등으로 번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24일 긴급 대국민 연설에서 “대법원이 미국을 150년 전으로 돌려놨다”며 낙태가 불법이던 1800년대나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졌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중간선거에서 낙태권에 찬성하는 후보를 뽑아 의회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역시 “여성과 미국인의 권리가 11월 투표용지에 놓여 있다”고 가세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또한 소속 부처 직원들의 낙태권을 보장하겠다며 사법부를 비판했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신이 내린 결정”이라고 환영했다. 테이트 리브스 미시시피 주지사(공화당) 역시 “더 많은 생명, 유모차, 행복한 삶이 생길 것”이라고 가세했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판결. 남부 텍사스주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제인 로(Jane Roe)’라는 가명으로 소송을 냈고 지방검사 ‘헨리 웨이드(Henry Wade)’가 사건을 맡아 이 이름이 붙었다. 당시 낙태 가능 시점을 임신 3개월 이내로 규정했지만 1992년 판례를 통해 현재의 임신 24주로 늘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이채완 기자
英-佛-加 정상 “인권침해” vs 교황청 “환영”
[美 낙태권 폐지 판결]
‘美 낙태권 폐지 판결’ 글로벌 논쟁
미국 연방대법원이 24일(현지 시간) 임신 24주 이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례를 뒤집은 뒤 국제사회에서 찬반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정상들이 낙태 금지는 인권 침해라며 비판한 반면 바티칸 교황청은 “생명 보호가 개인 권리에 국한될 수 없다”며 환영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이번 판결은) 거대한 후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5일 트위터에 “낙태는 여성의 기본 권리로서 반드시 보호 받아야 한다. 미 대법원에 의해 자유를 억압받은 여성들에게 연대감을 전한다”고 올렸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어떤 정부나 정치인, 남성도 여성에게 임신을 강요할 수 없다. 여성이 느낄 두려움과 분노를 감히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도 성명을 내고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을 내릴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속상했다. 뉴질랜드는 최근 낙태를 범죄가 아니라고 보고 형사사건이 아닌 보건 문제로 취급하는 입법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낙태를 죄악시하는 가톨릭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큰 나라가 이 문제(낙태)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는 것은 전 세계에도 과제를 남긴 것”이라면서 “인간 생명 보호는 개인 권리에 국한된 채로 남아있을 문제가 아니다”라며 판결을 반겼다.
미국에서는 대법원이 낙태권 폐지 판결에 이어 피임 권리나 소수자 권리 폐지를 판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에 찬성한 보수 성향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동성(同性)결혼, 피임할 권리 등과 연관된 다른 판례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권 제한은 적절한 법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한 수정헌법 14조가 낙태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번 판결 근거를 피임권을 보장한 ‘1965년 그리스월드 판결’과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2015년 오버거펠 판결’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NYT는 “다른 권리들까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신아형 기자
韓,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후 대체입법 없어 혼란
[美 낙태권 폐지 판결]
2021년 낙태 처벌 법적근거 사라지고
정부 제출 개정안은 국회서 합의안돼
국힘 “조건부 허용” 민주 “전면 허용”
국내에선 지난해부터 낙태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사라졌고 낙태를 어디까지 허용할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는 상태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재는 2019년 4월 재판관 7 대 2 의견으로 형법 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기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2020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관련 조항은) 계속 적용된다”며 정부와 국회에 관련법 개정을 함께 주문했다.
이후 법무부는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임신부의 결정에 맡기고 이후 24주까지는 질환, 성범죄, 사회경제적 사유 등이 있을 때 조건부로 허용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2020년 10월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의힘은 임신 10주 이내에 아무 조건 없이 임신 중절을 허용하고, 임신 20주 이내엔 태아와 여성의 생명 또는 건강에 위험이 되는 경우 조건부로 허용하는 안을 내놨다. 반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원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각자 법안만 발의했을 뿐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한 국회 내 논의는 사실상 멈춘 상태다. 헌재가 정한 시간이 지나 2021년 초부터 낙태죄로 처벌할 근거가 사라졌지만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현장의 혼란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쟁점이 많은 법안이라 처리가 미뤄진 것으로 안다”며 “후반기 원 구성 후 해당 상임위에 본격 논의를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권오혁 기자, 김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