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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이사온 후 많은 분들이 저희 집을 다녀갔습니다.
3년 동안은 세를 얻어놓은 집이 있기에 친지들, 친구들,
특히 수녀님들이 제주도에 오시면 그집에 묵으시고
아내는 경우에 따라 가이드겸 기사역할도 했습니다.
이후에 오신 손님들은 시간이 맞으면 가이드를 하고
식사한끼 대접하면서 오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서울 삼성아파트(16구역) 자매님들 방문
(셋집시절)
새집 입주 후 첫 방문팀
2015. 12
딸이 교사로 있는 학교학생들 8명이
2005년 12월 나의 축일시기에 찾아와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가이드 역할을 했습니다.
나를 위한 공연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 학생들이 그때의 추억을 계속 이야기하며
또 오고 싶다고 한답니다.
부산지점 근무할 때 이웃들 방문
(2016.6.3)
제자 방문
2017.12.28
서울 대자와 대녀 부부 방문
(2018.7.25)
여주에서 대자 라파엘부부 방문
(2019.3.28)
형, 형수, 조카 방문
5.23~27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5형제 중 누님 3분도 최근 5 ~6년 사이에 모두 돌아가셔서
이제 형님과 저 둘만이 남았습니다.
형과는 10살 차이기에 형은 80대로 접어들었지요.
그런 형이 형수와 조카딸과 함께 1주일 후 제주에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다가 탬버린 생각이 났습니다.
형은 연극도 하시고 노래도 잘하시기에
노래방 기기를 틀고 탬버린을 들고 도우미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홈쇼핑을 통해 탬버린을 구입하고
매일 조금씩 연주 연습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충 흔들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영상을 보니 탬버린도 예술이었습니다.
이왕 도우미할 바에는 잘 해보자는 심정으로 따라해보지만
손목도 아프고 팔도 아픈데다가 박자도 잘 맞지 않았지만
문턱효과를 떠올리면서 매일 열심히 연습했지요.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노래방 기기도 점검을 하여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서울 딸 집에 가 있었기에
첫 날은 서귀포 숙소를 찾아가 1박을 하고
다음 날은 정난주 묘소, 추사 기념관 방문, 탄산온천을 하고
우리집에 돌아와 잠깐 쉬다가 헤어졌습니다.
셋째 날은 아내가 서울에서 돌아오는 날이기에 각자 시간을 갖고
다음 날(넷째 날) 저희 집에 모실 계획이었는데,
조카가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다시 서귀포로 넘어가서
형님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고 즐겼습니다.
다음 날은 서울로 돌아가시는 날이라
우리집에 들러 노래방 할 시간을 갖지 못해
그 동안 준비해온 행사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노래는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오래간만에 형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함께 하면서
옛 추억에 잠기기도하고 인생이야기를 나눈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탬버린 실력발휘는 좀 더 연습을 한 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지요.
마태오 부부 방문(5.26)
손녀 요안나 방문
7.19~21
딸 사위와 함께 요안나가 제주에 왔습니다.
우리집에서 2박 3일, 제주시 시댁에서 2박 3일을 보냈습니다.
장마철인데도 다행히 날씨가 맑아서 바닷가 해변에도 가고
집 마당에 풀장을 만들어 함께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틀 간은 물에 들어가기 싫어서 울더니
가는 날은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즐겁게 풀장에서 놀았습니다.
처음 이틀은 요안나 덕분에 내가 물놀이를 잘 했고,
떠난 후에도 철거하기가 아쉬워 그대로 둔채
밭에서 일하다 더우면 하루에도 수 차례 들어가
물놀이를 하면 더위가 가십니다.
풀장은 요안나가 할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다 요안나~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거라.
카페친구 미국에서 방문
2022.9.27
오늘 무우시래기 친구가 미국에서 우리집을 방문합니다.
