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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에콜쥬르 #.프롤로그
꿈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기도 하고, 사람을 절망하게 하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진 꿈. 누군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열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이룰 수 없는 그야말로 꿈이 되기도 한다. 여기, 이 소녀를 보라.
작은 몸으로는 도저히 다 품을 수 없으리만큼, 주체할 수 없는 꿈에 대한 크나큰 열정을 지닌 이 소녀를.
그리고 이 소녀의 전부가 되어버릴 한 소년을.
#.1
그 때 란은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란은 혼자 어딘가 정처없이 쏘다니는 것을 즐기는 이였다. 누군가와 소란스럽게
갖은 치장을 다 하고선 같은 레파토리의 유흥을 즐기는 것보다는, 집에서 갓 나온 듯 편안한 차림으로 주위 시선은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마음따라 좇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그 날도 따분한 마음과 넘치는 시간을 달래려 집에서 뒹굴던 차림
그대로 밖으로 나온 그녀였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겠지만 분명 평범하지만은 않은 열 네살의 소녀 유란.
그 날이 란의 인생 자체를 송두리 째 흔드는 날이리라는 것을 그녀는 아마 예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어쩜 저렇게들 화려한 차림일까.
란은 뭔지 알 수 없을 우월감에 젖은 길거리의 여자들을 여유로운 시선으로 훑으며 내심 생각했다. 뉴스에서 곧잘 흘러나오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경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저 차림새들을 보고서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부럽다.˝ 조금 아이러니한 발상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정신이 나갔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은 분명 이 생각일테니 말이다. 자신도 어리지만 여자였고, 저렇게 공작새처럼 꾸며보고픈 생각이
한번 쯤 들어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곧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춘기 아이처럼 생각한 것이었다.
정신이 나간 여자들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아마 질투심에서 나오는 것일 거라 제 자신도 가볍게 넘기며 다시 시선을 달리했다. 경제 상황이 위급한 우리나라를 원조하려 지금 막 도착한 외국 간부들이
제발 이 거리만은 돌아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다리 쑤셔.˝
명동. 그곳은 명동이었다. 한참을 둘러보고나서 두어 시간이 흐른 후 또 다시 둘러보면 경치가 달라져있다는 그 변화무쌍한 시내 번화중심가.
장장 세 시간을 돌아다닌 덕에 다리 이쪽 저쪽이 쑤시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란은 화려한 네온 사인 불빛을 번쩍이는 대형 백화점 앞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연신 종아리를 주물러 댔다. 배가 고프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것이다. 란은 길거리에서 무엇을 사먹는 것은 그닥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정정하자면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다. 돈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랴. 단지 돈이 없을 뿐이었다. 혹시 동전 몇 푼이라도
나올까 봐 란은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역시. 돈은 없다. 차비만 있을 뿐.
친구들은 이런 자신을 보고 항상 그렇게들 말했었다. 혼자서 그렇게 다니면 창피하지 않느냐고. 그럴 때마다 란은 비웃음 비스무리한 것을 지어보이며
말하곤 했었다. ˝아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왜 혼자 다니는 것이 창피할까?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거리, 사람들, 공기, 바람, 하늘까지 모두 다 있는 걸.
자신이 밖을 나온 그 날만큼은 모든 것이 순조로이 협조했다. 란에게는 전부가 친구였다. 옆에서 종알종알 쉴새없이 남자 이야기나 꺼내는 인간 친구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문자가 14통이 와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 채현과 남자친구 하울에게서 온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망설임없이
플립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자신에게 문자까지 다 보내주는 친구들이 막연히 감사하기만 했다. 그 때였다.
