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성 :
p156 그러나 (인간 의지에 대한 ) 자유론 또는 우연론에 따르면 이 연관은 엇어지며, 어느 누구도 아주 무의식적이고 우발적인 행동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다. ~ 즉 행동이 도덕성과 종교 따위의 규칙과 상반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p157 따라서 사람이 징벌과 보복의 대상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유의 가설에 따르면, 사람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도 마치 태어난 첫 순간처럼 순진무구하며, 사람의 성격은 자신의 행동과 전혀 무관하다. ~ 그러나 자유론 또는 우연론에 따르면, 그런 행동은 결코 정확한 증거가 아니며, 결과적으로 범죄적이지도 않다.
p158 이 추론을 되돌아보면, 나는 완전한 승리를 의심할 수 없다.
내 용 :
흄에 대해 가장 최근에 기억나는 것은 예술철학에서 나왔던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술철학이라는 수업을 받으면서 철학자들이 예술에까지 생각하고 이론을 펼친다는 것을 보고 광범위하게 철학이 나온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술철학에서의 흄을 생각하며 책을 폈는데.... 참으로 난감했다. 말들이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지... 흄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 책에서 흄은 예술이 아닌 정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념을 내말로 쉽게 생각한다면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정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에 나오는 자유와 관련된 부분에 나는 보다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부분에 앞서 내가 본 흄은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사람이다. 물론 그마만큼 자신이 능력 있다는 이야기겠지만, 자기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승리를 의심할 수 없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이 부분을 읽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은 좋지만, 이런 부분은 도리어 역효과를 내는 거란 생각이 든다. 흄의 자신감에 대한 나의 질투(?), 시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흄의 생각에 동의 할 수 없다. 흄은 ‘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는 식이다. 현실에서 이런 생각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죄지은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는 것일까? 나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생각이 더 맞는 것 같다.
흄의 입장을 보면, 사람의 성격은 자신의 행동과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무관하다니... 억지주장 같다. 솔직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겪는데,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투 아닌가? 이것저것 다른 사람들을 잘 챙겨주고 하는 사람을 보면, 성격이 세심하구나, 행동이 좀 과격하다거나 하면 터프하구나, 괴팍하거나 하면서 지레짐작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중에 보면 이러한 지레짐작이 들어맞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어찌 이들 사이가 무관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흄도 사람들을 많이 겪어 봤을 텐데 이런 연관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흄이 말한 부분에서 화가 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도 마치 태어난 첫 순간처럼 순진무구하다는 부분....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흄에 대한 나의 감정들이 격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된다.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게서 순진무구함을 느낀다고? 그것도 태어난 첫 순간의 순진무구함이라니...... 무슨 이런 비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탄생이라는 경이롭고 신성한 순진함에 어디 최악의 범죄자를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일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했던가? 흄은 범죄로부터의 피해자 입장은 생각도 않는 것일까? 사람이라는 그 자체를 착하게 보려하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범죄를 저지른 자, 악한 행동을 하는 자에게 이런 비유는 사치라고 생각된다.
흄에게서는 성선설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도 같다. 악한행동들을 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도 않고, 그저 그건 행동이었을 뿐이라고.. 사람들을 옹호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래도 성선설은 사람들 모두가 선한 것은 아니라고, 다른 요소에 의해 악하게도 될 수 있으니 그들이 선하게끔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흄처럼 융통성이 없진 않다.
또한 여기서는 비난의 정도에 대해서도 논해봐야 할 것 같다.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에 받는 비난들 말이다.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악을 저질렀다고 할 때 가벼운 비난을 받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모르고 한 행동의 원인은 순간적이며, 그냥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란다. 여러모로 봐도 흄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 같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자꾸 든다. 모르고, 우발적으로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그 비난의 정도가 약해질 수는 있다고 본다. 실수였을 테니깐.. 몰랐을 테니깐... 하지만, 그것이 그냥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은 말이 될까? 아무리 실수였다고 할지라도, 그 악한행동의 정도가 있을 텐데 흄은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우발적이었는지, 계획적이었는지 만을 따질 뿐이다.