15년 전 카페에 올린 우리집 정자에 달린 시래기를 보고
먹고싶다는 댓글을 읽고 '보내드릴까요?' 했더니
고맙다는 댓글에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미국주소였지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여주에도 방문했던 시래기 친구가 8월 10일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숙소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지요.
점심을 함께하고 오후에는 우리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람있는 시간을 보낼까 스케쥴을 짜면서
먼곳에서 찾아오는 친구를 맞는 설레임으로 맞는 가을 새벽입니다.
오늘 미국에서 온 시래기 친구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일행(대녀)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기에 우리부부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한나절(6시간) 남짓되었습니다.
11시 20분 경 수월봉에서 만났습니다.
친구 일행이 먼저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다가 나를 반겼습니다.
친구 부부와 대녀3분 등 5명이 동행하고 있었고,
여행일정의 모든 것은 대녀들이 수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오게된 계기는 항공사에서 주최한 사진콘테스트에 출품한 작품이
선정되어 항공티켓 2매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지역에 갈까 생각하다가 한국을 오게되었답니다.
모르던 사실이었는데 거의 사진작가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나머지 궁금한 사항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천천히 나누기로하고
바로 수월봉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제주에 오기 1년 전부터 제주에 대한 공부를 했기에
비록 자격증은 없어도 웬만한 가이드보다 설명을 잘 한다는 칭찬을
여러 번 들은 실력으로 오늘도 가이드역할을 했습니다.
▼ 수월봉(11시 20분)
옛날 고산리에 수월이라는 처녀와 녹고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수월봉 절벽에 자생하는
오갈피를 캐어 약을 달여 먹이기로 하였다.
오갈피를 캐러 내려갔던 수월은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녹고는 슬픔에 겨워 한없이 울었으며 그 눈물이 샘이 되어 흘렀다.
그 이후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불렀고 남매의 효심을 기려
이 언덕을 "녹고물오름"이라 불렀다.
▼ 수월봉 지질트레일
태풍의 영향인지 지질트레일 중간에 통행금지를 하고 있어
조금 걷다 모슬포 식당으로 향했다.
친구부부는 우리차에 옮겨타고 2대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아내가 해안길로 가자고 해서 우리는 해안도로로 천천히 드라이브했다.
한참 가다보니 재두루미떼가 바닷가에 모여있는 것을 본 친구가
차를 세우라고 하더니 사진을 찍겠다는 것이다.
사진작가의 본능이 나타난 것이다.
한 동안 찍고 있는데 돌고래 무리가 미국에서 온 친구부부를 축하하듯이
바로 눈 앞에서 천천히 멋진 자태를 보이며 군무를 했다.
자주 나타난다고 하지만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오늘따라 유난히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서 가다가 한 번 되돌아서 오면서
오랜시간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친구부부는 큰 선물을 받았다며 즐거워했지만
식당에 도착하니 먼저 온 일행이 도착해서 전화를 여러번 했다고
불평?을 했지만 사연을 듣고는 같이 축하해주었다.
고등어 세트(회, 튀김, 조림, 회국수, 지리)를 주문했는데
미국에서 먹어본 고등어와는 전혀다르게 비리지도 않고 신선하다며
일행 모두 만족해 하였고 과식을 했다고 했다.
저녁식를 하기로 계획했는데 취소하고 우리집에서
좀 더 시간을 갖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모슬포에서 점심식사(12시 30분)
▼ 자구내 포구(14시 30분)
자구내 포구에서 반건조오징어를 샀다.
처음에는 맥주안주로 몇 마리를 사려고했는데
시래기친구 마리아가 오징어를 무척좋아한다고 남편이 귀뜸해주었다.
관절염으로 약간 고생은 하지만 치아만은 아직고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마리 한 묶음을 더 샀다.
나도 예전에는 오징어를 무척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치아가 좋지않아 절제하고 있는데 친구가 부럽다.
차귀도(遮歸島)
중국 송나라 시절, 제주섬은 풍수지리가 출중하여
유능한 인재가 많이 태어나리란 점괘가 나왔다.