˝자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 백화점 세븐틴을 위해 이렇게 모여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바입니다. 음음……˝
무엇일까. 급작스레 소란스러워진 명동의 거리였다. 원체 시끄럽기도 한 거리였지만 일순간 자신이 앉아있던 백화점 무대 쪽으로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뒷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굉장히 시끄럽다. 마이크 소리인지,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분명 음향 시설이 내는 기계음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느새 반쯤 몸이 틀어진 채 무대 쪽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였다. 또 한번 지지직 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진 뒤에서야 밝은 목소리와는
달리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마이크를 잡고 있는 한 남자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네. 오늘은 게릴라 콘서트입니다. 그동안 고객 여러분들께서 세븐틴 문화포털센터에 보내주신 많은 성원과 힘에 보답드리고자하는 취지에서,
저희 쪽 사무실에서 키워내고 있는 인재들의 쇼케이스를 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와아아! 와! 꺄악!!!!˝
사람들의 함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쇼케이스라고 말했다. 란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미 그 남자가 무어라 말하고 있는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긴 채였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니 언뜻 봐도 몇 백명은 넘어보일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어쩐지 귀가 찢어질 것만 같다더니. 아마도 쇼케이스라는 말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란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들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은 분명 있는 일이니까.
분위기에 휩쓸려서인지 그녀도 마이크를 든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를 기대하는 듯 했다. 오늘 명동을 나오고 싶었던 것이 이런 즐거운 일이 있어서 였을까. 안 나왔으면 분명
후회했을 거라고 마음 속으로 뇌까리며 다시 무대로 시선을 고정하는 란.
˝먼저 첫번째 팀을 소개합니다. 섹시한 여자 댄스 그룹이기보다, 꿈과 열정을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그룹이 되겠다고 합니다. 샤블로!!˝
˝꺅!!!!!!! 와아!!!!˝
무대에 스포티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캐주얼을 입은 세 명의 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예쁘진 않지만, 어쩐지 모르게 행복 해 보이는 얼굴을 한 소녀들이었다.
자신과 동갑일까. 그래봤자 한 두살 많을까. 나이는 그래보였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직은 한참 앳된 얼굴을 하고선 포부 넘치는 인삿말과 함께 저렇게나 큰 무대에
나비처럼 날아든 세 사람이다. 란은 제가 무대에 있는 듯, 심장이 정신없이 뛰어옴과 의미를 모를 긴장감을 느끼며 그 셋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함성은 못내
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는 란이었다. 곧이어 몇 초 간의 정적을 깨고 익숙한 팝 음악이 무대 위를 가득 메워오기 시작했다. 떨지 않는다. 필시 잠시
란과 마주친 세 사람들의 얼굴은 그러하였다. 그저 열정으로 한껏 달아있을 뿐이었다.
˝와아! 저 사람들, 진짜 멋있다. 자기야.˝
˝그러게.˝
˝춤을 진짜 잘 추네. 무엇보다 하나도 안 떨어…….˝
옆의 커플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처음보는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듯한 여자의 말에 남자도 역시 상기된 음성으로 대답했다. 란 역시 동감하는 듯 싶었다.
˝훈련을 잘 받았나 봐.˝
˝떨지 않는 훈련?˝
˝응. 요즘 애들은 그런 것도 받는다나 봐.˝
아니요. 그건 틀려요. 란은 마음 속으로 뱉어낼 수 없는 말을 되뇌였다. 훈련도 무엇도 아니다. 저것은 무대를 즐기는 것이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확신하는 그녀였다.
훈련 따위로 저런 표정과 저런 몸짓을 보여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저런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줄 수는 없다. 분명 저 사람들은 자신을 믿는 것이다.
무의식 중 란은 무대 위 저들이 너무나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든 생각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사람들은 아주 큰 가수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한 시도 눈을 떼어낼 수가 없는 저 무대…….
회의가 들었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한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든 것이다. 물론 란은 아직 학생이었다. 그치만, 그치만 저 들이 저렇게까지 노력하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막연히 들어왔다. 저 들은 그동안 피 땀 흘리는 노력 끝에 저 무대에 섰을 것이고, 지금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퇴장할 것이고, 무대 뒤에서 서로를 다독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낼 것이다. 나도 그런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생각하는 란이었다. 란은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저 무대에 올라가고 싶다. 꿈은 없었다.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가난한 집을 구하고, 지금껏 자신만 바라보며
열심히 일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신 홀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생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분명 호강은 시켜드릴 것이며 집도 구할 것이지만 방법은 다르다.