그냥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실수로,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쳤다고 하자. 그래서 그 사람이 죽었다고 했을 때, 이 때도 우리는 그저 그 사람이 모르고 한 행동이니깐 그냥 약간의 비난으로만 끝나야 할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악한 행동으로 사람을 죽인 행동과 자신도 모르게 악한 행동으로 사람이 다친 행동을 같게 봐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흄이 말하는 가벼운 비난은 무엇이라는 걸까?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사람을 비난하고 끝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계획해놓고 실수였다고 우기면 어떡할 것인가? 사람을 믿어야 하지만 만일의 상황이란 게 있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대책의 제시는 전혀 없다. 그래놓고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다니... 자신의 이론을 펼칠 때는 그 이론의 예외의 상황에 대한 대책도 당연히 준비해놔야 하는 것 아닐까? 무책임한 이론이다.
모든 죄를 뉘우침이라는 말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뉘우침... 뉘우침이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일까? 어떻게 믿고 죄를 일소한다는 것일까?
‘ 친절한 금자씨 ’ 라는 영화를 보면 금자씨는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행동을 한다. 자신의 죄를 다 뉘우친 것처럼 기도도 열심히 하고, 물의도 일으키지 않고 모범수로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교도소를 나오는 순간 그녀의 태도는 돌변하게 된다. 그녀가 모범수였던 것은 죄를 뉘우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닌 단지 연기였을 뿐이다. 이러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적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도 이런 연기에 다 속아 넘어 가야 하는 것일까? 이 경우에 대한 대책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실망의 연속이다.
나는 그렇다. 죄는 죄로 남는 것이다. 그것이 실수였든 계획이었든 결과는 분명히 남는다. 악한 행동이었고, 죄라는 것이 말이다. 이런 악한 행동,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설사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할지라도 피해자로써는 그 행동에 대한 충격을 잊진 못할 것이다. 또한 이들이 악한 행동을 용서하지 못해서 보복을 통해 또 다른 죄를 낳을 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 된다. 악한행동을 해놓고 그저 실수였다고, 나는 뉘우쳤다고 하면서 죄를 일소하려는 행동을 보면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행동이 맞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지라도 이들의 죄를 무마시키려고 하는 행동보다는 차라리 이런 악순환의 반복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죄를 줄이고, 없애려고 하는 흄의 생각이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지나치단 생각이 든다. 그저 회피하는 것에 대해 정당화 시키려는 입장 같단 생각이 든다. 흄에 대해 나의 생각이 과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죄가 있다면 그 죄를 지은 사람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 단어 수 : 1026 >
구성 ~
1) 145 우리는 이제 직접 정념, 즉 선이나 악 그리고 고통이나 쾌락 등에서 즉각 발생하는 인상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종류의 정념은 욕구와 혐오, 비탄과 기쁨, 희망과 두려움 등이다.
2) 145 바라건데 내가 의미하는 의지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우리 신체의 새로운 동작을 유발하거나 정신의 지각을 창출할 때,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는 내부 인상일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3) 146 보편적으로 인정되듯이 외부 물체의 작용은 필연적이며, 그리고 외부 물체들 사이의 운동 전달과 인력 그리고 상호 응집력 등에서 (상반되는 가능성의) 무차별성이나 자유는 조금도 없다.
4) 146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필연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는 항상적 합일과 정신의 추정 등이다.
5) 147 우리가 물질의 각 부분을 설명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부분들의 응집력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원리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6) 148 인류에게는 공통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상이한 민족과 개인에게 고유한 성격들이 있다. 이런 성격들에 대한 지식의 기초는 그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의 제일성에 대한 관찰이고, 이 제일성이 필연성의 참된 본질을 형성한다.
7) 149 필연성은 규칙적이고 확실하다. 인간의 행동거지는 불규칙적이고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필연성은 인간의 행동거지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8) 149 ~우연이나 무차별성은 사물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 때문에 오직 우리의 판단력에 있다고 결론 내린다. 이 사물들은 겉보기에 가변적이고 불확실할지라도, 그 자체에서는 모든 경우에 똑같이 필연적이다.
