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길 / 신현식
영성에 이르는 작품이 없다. 그분이 던진 첫 마디였다. 수필 이론가로 고명하신 분의 말씀이라 강한 울림을 주었다.
연초, 그분의 방문이 있었다. 몇몇 문우들과 함께 가진 간담회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이다. 모두 그분의 첫 마디에 깜짝 놀랐다. ‘영성에 이르는 글’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신령스럽거나, 하늘에 닿을 만한 깊은 탐구나, 경험이지 않던가. 그런데 작금의 수필은 그런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작가도 영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런 이론가마저 없다며 그분은 탄식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람을 넘어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껏 문우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안내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의 이름난 작가의 작품도 영성에 이르지 못한다니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런데 이름난 작가도 이르지 못한다는 그런 글을 무슨 재주로 쓴단 말인가. 질적 향상이 있어야 하는 건 지당한 말씀이지만 감당하지 못할 영역인 것 같았다. 그분은 영성에 이른 글이라며 영화 ‘사일런스’를 보고 쓴 한 여성 작가의 작품을 소개했다.
“일본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였다. 관리가 신부에게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라 한다. 밟지 않으면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신자가 죽게 된다. 절규하는 신부의 귀에 하늘로부터 '밟아라!'라는 소리가 들린다.”
작가는 집에 돌아와 그 의미는 무엇일까를 며칠이나 묵상한다. 마침내 작가는 ‘밟혀라!’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만원 버스에서 발등을 조금만 밟혀도 죽기 살기로 다투고, 남을 밟고 올라가야 출세하는 세상에 오늘도 예수님은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왔느니라. 너희도 나처럼….”
예의 그 작품을 본 순간, 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문우들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안하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자’는 창출화의 위치가 잘못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찜찜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분에 의해 말끔히 정리 되었다. 창출화創出化는 의미화보다 분명 상위의 개념이었다.
시나 소설은 허구가 문학적 장치이다. 수필은 진솔하게 써야 하기에 별도의 장치를 하지 않으면 문학의 향이 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체험을 그대로 재현해서는 졸작을 면치 못하기에 장치를 해야 한다.
장치의 기본은 극화劇化다. 글의 기본은 재미이다. 긴장과 흥미가 있으면 재미가 있어 가독성은 높아진다. 아무리 좋은 뜻이 있어도 읽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극화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의 이야기일수록 울림을 준다. 화소를 늘려 설득력을 높이고, 대상과 관계를 짓는 입체적 구성을 하면 긴장되고 흥미가 배가된다.
다음은 주제화主題化다. 어떤 글이든 주제가 선명하지 않으면 죽은 글이나 마찬가지다. 체험 위주의 글은 사건만 남고 주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결미에 일반화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다음은 형상화形象化다. 묘사와 비유를 통해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추상적, 관념적 문장보다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하고. 나아가 주제까지 그림으로 그린다면 독자의 뇌리에 오래도록 기억된다.
다음은 창출화創出化다.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낯설게 하기이다. 새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창출화는 신선한 소재를 찾아 남들과 다른 의미부여,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의미화意味化다. 작품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 갈래의 형이 있는데, 일체형, 돌출형, 치환형, 제목형이 있다. 의미화하려면 대상을 분석하여 의미를 찾고 그것을 키우거나 다른 것과 병합하거나 대상을 바꿔야 한다.
그분이 제시한 작품의 핵심은 '밟아라'를 '밟혀라'로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창출화 과정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실제 들었던 말을 다르게 해석한 것이지 않은가. 그것이 영성에 이른다니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
새로운 해석은 의미화보다는 상위의 개념이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깊고 넓은 상상에 닿아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었다. 그것을 여태 간과했고, 때문에 찜찜하게 여겼던 것이다. 잘못을 알고 나니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분은 수필이야말로 영성에 이르는 문학 장르라고 했다. 수필이 시나 소설이 닿을 수 없는 ‘영성’에 이를 수 있으니 최상의 문학 장르라는 것이다. 수생 수사하시는 분을 또 만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영성’이든 ‘해석’이든 독자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밟혀라!’로 들은 것은 새로운 해석으로 이해되는데 그분은 영성에 닿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만큼의 고뇌가 깃든 작품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고 생각되었다.
그분은 영성을 얻으려면 명상과 묵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교인이 아니라 그런지 그 과정을 몰입이라 여기고 있다. 몰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에 질문을 해야 한다. 과학이나 문학이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뉴턴’이나 ‘갈릴레오’도 질문을 던져 답을 얻은 것이다.
작가가 던진 질문은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밟아라!’고 들린 이유는 무엇일까,라며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하여 ‘죽기 살기로 다투고 남을 밟고 출세하는 세상’이라는 답을 얻었다. ‘영성’도 결코 넘지 못할 벽은 아닌 것 같다.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 수필 쓰기라고 한다. 소재가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이 영성에 이르면 오죽 좋겠는가. 의미화. 형상화라도 해보자. 그 정도만 되어도 읽는 사람에 따라 영성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런 글을 쓰려면 대상을 분석하고 확대하고 바꾸고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몰입으로 이룰 수 있다.
수필, 참 어렵다. 어려우니 해볼 만하다. 또 여생의 목표로 삼을 만하다.
첫댓글 교수님 감사합니다.
숙제 받은 마음입니다.
안동역의 진성도 오래도록 하니 반짝이는 별이 되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오래하면 경지에 오릅니다.
영성에 이르는 문학 장르~~ 참 고차원 적인 용어입니다~^^ 형상화도 의미화도 순간 번쩍이는 내용이 나타난다면 '영성'에 다가가는 길목으로 다가가지 않을까요~^^ 그 의미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남의 글도 많이 읽어야겠지요~ 노력과 희생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수고하셨니다 ~^^
문학적 영성, 읽고 난 뒤에 감동이 강렬해서 세상을 보는 데 영향을 주는 글. 그렇게 저는 이해합니다.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한글을 익힌 기구한 할머니의 시처럼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왜 그럴까?' 질문을 하는 것이다.
질문을 하면 좋은 글도 쓸 수 있지만, 소재도 잘 보인다.
질문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관심을 가졌을 때에만 보인다.
네 선생님. 생각해보면, 스쳐가는 일상 중에 눈에 잡히는 것 또는 마음에 걸려드는 것들이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들 속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담겨있었기에 필연적으로 잡혀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들이 왜 떠나지않고 맴도는걸까를 혼자 묻고 답하다가 글감이 되곤 했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자주 눈에 띄기를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