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월요모임에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복음과 생명 책을 끝내고
이 달부터는 창세기주해 묵상책을 읽고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는 생명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은 2여신도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들이 갑니다.
활동에 제약을 받는 어르신들이 점점 많아지니 안타깝습니다.
그냥 놀다 오는 시간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시간이 되게 하셔서
주님의 부르심을 소망하며 잘 준비하는 영혼들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해 주실 때, 진리를 보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본문 주해)
11~12절 :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거류민이고 나그네이다. 그리스도인은 국가나 가정에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해야 하나, 그들의 진정한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은 이 세상을 떠나 살지 않으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자임을 뜻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행악자로 비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만찬 때 인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오해가 있었다. 또 세상 사람과 동화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인하여 이상히 여김 받고 비방을 받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한 행실을 고수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오시는 날(또는 ‘심판하시는 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행실이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13~17절 : 그리스도인이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말씀한다.
국가의 지도자에 복종해야 하는데 주를 위하여 복종하는 것이다. 이때 왕이나 총독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로 여길 경우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국가 권력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주안에서 자유자로의 복종이다.
따라서 맹종과 무비판적인 굴종은 배척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만 구속된 자유 속에서 세상을 향한다. 이것은 자유방임과 노예근성을 동시에 지양하면서, 국가에 대한 복종을 이유로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포기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국가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배치될 때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우선한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되 왕도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왕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두려워할 이는 하나님뿐이다.
18~25절 : 노예에 대한 권면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많은 노예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모든 차별이 폐지되었지만, 이것이 사회적 신분의 폐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18~20--그리스도인 노예는 그의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한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주인을 섬기며 사는 노예라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자이기 때문이요, 또한 비록 지상에서 종으로 산다고 하여도 그것은 잠시 잠깐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에서도 노예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말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2~24)
설령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지만,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자신이 잘못해 놓고서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21~25절—부당하게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가 부당하게 고난 당하는 노예들의 본으로 제시된다.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런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 때문에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은 것이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인간은 없다.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참지 못한 것에 대하여 회개할 뿐이지 자기 정당함을 내세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주의 자취를 따르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의 발자취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임을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예수님께서 빈틈없이 자산의 자취를 따라오도록 인도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고난 받으시면서 참으신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 은혜의 장치이며 또한 복음이 증거 되는 길인 것이다.
(나의 묵상)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인과 국가의 관계, 그리스도인 노예와 상전의 관계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사는 삶, 영원하지 않는 이 세상 나라임을 환기시킴으로 확실하게 정리시킨다.
국가에 세금 바치는 문제를 질문함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 고 하셨다.
이것은 이 세상 나라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사는 성도들은 세상 나라 속을 살지만, 그 본향은 하늘 나라인 것이다.
그처럼 그리스도인 노예에게 까탈스러운 상전에게 순복하라는 것도 노예제도를 인정한다기보다 이 세상 나라는 속히 지나가는 것이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거류민일 뿐이다.
성도가 세상의 부조리나 부당한 법에 대해 거부하고 맞대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마치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여겨 이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이다.
성도는 자나깨나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데모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자나깨나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면 사는 자들이다.
불법에 맞서는 근본 이유도 우리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영원토록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성도는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 땅의 나그네들이요, 이 세상 나라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이 땅에서 주어진 각자의 삶을 대충 살지는 않는다. 영원하지 않은 이 세상 나라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일정한 생의 분량을 주셨으니, 오로지 성실하고 또 열심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온갖 고초와 수모를 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
구원받은 자, 주님의 고난을 함께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 삶에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며 살아가니, 그것은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이다.
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이 삶이, 이젠 지극히 마땅한 삶인 것을 알게 된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전에는 내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온 증거이다.
(묵상 기도)
주님,
이 세상 나라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불법과 불의에 항거하지만,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 나라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십자가에 연합됨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자나깨나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