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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역사문에서 오래간만에 글을 올려보는군요. 이번 글에서는 제목에서 제시한대로 동원능력이 최대 70만까지 가능했던 요나라가 어째서 10만만을 동원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넓은 시야에서 한국사를 보는 즐거움이 있을 듯하네요. 그럼 바로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서하 태조 이계천은 서기 1003년(함평 6) 겨울에 하서(河西: 간쑤성) 토번(티베트)과의 전투 도중 유시(流矢: 눈먼 화살. 일종의 유탄.)에 맞았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인 서기 1004년 정월 4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이어 아들인 이덕명(李德明, 981∼1032)이 그 뒤를 계승하였지요. 바로 이해, 즉 서기 1004년 음력 12월 초에 북송은 요나라(거란)와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지요. 양력으로는 서기 1005년 1월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이 이덕명이 바로 서하의 태종인데 고려 현종 임금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 임금은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지요. 고려도 그러했지만 서하 역시 요나라와 북송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로 국익을 도모했던 나라입니다. 이덕명 역시 이 대전제에 충실한 인물이었지요. 그는 이때 북송에 사신을 보내어[遣使] 형식적이나마 신하로서 복종하는[臣服] 자세를 취합니다.
북송은 서기 1006년(경덕 3) 이덕명에게 정난군절도사(定難軍節度使) 서평왕(西平王)의 벼슬과 은(銀) 만냥, 견(絹: 명주) 만필, 전(錢: 동전) 2만관과 차 2만근을 제공했지요. 동시에 변경(국경지대)에 각장(榷場: 무역하던 시장)을 개설하여 무역을 진행하였으며 당항족(탕구트족, 서하)의 사신이 카이펑(개봉 開封)에 왔을 때 각종 물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요나라나 고려를 상대하는 것과 유사한 상투수단입니다.
북송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당항족은 하서회랑(河西回廊) 즉 간쑤성[감숙성]으로의 영토 확장과 발전에 주력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덕명은 북송과 요나라(거란) 사이에 전연의 맹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요나라와 우호 관계를 지속하였지요. 이러한 자세는 요나라와의 연변 지구에 거주하는 당항족 관련 사안의 처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이덕명은 내부적으로는 자주적인 자세를 분명히 했지만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북송 진종) 상부(祥符) 5년(五年)(인 서기 1012년에),(서하 임금 이)덕명은 (서하 태조 이)계천에게 존호를 올려 응운법천신지인성지도광덕효광황제라 일컬었다(德明追上繼遷尊號曰應運法天神智仁聖至道廣德孝光皇帝)。
『송사(宋史)』 권485(卷四百八十五) 「열전(列傳) 제244(第二百四十四)/외국1(外國一)/하국(夏國) 상(上)」, P.13989.
서기 1013년인 북송(北宋)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 5월에 요나라 서남지구의 당항족이 과중한 부세를 못 이겨 황하 북안(北岸)의 모학산(模郝山)이라는 곳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이때 남은 두 부족인 갈당(曷党)과 오미(烏迷)가 이덕명에게 사신을 보내 하주(夏州)에의 귀속 즉 서하가 자신들을 합병해주기를 희망했으나 이덕명은 요나라와의 관계를 의식하여 이를 거절하였지요.
사실 ‘탕구트족 통합’이라는 차원에서는 갈당이나 오미를 받아들이는 것이 맞았겠지요. 실제로 이후에도 당항인의 유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나라의 성종은 이덕명에게 조서를 내려[下詔] ‘당항족이 반란했으니 거란은 서쪽으로 정벌하고[西伐] 그대는 동쪽에서 공격하여[東擊] 협공하자.’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덕명은 이에 충실히 따라 출격하였지요.
이 서기 1013년은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요나라가 고려와 국지전을 시작하던 시점입니다. 요나라 성종은 서하에 속하지 않은 탕구트족과도 국지전을 벌인 것이지요. 이러한 이덕명 통치 시기 서하(당항족)와 요나라(거란) 사이의 기본적인 우호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덕명이 북송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신하로서 복종하는[臣屬] 시늉을 하게 되면서 요나라와 미묘한 알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단적인 사건이 서기 1018년(북송 인종 천희(天禧) 2년) 7월 토번(吐蕃: 티베트)의 요나라 조공문제를 둘러싸고 빚어진 양측 간의 외교분쟁입니다. 이때 토번 군주들 중 한 사람인 병리존(幷里尊)이 라는 인물이 요나라 성종에게 조공 노선이 멀다고 하소연하자, 요나라의 성종은 이덕명의 당항족 즉 서하에게 길을 빌려주라고[假道] 지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에 제시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지요. 고대 중국에서도 가도벌괵 (仮道伐虢)이라 하여 길을 빌려주는 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이 기본 공식이라 문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지요. 요나라나 북송에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이는 이덕명이라 해도 ‘길을 빌려주는’ 행위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라 성종의 명령에 따라 병리존은 서하의 이덕명에게 사신을 보냈으나[遣使] 이덕명은 그 요구를 묵살하였고, 병리존은 이를 이유로 요나라에 대한 조공을 단절해 버렸습니다. 고려 침략 4개월 전에 벌어진 이 사건은 서하와의 긴장 관계를 만드는데 충분한 재료였지요. 고려 침략 자체는 결국 강행했지만 이래서는 요나라 성종이 직접 고려로 가는 것은 꽤나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사태는 자칫하면 요나라 입장에서 고려와 서하와의 양면 전선으로 확대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니 요 성종이 고려 전선에 직접 출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요. 결국 소배압이 총사령관으로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하게 됩니다. 10만이 적은 수는 아니지만 2차 때 요나라군에 비하면 좀 부족한 듯도 싶지요.