공부가 아니다. 이제 막 꿈이 생기려 하는 그녀였다. 맙소사. 이렇게 짧은 순간에 이런 식으로 결정 짓고 말아버리다니.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막 무대가 끝이 났다. 란은 그제서야 손뼉이 부서지도록 박수를 치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호를 보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런 기분은 정말 맹세코 처음인 그녀였다. 마치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것만 같은 표현할 수 없는 이 기분. 세상은 살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러분!! 이것이 다 끝이 아닙니다!! 무대에 스고 싶으신 관객 여러분들, 상품을 타고 싶으신 관객 여러분들, 모두 모두 지금 무대 앞으로 나와주세요!
댄스 타임입니다. 연기도 좋고, 노래도 좋습니다. 빨리 빨리 나와 주세요!˝
˝……˝
˝어머 어머, 언니 나 나갈까?˝
˝그래 기집애야 너 나가! 왠일이야. 너 꿈이 연기자잖아.˝
숨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정확히 머리 한 가운데에 정통으로 총이 뚫고 지나가, 뇌의 신경회로가 모두 멈춰버린 것처럼. 격한 감정을 느끼고 만 것이었다.
짧은 순간에 말이다. 란은 불규칙한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몸은 말하고 있었다. ˝어서 나가. 어서.˝ 라고.
기회일까.
실수해도 좋을까.
옆의 두 여자아이도 나갔다. 벌써 스무명 정도가 무대 위로 걸음을 하고 있다. 늦으면 영영 이런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그래, 나를 한번 실험해 보는거야.
란은 어쩔 줄 몰라하는 오장육부를 다스리지 못한 채 결국 떨리는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갔다. 딱딱한 시멘트 무대 바닥을 밟는 순간, 그 순간. 숨조차 넘어가질
않았다. 그리고 떠올랐다. 며칠 전 수학여행에서의 자신의 노래. 이번 무대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많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수학 여행 때의 무대에선 이런 식으로
꿈을 확정짓고 목숨처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랬기에 너무나도 쉬웠다. 떨림도 없었고, 그냥 동네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는 것같은 기분 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때 애들은 엄청난 환호와 함께 내게 칭찬을 했었다. 너한테 이런 엄청난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과연 그럴까. 지금도 그럴까. 심장이 덜덜 떨렸다.
눈 앞에 비춰오는 네온 사인의 불빛이 두 갈레, 세 갈레 번지기만 했다.
도저히 상황을 분간할 수 없는 순간에서도 란은 힘겨이 사람들의 수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자신까지 합하여 모두 스물 두명.
그러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일곱 번째였다. 앞에서부터 순번을 나눠주는 아르바이트 생이 번호표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일곱 번 째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었다. 망연자실했다. 너무나 빠른 순번. 그에 비해 눈 앞의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어째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나버린 엄청난 인파. 곧 심장 마비로 돌아가실 것만
같은 그녀였다. 하지만 심장마비 따위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란 현실을 잘 알기에 더 망연자실한 것이었다.
˝일곱 번 째 입니다. 건투를 빌어요.˝
아까 그…… 아까 그 여자 중 하나였다. 열정적인 춤과 미소로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미래에 가선 어쩌면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사람.
