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이
이 화 리
아주 작은 그 집에서 정말 작은 아이 하나가 나옵니다.
푸른 대문을 나서는 아이의 표정이 파도처럼 싱싱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아이의 이름은 대성이고 참 귀엽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수정(水晶)입니다. 마을은 도로에서부터 산등성이를 향해 펼쳐져 있습니다. 마치 봄날 진달래 꽃무더기처럼 알록달록 집들이 피었습니다. 그 다닥다닥 작은 집들 중에 가장 작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동화 속 소인국 같은 이 집에 정말 소인국의 사람 셋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난장이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유전적 변형에 의해 작은 사람이 된 정확한 병명은 왜소증입니다. 왜소하다는 건 평균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몸집을 말합니다.
아주 작은 그 집에서 정말 작은 아이 하나가 나옵니다. 푸른 대문을 나서는 아이의 표정이 파도처럼 싱싱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아이의 이름은 대성이고 참 귀엽습니다. 대성이는 축구공처럼 통통통 골목길을 달려내려 갑니다. 그런데 키가 너무 작다보니 책가방이 땅에 닿을 지경입니다. 잠시 가다 멈춘 아이는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를 부릅니다.
“동호야! 주동호! 학교 가자아!”
대성이의 키가 작다고 목소리까지 작은 건 아니어서 동호는 금방 나옵니다.
“아유우, 대성이는 오늘 아침에도 씩씩하구나.”
동호엄마의 예쁜 목소리는 다정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대성아! 너의 목소리를 들으면 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단다.”
“네!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너희들 신호등 잘 지켜!”
“네!” “네!”
눈썹이 아주 검고 탤런트처럼 잘 생긴 동호는 웃음 띤 얼굴로 대성이의 몸을 돌려 가방을 벗깁니다. 둘 사이에 늘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야. 고마워. 오늘은 준비물 때문에 더 무거운데?”
“괜찮아. 이 정도쯤은 문제없어. 너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다리는 짧고 머리통은 크다보니 대성이는 곧잘 넘어집니다. 그런 신체조건임에도 친구들을 따라 걸으려고 허둥대다보니 무릎은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제 덩치만한 가방에서 해방된 대성이는 비둘기처럼 구구대며 즐겁습니다. 그런 대성이의 뒷모습을 보는 동호는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보는 어른처럼 의젓합니다. 신바람이 나서 골목길을 지그재그로 뛰어 내려가던 대성이가 어느 집 문 앞에서 다시 멈춥니다. 대문 옆 담장 안에는 하얀 목련꽃이 아름답습니다. 대성이는 다시 큰 목소리로 친구를 부릅니다.
“상윤아! 빨리 나와! 학교가자!”
우렁찬 목소리에 목련꽃이 나풀거리며 “얘들아, 오늘도 안녕!”인사를 하는데 아이들은 미처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쪽대문이 열리며 상윤이가 나옵니다. 대성이의 목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부딪치자 목련꽃들이 하르르 나부끼며 떨어집니다. 그건 마치 목련꽃들도 학교에 따라 가겠다고 보채는 것 같습니다. 안경을 쓴 상윤이는 동호보다 키가 더 크고 목련꽃처럼 하얀 얼굴입니다.
“안녕!”
“그래, 너도 안녕!”
“우리 모두 안녕!”