이를 시기한 중국 조정은 압승술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의 지맥과 혈맥을 끊으라는 명을 내린다.
제주에 온 호종단은 여기저기에서 지맥과 수맥을 끊곤 산방산에 도착한다.
산방산 아래의 와룡 형상이 바로 왕의 기운이 배어 있는 명당이라 여긴 그는,
예리한 무쇠침으로 용의 가슴임직한 곳을 찌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구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은 그만 화산과 같은 피를 토하며 명을 마친다.
와룡의 몸에서 솟구치던 피는 원혼을 간직한 채 바위로 굳어져,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다.
제주 도처에서 혈맥을 끓은 호종단의 만행을 뒤늦게 안
한라산신령이 매로 변장하여 날아가,
호종단 일행의 탄 배를 차귀도 주변 바다에서 난파시켰단다.
차귀도(遮歸島)는 호종단의 귀국을 차단한 섬이라는 의미이다.
용수리 해안(15시 10분)
▼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15시 30분)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 신부 일행은 8월 31일 상해를 출발, 조선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28일간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것을 기념하고
조선 땅인 제주에서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첫미사의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것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은 대지 4,300평, 건평 168평의 2층 건물로써
2004년 10월 24일 착공하여 개관하게 되었다.
우리집 방문(16시 ~18시)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를 따라마시면서 그 동안 궁금했던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집은 벌써 3번 방문했는데, 우리는 친구집에 아직 방문을 하지못했다.
방문할 것을 기약하며 우리집 장소를 옮겨가면서(정자-데크-거실) 대화한 후
저녁노을이 멋진 이곳에서 사진을 찍기를 권했지만
피곤해서 일찍 숙소에서 쉬고 싶다고해서 아쉽지만 노을이 지기전에 헤어졌다.
우리에게 손수 만들어 가지고 온 선물을 전달받았다.
친구는 이틀 더 제주에 머문후 서울로 간다고 함.
아쉽게도 짧은 만남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아름다운 우정을 약속하며~~
이도행 신부님과 황태순 모니카 부부
4.19
황태순 모니카 부부와 본당 신부님 두 분 수녀님 두 분
그리고 사목위원들이 제주에 방문하셨다.
일정 중에 우리 집 근처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에서
미사를 드리신다고 하여 찾아가 만나뵙고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시아노 부부와 보낸 2박 3일
카시아노씨 가족은 회사를 퇴직하고 여주 도전리에서
2막 인생을 시작할 즈음 만난 가족이다.
스승예수 제자수녀회 성당으로 매일 새벽미사를 다닐 때,
매일 부모와 함께 다섯 명의 아이들이 미사에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아 우렁차게 성가를 불렀다.
그 가족을 매일 보는 것이 산골에서 맞이한
놀라운 광경이며 행복한 시간이었다.
스승예수 수녀회 새벽미사에는 많은 주민이 참례했다.
카시아노 가족(7명)은 우리보다 10년 먼저 이 동네에 이사를 왔는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 속에 그 집 하나만 있었다.
승용차로는 가기 힘든 산 속 길을 10분 이상 차를 타고 들어가면
손수 판 연못도 있고 손수 지은 소박한 집,
그리고 동물들(흑염소, 양, 닭 등)을 기르고 있었다.
그 후 카시아노 댁을 방문하기도 하고
우리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2007.7.25
매일 일곱 식구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꾀고리 같은 목소리로 성가를 불러
미사 참례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감동시켰던 우리 마을의 마스코트
카시아노, 마틸다 가족이 오늘 이곳 도전리를 떠났습니다.
멀리 미국으로...
그런데 우연히 도전리 생각을 하다가(가끔 도전리 생각을 하지요)
현재도 도전리에 살고 있는 아타나시오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 형제도 아이가 5명으로 카시아노씨 가족과 친했지요.