9) 149~150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미치광이는 자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미치광이의 행동을 판단하자면, 그 행동은 현인의 행동보다 규칙성과 항상성이 덜하고 결과적으로 필연성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10) 150 결과적으로 우리가 물질의 운동에서는 필연성을 인정하고, 정신의 작용에서는 필연성을 부인하는 것은 명백하게 불합리하다.
11) 151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일컫는 모든 대상들을 그 자체로 고려하면, 그 대상들은 자연에서의 어떤 두 대상처럼 독립적이고 분리된 것이다.
12) 151 따라서 우리가 항상적 합일을 관찰하는 모든 경우에, 또 그 합일이 신념과 의견에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모든 경우에, 우리는 원인과 필연성 등의 관념을 가진다.
13) 152 우리가 사물들의 이름은 바꿀 수 있겠지만, 사물들의 본성 및 사물이 우리 오성에 미치는 작용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14) 155~156 물론 나는 좀더 나아가서, 이런 종류의 필연성은 종교 및 도덕에 본질적이어서 이 필연성이 없다면 곧 종교와 도덕이 완전히 전복되어야 하며, 그 밖의 모든 가정 또한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완전히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15) 156 실제로 인간의 법칙은 모두 보상과 징벌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보상과 징벌이라는) 이 두 동기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선한 행동을 낳고 악한 행동을 방지하는 기초적 원리로 가정되는 것은 틀림없다.
16) 156 그리고 행동이 그 행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성격과 성향 따위에 있는 몇가지 원인에서 유래되지 않는 경우에, 그 행동은 그 사람을 수반하지 않으며, 그 행동이 선하다고 해서 그에게 명예를 줄 수 없고, 그 행동이 악하다고 해서 그에게 불명예를 줄 수 없다.
17) 157 그러므로 자유의 가설에 따르면, 사람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도 마치 태어난 첫순간처럼 순진무구하며, 사람의 성격은 자신의 행동과 전혀 무관하다.
18) 157 사람은 자신이 모르고 우발적으로 악을 저질렀을 때, 그 결과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가벼운 비난을 받는다. ~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모르고 한 행동의 원인은 순간적이며, 그냥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19) 157 그저 어떤 행동은 인간 정신에 있는 범죄적 정념 또는 범죄적 요소의 증거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인간을 범죄자로 만든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20) 158 정념과 이성의 싸움을 이야기하며 이성의 편을 들고, 사람은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만큼 유덕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은 물론 심지어 일상 생활에서조차 가장 흔하다.
21) 158 첫째, 오직 이성만으로는 어떤 의지 활동의 동기도 될 수 없다. 둘째,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결코 정념과 상반될 수 없다.
22) 159 따라서 추상적이거나 논증적인 추론은 오직 원인과 결과 따위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지배할 뿐, 우리의 어떤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23) 160 이성만으로는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불러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추정으로는 바로 이 (이성이라는) 직능은 의욕을 막거나 어떤 정념 또는 정서를 선택하려고 싸울 역량이 없다.
24) 160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 이런 의견은 다소 의외로 여겨질 수 있으므로, 몇 가지 다른 고찰을 통해 이 의견을 확인하는 것도 쓸데없는 짓은 아닐 것이다.
25) 161 첫째, 희망이나 두려움, 비탄이나 기쁨, 절망이나 안심 등과 같은 정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경우이다.
26) 161 둘째, 어떤 정념이 작용할 때, 우리가 의도한 목적을 충족시킬 수 없는 수단을 선택하여,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우이다.
27) 161 어떤 정념이 거짓 가정에 기초를 두거나 또는 의도적 목적에 불충분한 수단을 선택했을 때가 아니라면, 어떤 의미에서든 정념을 결코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성과 정념은 결코 상반될 수 없으며 의미와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 싸울 수도 없다.
28) 162 ~ 우리는 아주 쉽게 이 정념을 이성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이 정념이 바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이성이라는 직능에서 유래된것이라고 가정한다.
29) 163 대체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듯이 이 두 원리는 모두 의지에 작용하며, 이 두원리가 상반되면 사람의 일반적 성격이나 현재의 성향에 따라서 두 원리 중 한가지가 우세하다.