제2차 고요전쟁(강조 장군 및 양규 장군 관련) 때 요나라가 마음놓고 고려를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 정지 작업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가능했습니다. 즉 서기 1004년에 요나라는 북송과 전연의 맹약을 맺어 화친했고 서기 1009년에는 요 성종이 서하 태종 이덕명에게 하국왕(夏國王)이라는 작위를 제공함으로써 뒷탈을 없앤 덕분에 고려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참고로 이덕소는 이덕명의 다른 이름입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요나라 성종 통화 28년인 서기 1010년 음력) 9월(九月) 을유(乙酉)일에,(요 성종이) 사신을 보내어 서평왕 이덕소를 책봉하여 하국왕으로 삼았다(遣使冊西平王李德昭為夏國王).
『요사(遼史)』 권15(卷十五) 「본기(本紀) 제15(第十五)/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緒) 6(六)/통화(統和) 28년(二十八年)」, P.167.
반면 제3차 고요전쟁이 임박한 시점인 서기 1018년은 서하와의 마찰로 인해 제2차 고요전쟁과는 다른 양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긴장 관계는 제3차 고요전쟁이 끝나는 서기 1019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이래서야 고려와의 싸움에 10만을 초과하는 대병력을 동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요. 국제관계의 미묘함을 감안할 때 아무리 고려가 만만치 않은 나라라 해도 2차 전쟁 때처럼 국력을 기울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최근에 화친을 맺은 북송이 그나마 서하를 견제해주기를 기대했겠지만 북송의 태자 조정은 서기 1018년 시점에서 9세에 불과했습니다. 후계 구도가 심히 불안정했다는 것이지요. 그가 임금이 되었을 때인 서기 1022년에는 13세였는데 이는 훗날 조선 단종보다 고작 1살이 많은 나이였습니다. 정국불안정이 예정된 상황이었지요. 이런 상태에서 남의 나라에 이래라저래라 할 계제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서기 1018년부터 긴장 관계에 있던 요나라와 서하는 충돌하게 됩니다. 요나라의 성종은 서기 1020년(천희 4) 5월 수렵 즉 사냥을 핑계로 친히 50만 대군을 이끌고 양전(凉甸)이라는 지역을 공격하게 되었지요. 이 시기에 소배압은 귀주대첩으로 인해 벼슬을 잃고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요 성종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신진 장수들은 자기 몫은 하지만 총사령관 역할은 역부족이었고 그 일을 감당할만한 소배압은 '징계기간', 소항덕 즉 소손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요나라 입장에서 불행이었습니다. 서기 1019년에 고려에게 대패한지 1년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태종 이덕명의 당항 정권 즉 서하에게 패배하고 말았지요. 역시 귀주대첩의 후유증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일으킨 전쟁이 유리할 리는 없었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기 1020년인 북송 진종 임금 천희) 4년에, 요주(요나라 성종)가 친히 군사 50만을 이끌고, 사냥을 한다 말하고 와서 양전을 공격하였는데, (서하 태종 이)덕명이 무리를 이끌고 (요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막아, 이(요나라 군대)를 깨뜨렸다(四年,遼主親將兵五十萬,以狩為言,來攻涼甸,德明帥眾逆拒,敗之)。
『송사(宋史)』 권485(卷四百八十五) 「열전(列傳) 제244(第二百四十四)/외국1(外國一)/하국(夏國) 상(上)」, P.13989.
이후 이덕명은 요나라에 대한 조공을 정지했습니다. 서하 태종 이덕명의 이러한 행위는 요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강한 의지였지요.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요나라는 국경에서 생기는 근심[邊患]을 우려하여 먼저 강화를 제의하였고, 이덕명도 이에 응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다시 정상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양전의 전투는 양국 관계에 중대한 파장을 남겼지요.
요나라 측이 당항 정권 즉 서하를 대하는 태도 역시 바뀌어,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철저한 존비(尊卑) 관계를 강요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려가 요나라를 물리쳤을 때의 효과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었고요. 이렇게 동아시아는 귀주대첩과 양전의 전투로 인해 요나라, 북송, 서하 그리고 고려가 공존하는 다극체제가 1백여 년 동안 유지됩니다. 이 세력 균형을 일시나마 깨뜨리는 것은 여진족의 금나라였고 아예 파괴해버린 나라는 아시다시피 몽골족의 원나라가 되지요.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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