그래서 작년 9월 아타나시오 형제에게
카시아노씨 근황을 물어보니 몇 년전 까지는 연락을 했는데
그 동안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서
몇 년 전 통화했던 전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번이 바뀌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카톡을 했는데 카시아노 형제가 연락이 되었고
장성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고 근황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진 설명과 함께
올 1월에 결혼한 야고보 사진이에요
왼쪽부터 막내 필립보,레오,카시아노,큰 며느리 로사,야고보,마틸다,
리디아,레오 아내 빅토리아와 딸 에린,그리고 요안나예요.
지금 늘어난 저희가족 모두입니다.
1일차(6월 7일)
오늘 정기검진 결과 상담차 병원에 들린 후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부부가 탄 비행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고
16년 만의 만남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혹시나 얼굴을 기억 못할까 문 두 곳을 아내와 나누어 맡고
나오는 승객들 하나 하나 보면서 기다린지 20여분 후(2시30분)
드디어 아내가 보고있던 문으로 두 분이 모습을 나타냈고
나도 발견하고는 달려갔지만 아내가 먼저 두 분을 포옹하며
반겼고 이어서 나도 같이 반갑게 맞이했다.
두 분 모두 건강한 모습을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먼 이국 땅에서 5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16년간 거의 모든 시간과 세월을 헌신한 부모에게~
이 후 중문 대포주상절리로 차를 몰았다.
40여분 동안 차 안에서 그 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주변공사 중이라
주차장과 입장료를 받지않고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
산책로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바닷가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 대포주상절리[柱狀節理]
마그마의 냉각과 응고에 따른 부피 수축에 의해 생기는, 다각형 기둥 모양의 금.
암석이 결과적으로 다각형 기둥 모양이 열주해 있는 듯 보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 형제섬(바위)
그 동안 거의 밀물일 때 바닷물에 거의 잠긴 것을 보았기에
형제바위로 알고 있었지만
바닷물이 빠져나간 형제바위는 정말 섬모습을 보였다.
파란 잔디처럼 풀이 깔려있는 모습을 보고 이제는 형제섬이라고도 불러야겠다.
밀물일 때는 형제바위, 썰물일 때는 형제섬으로~
▼ 모슬포에서 저녁식사
고등어 세트와 자리회
고등어회가 이처럼 싱싱하고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부부는 몇 번이고 감탄을 했다.
아내가 자리를 먹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하여
자리회 반접시를 업소 사장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함께 먹었다.
포만감을 느껴 코스로 나오는 순서 중 고등어 조림과 탕은
싸달라고 부탁하여 집으로 가지고 왔다.
내일 아침 식사때 먹기로 하고.
▼ 우리 집에서
숙소에 같이 가 짐을 풀고 우리집으로 와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카시아노 부부가 선물로 가져 온 수반과 돼지머리를 받고
우리는 부부에게 고무신을 선물했다.
이후 5리터 생맥주통을 개봉하고 생맥주를 먹으면서
그 동안 궁금했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3차 국내성지순례 시 카시아노씨 부부를 만날 수도 있었는데
한국에 와 있는 사실을 몰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도 나누고
167곳 성지를 마친 사실을 말하고 순례책자를 보여주었다.
아내가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성지순례 책자를 가지고 와서
카시아노 부부에게 전달하며 내일 제주 성지에 가면
스탬프를 찍으라고 권하며 전달했다.(이번에 3개를 찍을 수 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기에 아쉽지만 헤어지고
다음날 아침 9시에 우리집에서 아침을 먹자고 약속하고
1일차 여행을 마무리 했다.
2일차(6월 8일)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4시 경 잠이 깨어 컴퓨터를 켜고
오늘의 기상상태를 보니 새벽 5시 부터 7시 까지 비가 조금 온다는 예보가 있다.
씨마늘을 마당에 널어놓았기에 걱정이 되어 밖을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얼른 옷을 입고 창고에 들어가 갑바 천막을 꺼내서 덮었다.