여자는 밝게 웃으며 란에게 일곱번 째 번호표를 주고선 다음 순번으로 걸음을 조금 급하게 옮겼다. 란은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번호표를 만지작거렸다. 이젠 더 이상 떨리지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숙연해오기까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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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남자의 무대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의 무대의 주인공들은 모두 다 형편없는 실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 째 여자는 눈물 연기랍시고 어줍잖은 대사를 읊었지만, 눈물이 흐르지 않아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번 째와 네번 째는 모두 다 여자였지만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어 별 다른 호응은 없었다. 다섯 번 째는 처음은 좀 멋있다 싶을만큼 훌륭한 춤을 선보였지만, 무대 중간 부분에 깊이 파인 곳에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여섯 번째 남자는…… 개그를 하고 있다. 앞에 사람들이 못하면 좋을 줄만 알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감만
더욱 배가 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앞의 사람들과 똑같은 취급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기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녀는 그랬다. 이제는 떨기보다 이를 악물고
노래 가사를 떠올리기에 바쁠 정도였으니 말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면 두번 째가 빠졌을 테니까. 두번 째 남자는 강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란이었다.
한 열 아홉 즈음 되었을까. 일반인이라기엔 너무나 준수한 얼굴로 노래를 연습하던 란을 놀래키더니만은, 결국 관객들마저 놀래키고 만 것이었다. 란의 옆에 있던 여자는
초대 가수인지 알 정도니 말은 다 하지 않았는가. 작은 얼굴에. 커다란 키. 호리호리한 몸매에, 하얀 피부를 가진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게다가 노래 실력은 더욱 더 엄청난 것이 아닌가.
…란이 이렇게 열심히 노래에 열중하는 것도 어쩌면 저 남자에 대한 오기일지도 모른다.
˝일곱번 째 나와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사회자의 말에 잠시 굳어버렸던 란은 이내 가슴께를 세게 압박하며 거친 숨을 몰아내쉬었다. 무대 정 가운데로 향하는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것이 열정을 지닌 자와 아닌 자의 차이일까. 그 생각을 하자 급작 멍해있던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듯 제 정신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금니를 꽉 악물고선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눈 앞엔 엄청난 인파가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란은 그 눈길 하나 하나를 다 받아치며 마이크를 손에 가득 쥐었다. 동요하던 심장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란은 그 순간 자신이 커다란 무대에 서 있는 톱스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 열정이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유란. 할 수 있다. 속으로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이던
그녀가 짧은 한숨을 시작으로 떨리는 얼굴을 하고선 관중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나지막히 말했다.
˝아. 아. 안녕하세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듯한 사회자가, 잠시 머뭇이다가 란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한 것인지 자리에 가만히 서 행동을 멈추었다.
관중은 웅성이던 목소리를 뚝 그치며 작은 몸을 한 무대 위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는 인천에서 온 유란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열 네살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노래를 할 겁니다. 잘 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부터 제 꿈이 될
가수라는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 먼저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근데… 많이 떨리네요. 실수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하.˝
˝아이가 솔직하네.˝
˝열 네살이래.˝
당돌하면서도 무언가 수줍은 란의 말에 관중들은 일제히 작은 미소와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몇 마디를 틔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모자를 눈 바로 위까지 푹 눌러쓰고선 팔짱을 낀 채 기둥에 몸을 기누운 두 번 째로 노래를 부른 남자. 정윤성. 란은 아직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었다. 말은 당돌해도 몸이 떨려오는 것에 신경을 치우치느라 주변의 관심 따위는 신경 쓸 겨를 조차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음악이 틀어졌다. 노래는 헤어진 후에, 라는 곡이었다. 란은 마이크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눈을 꼭 감았다. 노래 소리가 귀에 더 잘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슴이 고요해진다.
˝…왜 그런 사랑을 해야만 했었는지 용납할 수 없었던 내가 그 날 너를 봤던 거야. 숨이 막힐만큼 아름다운 너의 그녀와 행복한 너를 말이지. ……˝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란의 혼신의 노래와 풍부한 음색에 빨려들어가듯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였다.
윤성은 흥미롭다는 듯이 검은 눈을 빛내며 란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조금 작다 싶은 키와 갸냘픈 몸매. 갈색 머리칼이 허리까지 치렁치렁한 아직은 덜 자란
듯한 작은 체구의 란의 모습을 윤성은 자신의 두 눈에 남김없이 담아내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재밌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심장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눈물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고 나는 너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곧 그 모습에 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토 해 냈다고 나는 너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있었을까.