인사를 주고받은 상윤이는 대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대성이가 워낙 작아서 손을 잡을 수 없는 대신 건네는 다정한 우정의 표시입니다. 대성이는 상윤이의 손길이 좋아서 강아지처럼 머리를 들이댑니다. 셋이 교문에 들어서고 나면 대성이는 몸이 불편한 아이들의 특수반으로 가느라 잠시 헤어집니다. 비록 고칠 수 없는 병으로 보통사람들과 생김새가 다르지만 참 명랑하고 행복합니다. 왜냐면 바로 동호와 상윤이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늘 보호자가 되어주는 둘 때문에 다른 아이들도 대성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수정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아름답지만, 세 아이의 등교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세상은 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성이가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평소에도 심장병을 앓던 대성이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작은 사람들 눈에는 늘 다른 사람들의 신발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구두닦이였습니다. 엄마가 구두를 거둬오면 아빠는 열심히 닦곤 했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대성이와 엄마는 구두 닦는 부스로 나왔습니다. 대성이가 구두를 거둬오면 엄마는 구두를 닦습니다. 동호와 상윤이가 많이 말렸지만 대성이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대신 두 친구가 주는 책으로 홀로 공부합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대성이네는 집을 살 때도 빚을 내었고, 아빠의 오랜 병으로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해도 취직이 힘들 대성이는 엄마를 도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슬픔에 찬 엄마가 홀로 큰 길 가에 놓인 부스로 나가는 건 너무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건 대성이에게 남모를 고통입니다. 근처 건물마다 다니며 구두를 거둬 나오거나 가져다 줄 때 지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자위가 붉어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동호와 상윤이의 키가 부쩍 자라서 점점 대성이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친구들의 키가 하늘을 향하는 나무처럼 자랄수록 대성이는 점점 땅꼬마처럼 납작해지는 것 같습니다. 동호와 상윤이가 중학교에 다니며 시간에 쫓겨서 가끔씩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성이의 큰 눈에 눈물이 맺혔다가 꾹꾹 참는 눈 속으로 사라지곤 합니다.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대성이는 무척 부럽습니다.
이렇게 누구는 나날이 자라고, 누구는 전혀 자람이 멈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대성이와 엄마는 아빠 없는 슬픔에서 많이 벗어났습니다. 키가 너무나 작은 엄마가 의자 높이의 싱크대에서 아침밥을 짓습니다.
“우리 아들, 오늘은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났네.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
선풍기 앞으로 다가온 대성이의 온 몸을 바람이 캡슐처럼 감쌉니다. 선풍기와 대성이의 키는 쌍둥이처럼 같습니다.
“응, 더워서 깼지만 동호랑 상윤이랑 함께 놀 생각만 해도 잠이 달아나.”
“엄마보다 친구가 더 좋은가보네? 대성아, 엄마 지금부터 삐칠 거야.”
“엄마와 나 사이와 친구들 사이는 다르잖아? 어서 아침밥이나 주세요. 대성이 엄느님!”
“그래. 내가 오늘은 특별히 용서한다. 자, 미운 놈 떡 하나란다. 아들, 이거 먹어.”
엄마는 오이냉국을 하느라 껍질을 깎던 오이를 반으로 툭 잘라 건넵니다. 오이의 상큼한 향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맑게 이어줍니다. 아싹아싹, 대성이와 엄마의 맛있는 소리가 집안 곳곳에 영롱한 물방울들로 떠다닙니다. 낮은 식탁과 더 낮은 의자도 대성이와 엄마를 따라 명랑해집니다. 아직 이른 아침햇살도 덩달아 마룻바닥에서 발레를 하듯 우아한 발걸음입니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바람이 언제 따라 들어와 햇살의 손과 허리를 잡으며 빙그르르 돕니다. 작은 집에서 열리는 아침의 왈츠입니다.
대성이와 동호, 상윤이는 해수욕장으로 갑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름이면 셋은 바다에 자주 갔습니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대성이는 비로소 철이 들어 남의 시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을 했지만 동호와 상윤이가 자신들도 안 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갔습니다. 동호와 상윤이는 어째서 장애인인 대성이한테 변함없이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그건 아마 선생님들의 올바른 교육과 부모님들의 따뜻한 마음을 배워서 그럴 것입니다. 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세상인데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고 무심코 차별을 합니다. 차별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잊혀 지지 않는 아픈 상처가 됩니다. 집이 크든 작든, 지위가 높든 낮든, 키가 크든 작든,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누릴 자유가 있습니다.
셋은 거의 온종일 바다와 해변에서 맘껏 뛰어놉니다.
“야, 안 돼! 그만!”
“괜찮아. 우리를 믿어.”
“에이, 오늘은 겁쟁이 대성이 너 수평선에 내다 버릴까?”
“아아악! 엄마아! 동호야, 상윤아, 상윤아, 동호야. 엄마아아!”
“그래, 난 세상에 하나 뿐인 수염 난 엄마다.”