30) 163 차분한 정념과 격렬한 정념 따위의 상이한 원인과 결과는 철학에서 가장 훌륭한 사변적 주제이다.
31) 164 따라서 우리는 차분한 정념과 약한 정념을 구별해야 하고, 격렬한 정념과 강한 정념을 구별해야한다.
32) 164 정념과 정서는 그 본성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심지어 서로 상반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념을 수반하는 정서는 쉽게 정념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 인간 본성의 주목할 만한 속성이다.
33) 165 정념들이 동시에 현전할 때 그 정념들은 서로 무관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서로 혼입되므로, 선이나 악이 욕구나 혐오 따위의 정념뿐만 아니라 그 밖의 어떤 특정 정서를 유발할 상황에 있다면, 욕구나 혐오는 새로운 힘과 격렬함을 획득할 수밖에 없다.
34) 166 불확실성은 대립과 같은 영향력을 갖는다. 사유의 동요, 즉 사유가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빠르게 바뀌는 것, 상이한 관점에 따라 서로 계기하는 정념들의 다양성 등 이 모든 것이 정신에 동요를 일으키며, 지배적 정념으로 흡수된다.
35) 166 어떤 감정을 가장 고무시키는 것은 그 대상의 일부를 가려서 숨기는 것이 틀림없다. 그 대상의 가려진 부분이 미리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상상력이 작용할 여지도 남겨 두고 있다.
36) 167 오랫동안 (절망과 안심이) 없는 것은 자연히 관념을 약화시키고 정념을 감소시키지만, 관념이 스스로 지탱할 정도로 생생한 경우에 없는 것에서 발생한 불안은 정념을 증대시키고 정념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 더욱 격렬하게 만든다.
37) 167 그런데 우리의 정념을 증감시키고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는 등 이런 것에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갖는 것은 습관과 반복이다.
38) 168 따라서 새로운 것은 모두 우리를 가장 감동시키며, 정확히 말해서 자신에게 본래 속하는 것보다 큰 고통이나 쾌락을 우리에게 준다.
39) 168 반복은 점차적으로 수월성을 낳는데, 이것은 인간 정신의 매우 강력한 또 하나의 원리로서 수월성이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경우에는 틀림없이 쾌락의 원천이다.
40) 168 수월성의 쾌락은 기운을 격발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정연한 운동에 있다. 이 운동은 가끔 고통을 쾌락으로 바꿀 정도로 강력하게 되며,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이 운동 때문에 처음에는 아주 거슬리고 거북한 것에서 시간이 흐르면 풍미를 느낀다.
41) 169 그러나 습관이 결코 의향의 대상일 수는 없다. 그리고 최근 유명한 철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이것은 습관이 능동적 버릇을 증대시키지만 수동적 버릇을 감소시키는 이유이다.
42) 169 상상력과 감정이 함께 밀접하게 합일되며,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감정과 완전히 무관할 수도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43) 169 앞서 언급한 부대 정서는 쉽게 지배적 정서로 전환된다는 원리에서 이런 사실이 유래되는지의 여부를 나는 확정하지 않을 것이다. 정념에 미치는 상상력의 이런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많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지금 목적에는 충분하다.
44) 169 우리는 우리와 친숙한 쾌락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확정적인 관념을 형성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본성을 전혀 모르는 쾌락에 대해서는 쾌락의 일반 관념으로 표상한다.
45) 170 모든 사람은 자신들에게 제안된 것에 관심을 가지며 그 제안을 공공선을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장 일치로 주저 없이 그 제안을 기각한다. 오직 그 제안이 정의에 위배된다는 이유만으로.
46) 170 철학자들은 결코 이익과 정직 사이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의 결정은 일반적이며, 그들의 정념이나 상상력은 그 대상에 전혀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47) 171 무엇보다도 웅변은 그 대상을 가장 강하고 생생하게 재현하는데, 이 웅변은 어떤 정념을 정신에 가장 잘 주입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듯이, 그런 대상 가운데 어떤 것은 가치 있지만, 다른 어떤 것은 경멸스럽다.
