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베토벤이 누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옛날에 클래식 다방이나 음악 감상실에 가면 어디에서나 특유의 산발 머리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토벤의 초상화나 데스마스크를 볼 수 있었다. 그 속에 투영된 베토벤의 모습은 고뇌하는 예술가의 초상 그 자체였다. 이렇게 시대의 고통을 짊어진 채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의 이미지는 어느새 진정한 예술가의 전형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연극, 소설, 영화,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형성된 특정한 이미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 영화를 만들 경우, 감독은 이런 무수한 전작(前作)의 성과들과 싸워야 한다. 자칫하면 표절이 될 수도 있고, 표절이 아니더라도 웬만큼 독창적이지 않으면,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은 힘든 소재가 아닌가 싶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카핑 베토벤]은 이런 후발 주자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만들어진 영화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베토벤 관련 영화로는 1994년에 나온 버나드 로즈 감독의 [불멸의 연인]과, 2005년 영국BBC 방송이 만든 [에로이카]가 있다. 이 중 [에로이카]는 영화라기보다 이야기가 있는 뮤직비디오에 가깝다. 따라서 이것을 빼면 [불멸의 연인]과 [카핑 베토벤] 두 작품만 남는데, 비록 베토벤이 주인공이지만 두 영화 모두 내용은 실화가 아닌 픽션이다.
[카핑 베토벤]에는 안나 홀츠라는 가상의 인물이 나온다. 옛날에는 작곡가가 마구잡이로 휘갈겨 쓴 악보를 연주자들이 보기 쉽게 깨끗하게 베껴 적는 카피스트라는 직업이 있었다. 안나 홀츠는 바로 베토벤의 카피스트이다. 마지막 교향곡 [합창]의 초연을 앞두고 있던 베토벤은 자기 악보를 카피할 유능한 카피스트를 찾던 중 우연히 음대 우등생인 안나 홀츠를 소개받는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여성이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기가 잘못 적은 음을 안나가 고쳐서 그려 넣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성격과 생각의 차이로 마찰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음악을 통한 예술적 공감을 얻게 된다.
그러던 중 안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베토벤이 [합창교향곡]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예전에 베토벤의 카피스트였던 슐레머는 안나에게 제발 베토벤이 [합창교향곡]의 초연에서 지휘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한다. 그 후 베토벤의 지휘로 [합창교향곡]의 리허설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베토벤이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베토벤과 안나는 음악을 통한 예술적 공감을 통해 정신과 영혼의 합일을 이룬다. <출처: 네이버 영화>
드디어 [합창교향곡]의 초연날이 다가왔다. 관객의 자격으로 연주회장에 들어온 안나는 급히 슐레머의 부름을 받는다. 베토벤의 지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나에게 대신 지휘를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지휘대에는 베토벤이 서고, 안나가 그 맞은편에서 지휘를 하기로 한다. 안나의 지휘를 베토벤이 카피하도록 한 것이다.
드디어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비록 전곡은 아니지만 영화에서는 이 장면에서 음악을 상당히 길게 들려준다. 1, 2, 3악장의 주요 대목이 나오고, 이윽고 [합창교향곡]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4악장으로 들어갔다. 안나와 베토벤은 서로의 몸짓에 집중한다. 안나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베토벤의 손끝으로 전달된다. 안나와 베토벤은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하나의 음악을 두 사람이 공유하는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인간적인 사랑 이상의 사랑을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 음악을 통해 육체의 결합이 아닌, 그 보다 한 단계 높은 정신과 영혼의 합일을 이룬 것이다.
안나의 도움으로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나고, 베토벤은 교향곡에 처음으로 합창을 집어넣음으로써 음악사의 새 장을 열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교향곡에 처음으로 합창을 집어넣음으로써 음악사의 새 장을 연 베토벤은 그 이후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한다. 음악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대푸가]를 작곡한 것이다. 이 현악 4중주는 아름답지 않다. 너무 자극적이고, 어떻게 보면 추하기까지 하다. 안나 홀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자 베토벤이 이렇게 얘기한다.
추하지만 아름답지. 미에 대한 도전이야. 추함과 본능으로 음악을 인도하지. 인간의 창자가 신께 가는 길이야. (배를 잡으며) 신은 여기 살아. 머리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야. 신을 느끼는 건 이 창자 속이야. 천국을 향해 창자가 휘감겨 있는거야.
베토벤의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미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추한 것도 미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인 발상이다. 그런데 고전주의 시대의 베토벤이 이렇게 시대를 앞서 가는 생각을 한 것이다. 베토벤은 생의 말년에 고전주의의 관습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음악을 많이 썼는데, [대푸가]도 그런 음악 중 하나이다.