“와 진짜 큰 파도다! 넘자!”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어푸푸푸푸후, 아푸우우.”
수영을 못해서 동호와 상윤이가 이끄는 튜브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대성이는 왕자가 된 기분입니다. 더러 바닷물을 삼켜 소금왕자 쯤으로 부르면 맞을 것 같습니다. 가끔 지친 대성이가 백사장에서 쉴 때면 동호와 상윤이는 멋진 수영실력을 보이며 파도를 거스르곤 합니다. 이런 광경으로 자신의 장애가 확연히 드러나지만 대성이는 친구들의 건강한 체격에 마음이 뿌듯합니다. 이렇듯 친한 친구들이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함께 할 무엇이 거의 없습니다. 대성이는 학교공부와 학원공부로 시간에 쫓기는 동호와 상윤이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진심으로 친구들이 잘 되길 바랍니다.
이런 대성이에게 참으로 슬픈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요즘엔 구두를 닦는 사람들이 자꾸만 줄었습니다. 대성이 엄마는 자동차부품 가내공장에 취업해 가느다란 전선을 연결했고, 대성이는 주유소에 겨우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착한 동호와 상윤이는 어른처럼 키가 훌쩍 자라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셋은 더욱 바빠져 좀체 만나지 못하지만 카톡으로 그리움을 전합니다.
늦은 가을날이었습니다. 가만있어도 낙엽 진 가을은 스산한데 비까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대성이 엄마는 공장에서 잔업을 하고 밤이 되어 퇴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주차되었던 큰 트럭이 후진을 하며 그만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높이 달린 사이드미러에 안 보일만큼 너무 작은 대성이 엄마는 더욱 작게 땅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학원에 있던 동호와 상윤이가 엄마들이 보낸 문자를 보고 영안실로 달려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울고, 동호와 상윤이도 자꾸 눈물을 훔치는데, 대성이는 울지도 않고 두꺼비처럼 눈만 껌벅껌벅하며 앉아있었습니다.
수정마을 사람들 중 가까운 이웃과 동호와 상윤이 부모님들이 장례를 치렀습니다. 대성이 부모님은 고아원에서 만난 사이여서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화장장 ‘하늘공원’ 앞에서부터 대성이는 하늘이 흔들릴 만큼 큰 소리로 울어서 온 사람들이 목이 메었습니다.
“엄마! 나도 엄마 따라 갈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이 팔 놓으세요! 아아아아악! 엄마아아아아아! 가지 마! 안 돼! 가지 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아아아!”
“안 된다, 대성아, 엄마 잘 보내주자!” “대성아! 참아라!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 “아이고오, 이 불쌍한 것. 대성아!”
수 없이 거듭된 이런 말들이 눈물의 강을 이루며 소용돌이 쳤습니다.
쓰 잘 데 없이 내렸던 늦가을 비도 미안했던지 그날은 하늘이 너무 맑았습니다. 엄마가 새 옷을 입고 아빠를 찾아가기 참 좋은 날씨였습니다.
슬픔이 시간을 따라 멀리 흘러가듯 가을이 가고 겨울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대성이는 살고 있습니다. 집으로 오르는 골목길에서 자주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대성이에게 하늘은 우리들보다 조금 더 높지만 별빛은 그런 대성이를 위해 더욱 밝게 빛납니다.
주유소의 장사가 잘 안되어 걱정하던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 주유소를 팔았습니다. 대성이만은 꼭 쫓아내지 말라고 당부를 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주인은 폭행과 욕설을 예사로 합니다. “이런 병신새끼, 빨리빨리 해!” “저 병신새끼 때문에 재수가 없어서 장사가 안 돼!” 수시로 구둣발에 온 몸이 걷어차이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후려치고, 어찌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키에 비해 커다란 대성이의 머리가 더욱 커져서 선풍기만큼 부풀까 걱정될 정도의 통증이었습니다.
오늘은 대성이가 직장에서 끝내 쫓겨난 날입니다. 행동이 굼뜨다는 이유지만 너무 짧은 다리로는 어쩔 수가 없었지요. 낮부터 구름이 무거워지더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걸음은 무척 경쾌합니다. 남들에겐 축복인 눈이 대성이에겐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흰 국화들처럼 슬프게 보입니다.