덮고나자 빗줄기가 조금 더 세졌지만 비를 맞히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고 차 한잔을 마시고 10시 조금 넘어서
1차 행선지인 새미은총의 동산으로 향했다.
부부가 몇 십년 전 제주에 다녀갔을 때는 와 본 적이 없기에
천천히 산책하면서 묵상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산책길에 오디, 산딸기, 버찌도 맛보면서~~
▼새미 은총의 동산
새미 은총의 동산은
천주교 제주교구 제3대 교구장이었던 김창렬(金昌烈) 바오로 주교가
‘신자들의 공경과 심신을 고취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제주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
이시돌 목장의 금악 본당 임피제(McGlinch) 신부와
지금의 장소가 이상적이라는 의견 일치를 보아 1991년 10월 28일에
축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새미 은총의 동산’이 조성되었다.
'새미 은총의 동산'의 옛 이름은 '구 삼뫼소 은총의 동산'인데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변경하였다.
새미(SAEMI)의 영문표기는
[Sanctus: 거룩한]
[Anima:영혼]
[Evangelium:복음]
[Mediator:중개자]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성모동굴 앞을 지나는데 길옆에 설치된 돌담에서
독사뱀 한마리를 발견해 그를 보고 있는데
금악성당에서 12시 삼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성모동굴 앞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삼종기도를 바쳤다.
성지순례 책자에 순례도장을 찍고 시간을 보니
예정시간보다 늦어졌지만 아내가 테쉬폰은 보고 가자고 했다.
가는 도중 목장 풀밭에서 풀을 뜯고있는 말들을 보고 있는데
말 한마리가 벌러덩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카시아노 형제가 말이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하는데
아마도 죽은 것 같다고 하였고 모두 동의하였다.
이시돌 목장 '우유부단' 업소에 도착하여 그 사실을 알리자
말이 너무 편안한 상태인 때는 종종 그렇게 누워있는다는 사실을 들었다.
'우유부단'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씩 사서 먹고
테쉬폰 앞에서 사진을 찍고 둘러본 후
추사적거지와 기념관으로 향했다.
아까 누워있던 말이 궁금해 말들을 쳐다보니
정말 누워있는 말이 없었다.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풀을 뜯고 있었다.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말도 너무 편안하면 누워있는다는 것과
혼자서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 추사 김정희 기념관, 적거지
감자 창고라고 제주도 사람들이 생각한 추사관은 담박한 건물이다.
군더더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퓨어한 건물.
세한도 속의 집을 그대로 표방한 작품이다.
세한도(歲寒圖)
국보(1974.12.31 지정)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
위리안치라는 가장 가혹한 유배형에 처해진 추사는 외로움과 질병,
그리고 유배 중에 아내의 부고를 접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인의 도움 또한 없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추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며 역관이었던 이상적의 도움으로
추사는 중국에서 나온 서책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세한도는 바로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1844년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의 왼편에 쓴 발문에서 추사는 공자의 논어에서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라는 글을 인용
자신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자신을 대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는
이상적에 대한 사제지정을 표현했다.
그림 끝에 작화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과
청나라 시대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아내가 세한도가 그려진 부채를 마틸다 자매께 선물했다.
추사는 대정에 유배되어 8년 3개월간 귀양살이를 했다.
전후 세 차례 집을 옮겼는데 여기는 강도순의 집터에
그가 처음 살던 송계순이 집 모양을 편지에서 말한 대로 복원한 것이다.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위리안치'였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의 가시나무 대개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집의 사면을 둘러
보수주인(감호하는 주인)만 출입이 가능했다
▼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황사영 알렉시오 부인]묘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황사영 부인으로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신유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황사영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난주 마리아 묘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위 사진 오른쪽에 비치된 순례도장을 찍고 점심식사하러 출발했다.