48) 171 그러나 웅변이 늘 필요하지는 않다. ~ 이런 사실은 공감 또는 교류의 원리에서 비롯되는데, 내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공감은 상상력의 힘을 통해 관념을 인상으로 전환하는 것일 뿐이다.
49) 171~172 생생한 정념이 대체로 생생한 상상력을 수반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런 측면에서 정념의 힘은 그 대상의 본성이나 (그 대상이 나타나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기분에 상당히 의존한다.
50) 172 단지 상상력의 허구만으로는 어떤 정념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정신을 붙잡아 두거나 정서를 수반하기에 상상력의 단순한 허구는 너무 약하다.
51) 172 우리 자아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현전하며, 자아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나 이런 성질을 공유해야 한다. ( 즉 상상력에 월등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52) 172 명백하듯이 상상력은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 및 시간상의 위치를 결코 깡그리 잊을 수 없고, 또한 낯설고 막연한 대상에 주의를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매순간마다 현재를 되새겨 볼 수밖에 엇ㅂ을 정도로 정념과 감관 따위를 통해 (자신에게) 자주 나타나는 공간 및 시간상의 위치를 수용한다.
53) 172 따라서 우리 자신과 거리가 먼 대상에 대해 숙고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그 대상 사이의 공간을 모두 거쳐서 비로소 그 대상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그 대상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사유) 경로를 매순간마다 바꿀 수밖에 없다.
54) 173 우리가 대상에 도달하는 단계가 적을수록, 그리고 그 과정이 매끄러울수록 이런 생동성의 감소는 덜 현저하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거리와 어려움의 정도에 비례하여 더하거나 덜하게 관찰된다.
55) 173 인접한 대상은 우리 자신에 대한 관계 때문에 힘과 생동성에서 인상에 버금가고, 먼 대상은 우리가 그 대상을 생각하는 방식의 단속 때문에 더욱 악하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현상한다.
56) 173 따라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람은 주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대상에 관심을 가지며 현실을 향유하고, 멀리 떨어진 것은 우연과 운명이 관장하는 것으로 방치한다.
57) 173 그렇지만 나아가서 공간 및 시간상의 거리가 상상력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또 의지와 정념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공간적으로 멀어진 결과는 시간적으로 멀어진 결과보다 훨씬 약하다.
58) 174 즉 시간이나 계기는 두 부분이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대상의 이런 성질들은 상상력에 ( 그 성질에) 걸맞는 영향력을 미친다. 연장의 부분은 감관들의 합일에 적적한데, 공상에서 합일된다.
59) 174 이와 같이 시간상의 일정 거리는 공간상의 같은 거리보다 훨씬 큰 사유의 단속을 유발하며, 결과적으로는 관념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나아가서 정념을 더욱 현저히 약화시킨다. 나의 체계에 따르면 정념은 대개 상상력에 의존한다.
60) 174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현상이 또 한가지 있는데, 이 현상은 (시간상으로) 동일한 거리가 과거보다는 미래에 미치는 영향력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61) 174~175 우리는 관념을 배열할 때 늘 시간의 계기를 따르며, 어떤 대상에서 그 대상 바로 뒤에 나타났던 대상으로 생각을 옮겨 가는 것이 그 대상 앞에 나타났던 대상으로 생각을 옮겨 가는 것보다 더 쉽다.
62) 175 오직 절대적 필연성만이 역사가가 반드시 시간 순서를 파괴하도록 할 수 있으며, 역사가의 해설에서 실재로는 다른 사건의 뒤인 사건이 앞서도록 할 수 있다.
63) 175 관념들의 이처럼 수월한 진행은 우리가 자신의 (사유) 과정과 끊임없이 상충하며 공상의 자연적 성향에서 발생한 난점을 극복해야 할 때보다 상상력의 호감을 사서 상상력이 그 대상을 더욱 강하고 완전하게 표상하도록 한다.
64) 175 따라서 표상 작용을 단속시키고 약화시키는데에는 과거의 짧은 (시간적) 거리는 미래의 훨씬 긴 (시간적) 거리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는다.