버스에서 내린 대성이는 하염없이 길을 걷습니다. 멍든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아빠와 엄마를 배웅한 마지막 집을 향합니다. 왠지 ‘하늘공원’에서 엄마와 아빠가 대성이를 기다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늘공원’은 목이 터져라 울기에 참 적절한 장소입니다. 집 외에는 정말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아침밥 이후 종일 굶은 대성이는 늦은 밤 수정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눈은 한 뼘 무릎이 잠길 만큼 내렸습니다. 집 앞에서 대성이는 연신 호주머니를 뒤지는데 대문 열쇠도 휴대폰도 없습니다. 주인의 폭행과 고함소리에 넋이 빠져 주유소 골방에 있는 가방을 잊고 왔습니다. 다시 그 곳에 가고 싶지 않은 대성이는 누군가 지나가면 낮은 담을 좀 넘겨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동네 수정마을 사람들은 눈이 오면 일찍 귀가하는 탓에 통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담벼락과 대문 옆의 모서리공간에 최대한 몸을 접어 앉은 대성이는 어느 한순간, 쌓이는 눈처럼 고이 잠이 듭니다.
대성이의 멍든 얼굴에 진달래꽃처럼 발그레한 미소가 번집니다. 아주 예쁜 비단옷을 입은 엄마와 왕관을 쓴 아빠가 소인국의 왕궁에서 손을 흔들며 걸어 나옵니다. 엄마아빠의 발자국마다 예쁜 꽃들이 피어 만발합니다.
―대성아. 우리 대성이구나. 아빠가 너만은 키 좀 크라고 클 대(大) 자랄 성(成), 대성이라고 지었는데 이렇게 잘 자랐구나. 너는 이제 우리 소인국을 이끌어 갈 중요한 임무를 맡을 것이다.
대성이는 자신의 모습에 너무 놀랐습니다. 동호보다 크고 상윤이하고 겨눌 만큼 자란 자신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성아. 엄마 아들, 너무 멋지구나. 한번만 안아다오. 내 아들.
대성이는 양팔에 엄마아빠를 번쩍 안고 환하게 웃습니다.
이튿날 아침, 수정마을에 아무도 만들지 않은 눈사람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눈사람의 키와 눈사람의 덩치와 아주 흡사한 대성이는 꽁꽁 언 수정(水晶)처럼 아침 햇살에 빛났습니다. 수정은 너무나 맑고 깨끗한 돌이어서 안경알이나 광학기계에 쓰이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영안실의 장례지도사가 대성이 온 몸의 멍든 자국을 알려주자 수정마을의 착한 이웃들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동호와 상윤이는 또 한 번 ‘하늘공원’ 나들이를 했습니다. 대성이가 ‘하늘공원’의 굴뚝에 한줄기 푸른 연기로 오르는 것을 보며 동호와 상윤이는 맹세를 합니다. 동호는 경찰, 상윤이는 사회복지사가 되어 차별 없는 세상을 꼭 만들기로. 눈물에 젖은 두 주먹은 뜨겁습니다.
동화 당선소감
이화리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참 기쁘다. 무척 기쁘다. 많이 기쁘다. 자꾸 기쁘다.
수 년 전부터 신문 하단의 ‘무연고사망공고’를 눈 여겨 보았다. 그 기사를 보는 날 종일, 마음에 응달이 졌다. 홀로 세상을 뜬 싸늘한 그림자가 어룽어룽 그늘에 들어와 젖고 있었다. 끝내 하나의 나무토막에 숫자로 남은 외로운 사람들. 언젠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 스크랩을 했다.
얼마 전 교육방송에서 ‘무연고사망자’들의 생전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친구가 단 한 명뿐인 왜소증의 젊은이가 골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를 전송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코 저 먼 우주의 꼬리별처럼 이 땅에 툭,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임종을 지킨 건 빈 소주병이었다. 알 수 없는 그로 인한 가슴앓이가 깊었다.