사실 푸가는 고전주의 이전 시대 즉,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 양식이다. 쉽게 말하면 복잡한 돌림노래 정도가 되는데, 매사에 도전적인 베토벤이 왜 푸가라는 옛 양식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비록 과거의 양식을 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미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에 어울릴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베토벤은 푸가라는 양식을 빌어 미에 대한 도전이라는 혁명을 이루어낸다. <출처: 네이버 영화>
[대푸가]를 듣고 있으면 ‘음악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고전주의의 대명제에 베토벤이 한 방 강한 펀치를 날렸다는 느낌이 든다. 정말로 이 곡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현악기 4대가 활로 줄을 신경질적으로 긁으면서 듣는 사람의 귀를 자극한다. 베토벤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자 고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곡을 듣던 귀족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는 장면이 나온다. 대주교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면서 베토벤에게 한 마디 한다.
이 정도로 귀가 나빠진 줄 몰랐어.
시대를 앞서 가는 곡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법이다. 안나 홀츠도 역시 처음에는 이 곡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이 곡을 이해하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 안나가 베토벤의 임종을 보기 위해 그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바로 [대푸가]가 나온다. 죽음을 눈앞에 둔 베토벤 앞에서 안나는 비로소 고백한다.
이제 선생님의 방식대로 [대푸가]를 듣게 되었어요.
말년에 베토벤은 현악4중주라는 양식에 집중했다. [합창교향곡] 같은 대규모의 교향곡은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실내악에 매달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외형적인 것보다 자기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내악이야말로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자기 고백적 양식이니까.
말년에 베토벤은 자주 아팠다. 그래서 자주 작곡이 중단되곤 했다. 베토벤은 이렇게 아플 때마다 더 이상 곡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올까봐 두려워하곤 했다. 병을 떨치고 일어나게 되면 그는 신에게 다시 작곡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의 현악 4중주 15번은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영화에는 병석에 누운 베토벤이 안나 홀츠를 시켜 이 곡을 악보에 적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에 대한 감사야. 일이 끝날 때까지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지. 신을 갈구하면 신께서 대답하신다. 구름이 열리고 사랑의 손길이 내려와 하늘로 들어 올린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영원 속에 거하게 된다. 땅은 존재하지 않아. 시간도 사라지고. 인간을 들어 올린 손길은 얼굴을 어루만져 신의 형상으로 빚어낸다. 그럼 신과 하나가 되는 거야. 평화 속에 존재하게 돼. 그럼 마침내 자유가 된다.
이 장면을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모차르트의 일대기를 다룬 [아마데우스]이다. [아마데우스]에서 병석에 누운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에게 자신이 작곡한 [레퀴엠]을 악보에 받아 적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었지만 [카핑 베토벤]의 이 장면은 [아마데우스]와 완전히 똑같다. 그야말로 ‘카핑 아마데우스’이다.
베토벤이 안나 홀츠가 작곡한 곡을 피아노로 치면서 비웃는 장면 역시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모차르트가 비인 궁정에서 살리에리의 곡을 피아노로 치며 평가하는 장면이다. 또한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이 리허설에서 지휘하며 실수를 연발하는 장면은 [불멸의 연인]의 [황제] 리허설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 역시 ‘카핑 불멸의 연인’이다. 영화의 제목에 ‘모방’이라는 의미의 ‘카핑’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 재미있다. 물론 영화를 만든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 말을 썼겠지만 영화 중간 중간 기존 영화의 아이디어를 모방한 장면을 볼 때마다 ‘카핑’이라는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베토벤의 음악이다. 특히 첫 장면에 나오는 [대푸가]와 그 후에 나오는 [합창교향곡]은 음악의 혁명가로서, 고전주의를 넘어 낭만주의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 새 시대의 선구자로서 베토벤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안나 홀츠는 석양에 물든 너른 들판을 하염없이 걸어간다. 이런 그녀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합창교향곡]이 흐른다. 베토벤은 인류에게 [합창교향곡]이라는 선물을 주고 떠났다. 이것은 단순한 음악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유, 평등, 화합, 평화. 이런 가치들을 이후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민족의 차이를 넘어, 전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베토벤을 인류에게 환희의 메시지를 던져준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베토벤을 인류에게 환희의 메시지를 던져준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은 베토벤의 이상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유럽은 혁명 이전의 세계로 돌아갔다. 자유와 통일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무참히 묵살되었다. 베토벤이 원했던 것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계몽 군주였던 요제프 황제 시대로 돌아가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의회정치를 통해 그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형태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베토벤은 18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동안 그렇게 열심히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설파하려고 노력했건만 그가 원하던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절망의 나락을 헤매던 말년의 베토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세상과 작별했을까. 역사가 진보를 멈춘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움켜쥐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