65) 175 따라서 우리가 상상력의 이런 성질을 제거할 수 있다면, 과거와 미래의 대등한 거리는 아마 대등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66) 176 이와 같이 우리는 미래를 매순간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밀려오는 것으로 표상하며, 과거는 매순간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표상한다.
67) 176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시간) 거리가 대등하다고 해서 상상력에게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거리는 지속적으로 증대되며, 미래의 거리는 지속적으로 감소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68) 177 큼이 계기적이든 연장적이든간에 그것을 그냥 바라보고 관조하는 것은 영혼을 부풀려서 영혼에 뚜렷한 즐거움과 쾌락을 제공한다.
69) 177 그런데 아주 아득한 대상이 상상력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와 그 대상 사이에) 개입된 거리를 되새겨 봄으로써 크고 장엄한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일상적 만족을 얻는다.
70) 177그러나 공상은 한 관념에서 이 관념과 관련된 관념으로 쉽게 옮겨 가고, 1차 정념에서 유발된 모든 2차 정념으로 전이되므로, 거리를 향했던 감탄은 자연히 모두 아득한 대상에 스며든다.
71) 177 그러나 매우 큰 거리가 아득한 대상에 대한 감탄을 자아낸다고 할지라도, 시간 거리는 공간 거리보다 큰 영향력을 갖는다.
72) 178 사람을 완전히 좌절시키거나 위협하지 않는 적대관계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아 일상적 위엄이나 도량보다 더 우리를 고무시키는데, 이것은 인간 본성의 주목할 만한 성질이다.
73) 178 마음 같아서는 굼뜬 양들 틈에다 침흘리는 멧돼지를 넣어 주려고 하고, 아니면 사에서 (금빛) 갈기의 사자를 (그 틈새로) 내려 보내려고 한다.
74) 178 정념을 뒷받침하며 충족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호의적이며, 이와 반대로 정념을 약화시켜 힘을 빼앗는 것은 우리에게 언짢다.
75) 178 이런 원리는 정념 및 상상력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납득하려면 높음과 낮음이 공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76) 178 따라서 우리는 일정한 방식으로 모든 선한 것의 관념을 높음의 관념과 연합시키고, 모든 악한 것의 관념을 낮음의 관념과 연합시키게 된다.
77) 178~179 우리는 고귀한 천성을 높고 숭고한 천성이라고 한다. 재빠른 날개짓으로 축축한 땅을 벗어난다.
78) 179 이제 확실하다시피 우리 감관에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물체의 경향은 습관을 통해 공상에 유사한 경향을 낳을 수밖에 없고,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대상을 생각하면,
79) 179 그 대상이 갖는 비중의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이 있는 위치에서 바로 아래 위치로 그 대상을 옮기도록 하는 성향을 갖게 되며, 이런 성향은 우리 상상력과 물체가 똑같이 멈추는 바닥에 이르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80) 179 따라서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나아가는 상상력은 자신의 내적 성질과 원리에서 대립을 발견하고 또 기쁨과 용기로 고조된 영혼은 대립을 추구하며, 사유나 행동의 장에 열정적으로 뛰어드는데, 이 장에서 영혼은 자신의 용기를 북돋우고 발휘할 수 있는 소재와 무주친다.
81) 179~180 그러므로 영혼을 북돋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정념을 자극하는 것이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든 모두 자연스럽게 공상에 이런 상승의 의향을 전달하고, 영혼이 자신의 사유와 표상 작용의 자연적 흐름을 거스르도록 결정한다.
82) 180 상상력의 상승적 진행은 정신의 현재 성향과 일치한다. 그리고 어려움은 정신의 활기와 열정을 소진시키느 대신 그것을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83) 180 몰락은 천사와 상반되며, 천사는 노동과 강제 없이는 하강 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분명해지듯이 상상과 몰락의 실제 본성은 어려움과 성향에서 비롯되고,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결과도 이런 원천에서 발생한다.
84) 180 상상력이 시간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 가는 것이 공간의 부분들을 전이하는 것보다 어렵다. 공간이나 연장은 우리 감관에 합일되어 나타나는 반면에, 시간 또는 계기는 늘 흩어져 분활되기 때문이다.