모슬포 항구식당에서 자리회 정식과 우럭 매운탕을 먹고
저녁에 안주로 먹을 도미회를 떠서 자동차에 싣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 수월봉
수월봉 정상에서 본 차귀도(왼쪽)와
오른쪽 해안가로 이어지는 올래길 12코스이자 김대건 순례길인
엉알해안산책로(수월봉지질트레일)
그리고 오른쪽 봉긋 솟아오른 오름이 당산(봉)이다.
▼차귀도(자구내 포구)
차귀도는 옛날 중국 호종단이 제주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여 제주의 지맥과 수맥을 끊고 중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한라산의 수호신이 매로 변하여 갑자기 폭풍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다.
배가 돌아가는 것을 차단했다고 해서
섬의 이름이 차귀도(遮歸島)가 되었다고 한다.
맨왼쪽 매섬, 그 옆 2개 봉우리는 지실이(감자)섬, 그 앞 장군바위(잘 보이지 않음),
등대가 있는 죽도(김대건 신부님 일행이 표착한 곳), 맨 오른쪽이 와도(누운섬)
이 모두를 합쳐서 차귀도라고 함
▼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
기도하기위해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 성당에 들렀는데
평화방송에서 취재차 와서 스테인드 그라스등을 촬영하고 있었다.
기념관과 라파엘호 등을 둘러보고 성지순례 도장을 찍고
근처에 있는 우리집으로 향했다.
모슬포에서 떠온 도미회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진 후 2일차 여행을 마무리 했다.
3일차(6월9일)
아침식사 후 차 한잔씩 하고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우리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밭에서 상추를 따고, 잔잔한 꽃의 수국을 좋아하기에
가지를 꺾어서 전달했다. 여주 집에 가서 삽목을 하라고~~
신창성당을 향해 김대건 신부 해안도로로 가면서
포토포인트에 잠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김포행 13시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인장마을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기위해 시내로 출발했다.(10시45분)
시내에 도착하니 점심먹을 시간이 부족할 듯 하여
바로 공항으로 가서 체크인을 한 후 공항에 있는 음식점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진 후 우리는 치과에 들러 임플란트 치아를 심고
성체성혈 대축일 꽃꽂이 꽃을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조금 고달팠지만 즐겁고 행복한 만남이었다.
두 분 수녀님과 보낸 한나절
2024. 10.11
오늘 휴가차 제주에 오신 두 분 수녀님과 만났습니다.
엘리사벳 수녀님과 고로나 수녀님입니다.
며칠 전 오셨지만 여러 사정상 오늘에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숙소가 표선이라 우리집에서는 자동차로 2시간 걸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서귀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내일 가신다고 하여 오늘 오후 정도 즉 한나절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효율적으로 보낼 계획을 차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대충 새미은총의 동산, 점심식사, 추사관(적거지), 정난주 마리아 묘,
수월봉, 김대건 신부 표착관, 우리 집 방문으로 생각했습니다.
요즘 해가 짧아져 빠뜻한 일정이지만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0시 30분 경 외돌개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수녀님이 아이스크림을 사 주셔서
차 안에서 함께 먹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차 안에서 여주 도전리에서 10년 간 함께 했던 지난 이야기,
그 후 9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지냈던 수녀님들의 근황,
여주 도전리 마을의 소식 등을 이야기 하고나니
11시 경 새미은총의 동산(이시돌 목장)에 도착했습니다.
두 분 수녀님 모두 처음 방문하신다고 하여 천천히
이곳 저곳을 산책하며 묵상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 새미은총의 동산
▼ 테시폰
국가등록문화재로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소재 성이시돌목장 내 테시폰식 주택.
1960년대 초 패트릭 제임슨 맥그린치(한국 이름 임피제) 신부에 의해
국내 최초로 제주에 도입된 건축물.
▼ 점심식사(13시)
점심을 모슬포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수녀님 한 분이 생선은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메뉴를 무엇으로 할 까 고민하면서 모슬포로 가는 도중에
짝궁인 바울리나가 제안을 하여
우리가 자주 고기를 사러 들리는 집에서 불고기로 하기로 했습니다.