아니… 아니… 아니…… 난 너에게 행복만을 빌었던 거야… 모든 걸 묻어버린 채, 행복만을 빌었던 거야. 마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도 울지 않을 것처럼…
그냥 그렇게 행복만을 빌었던 거야… 사랑을 용납할 수 없었던 내가 그 날 널 본 이유가 그것이었다면 그게 맞을지도 몰라…˝
가사가 심금을 울렸다면, 란의 목소리는 심장을 울렸으리라. 사람들은 그야말로 정신을 모두 놓아버린 채 그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열 네살 어린 소녀에게서 절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와 애달픈 호소력.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윤성은 노래를 모두 끝 마치며 간주가 흐르는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는 란을 한 시도 눈에서 떼지 않은 채 직시하고 있었다. 노래를 원래 부른 가수보다 란의 목소리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꺄악!!!!!!!!!!!!! 와아아!!!!!!!˝
˝엄청 나!!!! 정말 대단해!!!!!!!!!!!!!!!!!˝
˝앵콜! 앵콜! 앵콜!˝
˝최고다!˝
족히 느낌표 백만개는 붙여야할만큼 어느 때보다 커다란 함성으로 노래의 끝을 환호하는 관객들의 예상치도 못한 반응에, 란은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기뻐. 눈물이 날만큼 기뻐. 이런 반응은 정말 꿈에도 꾸지 않았는데.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열정에 대한 댓가를 말이다. 저도 모르게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가득 고여왔다.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은 환희를 맛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은 노래일 것이라는 것을.
백만 년을 살아도 오늘 같은 날은 절대 없으리라는 것을.
˝네!! 정말 대단합니다!!!! 열 네살 소녀의 이 엄청난 가창력과 호소력을 보십시오. 정말 저로써도 감탄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는 무대였습니다!!!!!˝
˝…하하.˝
˝노래를 배운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럼 혹시 꿈이…˝
란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꿈을 묻는 사회자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 큰 소리로 자신있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열정을 가진 가수입니다.˝
* *
˝싸인 좀 해 줄래요? 어쩜 노랠 그렇게 잘 불러요?! 완전 팬 됐잖아요. 혹시 싸이월드 해요?˝
˝이름이 뭐에요?! 저도 싸인 좀 해줘요!!˝
˝정말 아까 짱이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대에서 황급히 내려 와 혹시라도 지하철을 놓치기라도 할까 11시가 가까워지는 시각에 걸음을 바삐하는 란의 앞을 속도 모르고 막아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건 또 무엇인가. 정신이 알딸딸했다. 싸인을 해 달라고 한다. 하루 만에, 아니 두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생겨버린 팬들. 란은 한 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언니 오빠 서부터. 동갑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아이 엄마까지. 나잇대는 다양했다. 공통점은 내 노래를 들은 것 하나.
란은 어색해진 얼굴로 한사코 싸인을 해 달라고 성화인 사람들을 밀어내며 거의 달리다시피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의 뒤를 족히 몇 십명은 따르고 있었다.
딱히 따라오진 않아도, 어찌 안 것인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 덕에 걸음 하나도 제대로 띄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드디어 지하철 표 끊는 곳까지 다다른 란.
˝후유… 다행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안 쫓아오네.˝
겨우 겨우 사람들을 다 따돌려 낸 란은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선 주머니를 뒤져 차비를 꺼내려는데.
˝…나이가 열 넷이라고 했었나.˝
주머니를 한창 뒤적이던 란이 낯설은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 들었다. 놀란 두 눈으로 부산히 주위를 살피던 란은 곧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의 맞은 편에서 건방진 포즈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년이 아까 세븐틴 백화점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던 ˝두 번 째 남자˝ 라는 것도.
