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M.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1878-1929, 파락만(巴樂萬))】
「한국 청년 운동과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의 YMCA 선교사」
1. 출생 및 YMCA 사역, 내한
브로크만은 1878년 5월 21일 미국 조지아 주 더글러스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기독교청년회(YMCA) 사역에 뛰어든 형 플레처의 영향으로 그 역시 자연스레 YMCA 사역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된다. 1902년 조지아주립대학 졸업한 브로크만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YMCA 학생부 간사로 사역하면서 형 플레처가 사역하는 중국으로 가길 희망했다.
그러나 형의 생각은 달랐다. 밴더빌트대학 재학 시절 한국에서 유학 온 윤치호를 만나 친분을 쌓고, 1901년부터 중국 YMCA 총무로 사역하면서 한국 YMCA의 출범에도 기여한 플레처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동생 프랭크에게 한국선교사로 갈 것을 권면한다.
형의 권면으로 브로크만은 1905년 내한하여 한국 YMCA의 모체인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협동간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2. 황성기독교청년회 사역, 결혼
내한한 브로크만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전개하면서 꾸준히 상류층 젊은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회 부총무로 선임된 그는 이듬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차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회에 윤치호, 김정식, 김규식 등 6명의 조선 대표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더욱 활발하게 YMCA 사역을 통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황성기독교청년회 공동총무를 역임한 브로크만은 1910년 6월 한국 학생운동 사상 최초로 기독교 학생 하령회(여름수련회) 개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듬해 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 학생회 간사로 사역하던 이승만과 함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학교마다 YMCA 학생회 조직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그해 6월 개성에서 제2회 학생 하령회를 개최하여 한일병탄 이후 청년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한국에서 YMCA 사역을 통한 선교에 매진하던 브로크만은 잠시 귀국하여 1912년 6월 29일 제시 릴리안 윌리스와 결혼한다.
3.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결성, 어머니와 딸을 양화진에 묻다.
브로크만의 헌신으로 활성화되던 한국 YMCA은 1911년 말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를 비롯한 한국인 동역자들이 투옥되고, 함께 YMCA 사역을 하던 동료 선교사 질레트가 추방으로 YMCA는 큰 위기를 맞는다.
이때 브로크만은 이상재와 함께 YMCA의 재건에 앞장섰다. 1914년 전국 10개의 YMCA 조직이 모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결성되었을 때, 그는 초대총무로 취임한다.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 한국인들 중심의 사회단체가 대부분 해산되었을 때, 오히려 YMCA는 전국 단위규모의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브로크만의 주도 하에 YMCA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선교를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전문직 창출을 위한 청년들의 직업교육을 모색했으며, 특히 산업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 건설 등의 다양한 주제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여 수많은 청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후 석방된 윤치호에게 1916년 YMCA 총무직을 인계한 브로크만은 협동총무로 섬기면서 청소년 사역을 전개했으며, 1919년 선교잡지 「조선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 역임하는 등 문서사역을 통한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이처럼 한국 YMCA의 활성화로 선교사역에 있어서 큰 기쁨과 보람을 맛보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1915년 3월 7일 한국을 방문 중이던 어머니가 75세로 그리고 1922년 6월 23일 장녀 바바라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들 모두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다.
4. 농촌운동 전개
1923년부터 신흥우와 함께 농촌운동을 시작한 브로크만은 당시 한국 농촌의 현실을 직접 답사하면서 한국 농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1924년 형 플레처의 도움으로 신흥우와 함께 미국 레이크 플레시드로 건너가 국제 YMCA 총무 존 모트, J. C. 페니, 플레처 S. 브로크만 등과 함께 5자 회담을 성사시켜 한국의 농촌 지원에 대한 합의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 YMCA 본부를 방문하여 한국에 농업 전문가들의 파송을 요청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국제 YMCA는 1925년부터 10명의 농업 기술자들을 한국으로 파송했으며, 재정 지원 및 선진 농업기술을 도입하는 등 한국의 농촌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인 도움을 얻는 큰 성과를 거뒀다.
5. 건강악화로 귀국, 소천 그리고 양화진에 묻히다
1905년 내한 이후 YMCA 운동을 통한 학생과 청년계몽운동과 교육사업, 농촌운동의 개척자로 헌신하던 브로크만은 1927년 7월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로 귀국하였다. 이후 미국에 머물며 치료에 전념하던 그는 1929년 6월 10일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51세로 소천한다. 화장된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그해 9월 14일 양화진 묘지의 어머니와 장녀 바바라 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