조금 늦은 점심이라 정말로 혀로 핥은 듯이 냄비를
비우고 든든하게 배를 채웠습니다.
물론 식사 중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만큼 오래고 친한 친구인 듯 했습니다.
▼ 김정희 추사관 및 적거지(14시 30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김정희(金正喜)가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 정난주 마리아 묘(15시)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정약현의 맏딸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조카고,
천주교 103 성인 중의 한분인 정하상의 누이이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66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으로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을 받고 숨진다.
이때 그의 나이가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 이윤혜는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를 각각 유배된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마리아는
관비라는 쓰라린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대정 관노로 유배된 그녀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정마리아는 김 씨 자손들에게
‘한양 유모, 한양 할머니’로 불리며,
점차 자유로운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관비인지라 죽을 때까지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1838년에 선종하여 대정성지에 묻혀 있다.
▼ 수월봉(15시 30분)
▼ 자구내 포구(15시 50분)
차귀도(遮歸島)
중국 송나라 시절, 제주섬은 풍수지리가 출중하여
유능한 인재가 많이 태어나리란 점괘가 나왔다.
이를 시기한 중국 조정은 압승술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의 지맥과 혈맥을 끊으라는 명을 내린다.
제주에 온 호종단은 여기저기에서 지맥과 수맥을 끊곤 산방산에 도착한다.
산방산 아래의 와룡 형상이 바로 왕의 기운이 배어 있는 명당이라 여긴 그는,
예리한 무쇠침으로 용의 가슴임직한 곳을 찌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구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은 그만 화산과 같은 피를 토하며 명을 마친다.
와룡의 몸에서 솟구치던 피는 원혼을 간직한 채 바위로 굳어져,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다.
제주 도처에서 혈맥을 끓은 호종단의 만행을 뒤늦게 안
한라산신령이 매로 변장하여 날아가,
호종단 일행의 탄 배를 차귀도 주변 바다에서 난파시켰단다.
차귀도(遮歸島)는 호종단의 귀국을 차단한 섬이라는 의미이다.
▼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16시)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 신부 일행은 8월 31일 상해를 출발, 조선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28일간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것을 기념하고
조선 땅인 제주에서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첫미사의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것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은 대지 4,300평, 건평 168평의 2층 건물로써
2004년 10월 24일 착공하여 개관하게 되었다.
▼ 우리집 방문(16시 40 ~17시)
편안한 마음으로 식혜 한 잔씩 마시면서
집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엘리사벳 수녀님이 가지고 오신 책 몇 권과
여주에서 직접 가지고 오신 밤을 배낭에서 꺼내셨다.
이 무거운 것을 메고 다니신 것이다.
밤은 며칠 되었기에 벌레가 날 수 있으니 빨리 먹으라고 하셨다.
저희는 드릴 것이 없어 집에 있는 강정 몇 개와 방울도마토를 드리고
갈길이 멀다고 재촉하시는 수녀님들을 모시고
서귀포 터미널까지 가서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아내 바울리나가 숙소인 표선까지 모시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가야하는데 우리가 너무 힘드니
이곳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다고 완강히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 헤어짐(서귀포 버스 터미널) 18시
표선행 버스를 기다리며
한 시간 걸려 집에 7시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있는데
수녀님들도 잘 도착하셨다고 안부를 전해오셨다.
저녁을 먹고나서 찍은 사진을 수녀님들께 보내드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쉽게도 짧은 만남이었지만
은혜롭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기도 속에 아름다운 우정을 기억하며~~
조카 가족과 함께
2024. 11.2
제주에 잠깐 방문한 조카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카는 1박 2일간 회사업무를 마치고
2박 3일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점심부터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중에서 원하는 곳을 안내했습니다.
조카 가족은 모두 가톨릭 신자입니다.
손자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나는 입학선물로 약간의 용돈도 준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