뭐야. 저 태도는. 란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빳빳히 쳐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차이가 나는 키. 한참이나 크다. 거기다가 저 알 수 없는 아우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번 째 남자˝ 에게 영락없이 기가 죽어버리고 만 란은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던 때.
˝서론 다 각설하고 묻는다.˝
˝…예?˝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남자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또 한번 놀라며 대답하고만 란. 그런 란을 보며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선 말을 잇는 ˝두 번 째 남자.˝
˝에콜쥬르에 들어 와.˝
˝네?˝
˝에콜쥬르에 들어오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에콜쥬르라니. 잠깐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에콜쥬르에 대한 기억에 란은 고개를 갸웃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검고 깊은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눈은 피하지 않았다. 가슴이 순간적으로 두근였다. 계속 마주봤다. 소년이 먼저 시선을 달리했다. 그러더니.
˝에콜쥬르를 몰라?˝
˝……네.˝
˝하. 가수 꿈 꾼다는 애가. 중학생이라 그런건가.˝
방금 무시한 거야?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버리고 말았다. 화를 억지로 눌러참던 란은 더 이상 이 남자를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 짓고는 그의 옆을 지나치려했다. 얼굴만 잘생기면
다냐. 성격이 저 모양인데.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옆을 다 스쳐지나갔을 무렵, 거짓말처럼 란의 팔목이 ˝두 번 째 남자˝에게 붙들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팔을 빼내려 반항하던 것도 잠시 뿐이었다. 무슨 작정을 한 것인지 꿈쩍도 하질 않는다. 여리 여리하게만 생겨서 힘이 없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저도 남자라고
힘 하나는 장난이 없었다. 분하다. 이럴 땐 정말 여자라는 것이.
˝뭐예요?˝
˝아직 말 안 끝났다.˝
˝난 끝났거든요? 그러니까 이 손 좀 놔 주실래요?˝
나름 당돌하다시피한 음색으로 빽 소리쳤건만, 그런 란의 말을 들으며 작은 조소를 띄우는 소년.
˝또 비웃었어요?!˝
˝에콜쥬르. 전국에서 알아주는 바흐 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음악 특기 재능부. 이하 음연영특부 에콜쥬르.˝
˝……!…˝
˝전국 소수 0.01퍼센트만 들어올 수 있는 부다. 신문에도 몇번 났었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예인 배출소. 한국인, 일본인, 나라 가리지 않고 받는 게 특징이니까.
부원은 총 아홉 명. 음악 특기생 계재도. 연기 특기생 하소월, 주라이, 박태양. 연극 특기생 공주연, 신민준.
그리고… 음악 특기 부장 정윤성. 부부장 도은광. 마지막은 너다.˝
˝…나?˝
˝그래. 너.˝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란은 조금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얼마가지않아 란은 그에게 말했다.
˝조건 성립.˝
그것이. 내 인생의 첫번째 운명이자 기회였다. 내 모든것을 송두리 째 뽑아 흔들었던 11월 31일 오후 11시 2분 전.
정윤성과의 첫번째 만남. 에콜쥬르와의 첫번째 만남. 내 인생과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첫댓글 재밌어요ㅎㅎ ^^
감사합니다 ^^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
재밌어요^ㅡ^///2빠댜~~ㅋㅋㅋ
감사합니다. ㅎㅎ 다음편에서도 뵈었으면 좋겠네요.
재미있어요!^ ^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
감사합니다. ㅎㅎ 다음편도 기대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_< 되게 재밌어요!! 다음편 빨리 올려주세요>_<
되게 재밌다니 큰 칭찬을 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담편이 넘 기다려 지는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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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넘 멋진거 같아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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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쪽지 잘 읽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집에 돌아가서 답장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와우~ 무척기대되는소설이나타나기쁩니다ㅠㅠㅠㅠ내일이면 다음편올라와있겠죠?
에콜쥬르 예술고등학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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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네요
다음편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