그날 밤 <대성이>를 썼다. 쓰면서 좀 울었다. 읽다가 또 좀 울었다. 작고 작은 청년의 영면을 오래 빌었다. 보통의 누구나가 그렇듯 나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처음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기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 기쁨과 절망을 셀 수 없이 맛보며 자랄 아이들의 만만치 않은 성장에 문학이 깊은 관여를 했으면 바란다.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는 나는 독서로 무장된 맨 손이다. 소설이 화전을 일구는 일이라면 아동문학은 우물을 파는 일 같다. 아직 아무도 마시지 않은 순수한 수맥을 발견하는 일이 기도처럼 조심스러웠다. 아직 그 수량까지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감은 제 껍질이 깎여도 속살로 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스스로 제 살을 말려 더 깊은 살을 보존한다. 내가 가진 몇 겹, 생각의 옷을 벗어, 더 나은 세상의 맛이 된다면, 기꺼이 그 고통도 달게 받고 싶다.
동화 심사평
서사 무리 없는, 깊은 감동 주는 수작
홍 기 삼
전 동국대 총장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변동에 따라서 사람의 삶도 마음도 격심하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단순히 모습을 바꾸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온갖 갈등을 불러온다.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전통적 관습과 당대적 문화, 소비가치와 생산가치,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좌와 우의 충돌 등 이 모든 것은 대립과 갈등을 불러온다. 그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물론 인간존재다. 인간의 마음은 온갖 상처로 인해 황폐해지고 불의와 비극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며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믿음, 사랑, 배려와 같은 가치마저 냉소적 대상이 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서사물은 이런 황폐한 인간사를 대상으로 한다. 그것의 극복과 초월을 위한 서사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불러온 불가피성을 파헤쳐 재현하는 것에 몰두한다. 사정이 그런 즉,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는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서사양식 중에서도 인간과 자연에 대한 긍정적 태도,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랑, 공동체적 삶에 대한 모색을 통해 감동을 생산하는 장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의 유일하게 동화라 할 수 있다.
이번에 투고된 작품들 모두가 그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중에서도 다음의 몇 작품에 주목하며 자세히 읽었다. 난쟁이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과 그의 서글픈 삶을 그린 <대성이>, 전처의 아들과 새엄마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감동적으로 그린 <지구촌 보살님>, 양친을 잃은 소년이 그의 보호자인 엄마의 친구를 서서히 이해해가는 아름다운 서사 <위로>, 명장 석공 이 씨와 그의 어린 아들 솔이가 만들어가는 미륵와불 이야기 <꼬마석공 솔이>, 무량사 산문에 모여 살게 된 네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야기 <아이가 묻고 스님이 답했습니다>,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진 다문화가정 소년의 우정이야기 <시간이 필요해>, 할머니 병환을 위해 중탕집으로 가려던 고양이를 결국 풀어주는 마음 착한 소년의 이야기 <처마 밑의 고양이>, 그 밖에 <아빠하고 나하고>, <돌아온 뻐꾸기>, <부처님 발가락>, <스님과 딱따구리>, <김선달의 고양이>, <바다로 간 민들레> 등을 검토하다가 결국 <대성이>를 당선작으로 가렸다. 이 작품은 언어와 문장이 적절하고 안정적이었으며, 서사에 무리가 없고, 깊은 감동을 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평론에는 당선작을 뽑지 못했다. 대부분의 글들이 문학평론이라는 장르에 대해 기초적 이해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여 심히 안타까웠다. 평론은 문학텍스트를 분석, 또는 해석하는 논리적 양식이다. 비평가는 텍스트 내부의 비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여야 하지만 일관된 글의 논지가 텍스트 분석을 통해 진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응모된 글들은 문학작품, 이론, 각종 사상서들을 탐독하고 산만하게 기록한 독서일기의 수준이거나 아예 문학세계와는 무관한 영역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논의한 것들이어서 의아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불교신문3071호/2015년1월1일자]
첫댓글 성냥팔이소녀가 생각나네요. 도시속에 빈곤과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때에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하는 동화입니다.
결국은 갑과 을의 관계가 동화에서도 엿보이는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