85) 180 정신은 시간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전이하면서 매순간마다 새로운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관념이 쉽고 수월하게 흐르는 공간의 부분들을 전이할 때보다 훨씬 격렬하고 숭고한 성향을 느낀다.
86) 180 이런 성향에서 여느 때처럼 거리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아득한 대상을 포착하게 되는 상상력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그것에 걸맞는 존경심을 갖는다.
87) 181 일상적 사고 방식에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일종의 중간 정거장에 있으며, 우리 상상력이 과거 시간을 따라갈 때 일종의 어려움을 발견하고 미래의 흐름을 따를 때 수월성을 발견하므로, 그 어려움은 상승의 관념을 전하고 수월성은 상반된 관념을 전한다.
88) 181 선이나 악이 현존하거나 어떤 대상이 우리 직능의 근원적 형식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유발시키기에 적합할 때,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한 정념은 정신의 격렬하고 감지할 수 있는 정서이다.
89) 181 우리가 뜻하는 이성은 전자와 같은 종류의 감정들이지만, 더욱 차분히 작용하며 기분에 어떤 혼란도 유발시키지 않는다.
90) 182 ~ 차분한 정념이 부대 정념으로부터 힘을 얻거나 상상력을 고무시킴으로써 격렬한 정념으로 변하거나 습관을 통해 격렬한 정념으로 변화하듯이, 기분의 변화 또는 대상의 여건과 상황 따위의 변화에 의해 쉽게 격렬한 정념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91) 182 철학은 정념과 이성의 전쟁에서 몇가지 아주 중요하고 두드러진 사건을 오직 해명할 수 있을 뿐이지만, 아주 사소하고 정교한 변혁은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
92) 182 선과 악에서 거의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인상은 의욕과 함께 욕구 ․ 혐오 ․ 비탄 ․ 기쁨 ․ 희망 ․ 두려움 따위의 직접 정념이다. 선 ․ 악이 단순히 관념으로만 표상되고 미래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더라도, 근원적 직감 때문에 정신은 선과 합일하고 악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93) 183선은 확실하거나 개연적일 때 기쁨을 산출한다. 악이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비탄이나 슬픔이 발생한다.
94) 183 욕구는 오직 선으로 간주되는 것에서 발생하며, 혐오는 오직 악으로 간주되는 것에서 유래된다. 정신이나 신체 따위의 활동을 통해 선에 이르거나 악이 없는데 이를 수 있는 경우에 의지가 발현된다.
95) 185 나의 주장은 이 경우에 상반된 정념들은 영혼에 동시에 공존하며, 서로를 파괴하고 위축시키는 대신 함께 지속되며, 이 상반된 정념들의 합일을 통해 제 3의 인상이나 감정이 산출된다는 것이다.
96) 187~188 개연성은 두 종류인데, 그 한가지는 그 대상이 본래 실제로 불확실하며 우연에 의해 (대상의 존재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대상은 이미 확실하더라도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불확실 한 경우이다.
97) 189 확실한 악은 가능적이든 불가능적이든간에 두려움을 낳는 데 때때로 동일한 영향력을 미친다. ~ 그러나 선 ․ 악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종류가 불확실할 때에도 두려움이나 희망이 발생한다.
98) 192 진리의 종류는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관념들 자체의 비율을 발견하는데 있고, 다른 것은 대상에 대한 관념이 그 대상의 실재와 합치하는데 있다.
99) 194 그러나 그 쾌락의 주요 기초인 정신 활동 외에도, 목적을 달성하거나 우리가 조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도 역시 필요하다.
100) 196 관념의 생동성을 통해 우리는 공상의 흥미를 유발하며, 비록 정도는 약하지만 온건한 정념에서 발생하는 것과 동일한 쾌락을 산출한다. 관념의 생동성이 쾌락을 제공하므로, 관념의 확실성은 정신에 특정 관념을 고정시키고, 그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 동요를 억제함으로써 불안을 막는다.
101) 197 (사실에 대한) 관념이 그 불안정성과 가변성에 담긴 불안을 우리에게 줄 정도의 힘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또 그 정도로 우리와 밀접하게 관련되면 (우리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