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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557 ~ 1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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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3월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 세력의 핵심이 제거되고, 그 빈자리에는 이귀(李貴, 1557~1633), 김류(金瑬, 1571~1648), 최명길(崔鳴吉, 1586~1647) 등 서인 공신들이 들어섰다.
선조대부터 서인 강경파로 활동하던 이귀는 광해군 정권 때 실의의 나날을 보냈으나, 인조반정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이라는 후광을 업고 인조반정의 최고 주역으로 활약했던 이귀. 뼛속 깊이 서인의 정치 행보를 보였던 그의 삶과 정치 활동 속으로 들어가본다.
이귀의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5대조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1471년(성종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조부 이기(李夔)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피한 후 사간,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아버지 이정화(李廷華)는 이귀가 두 살 때인 1558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권용(權鎔)의 딸이다.
연안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에도 꾸준히 관리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조정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권세 가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귀가 인조반정의 최고 주역이 되고, 그의 두 아들 시백(時白)과 시방(時昉) 역시 반정에 참여하여 부자가 함께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명문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귀의 처가 또한 명문이었다. 부인 인동(仁同) 장씨는 장민(張旻)의 딸로, 장민은 이괄을 난을 진압하여 일등공신에 오른 장만(張晩, 1566~1629), 인조반정의 이등공신 장돈(張暾)과 사촌이었다. 장만의 사위 최명길도 이귀와 교분을 가지며 인조반정의 1등 공신에 오른 것을 보면, 이귀는 인조 정권의 서인 핵심 세력임을 알 수가 있다.
이귀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충청도 쪽으로 내려갔다가 14살이 되어서야 서울에 올라왔다. 이후 이이와 성혼, 윤우신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친분을 유지했다. 이항복은 이귀가 서울로 올라온 후 이웃으로 친해져서 ‘밤새워 놀다가 이별을 아쉬워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덕형과는 윤우신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선조대에 이귀가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들의 공격을 받자 이귀를 옹호하였고, 이귀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녹봉을 덜어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귀는 1582년(선조15) 생원시를 거쳐, 1603년(선조36) 문과에 합격하였다. 장성현감, 김제군수 및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김제군수 시절에는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 계생이라고도 함, 1573~1610)의 연인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허균의 문집에는 ‘매창은 이귀의 정인(情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귀는 1582년(선조15) 생원에 합격한 후 21년 만인 1603년(선조36) 47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합격할 정도로 과거 합격이 늦었다. 그러나 그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라는 서인 학통을 배경으로 선조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分黨)된 후 서인 강경파의 입장에 서서 동인 공격의 선봉장이 되었다.
동서 분당 이후 정치권에서 이슈가 된 인물은 1589년 정여립 역모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었다. 정여립은 원래 이이의 문하에 있었으나 동인으로 당을 옮긴 인물로, 요즘으로 치면 당적을 바꾼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귀는 스승을 배반한 정여립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선조 20) 3월 1일에는 이귀가 진사 조광현 등과 함께 이이와 성혼을 옹호하는 수만언이나 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선조는 ‘이귀의 말이 만세의 공론’이라면서 그를 적극 지지하였고, 결국 동인의 핵심인 이발과 이산해는 사직을 하였다.
이귀가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시절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귀는 이미 요직에 있었던 이덕형과 이항복 등의 주청으로 경기ㆍ황해ㆍ강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었다. 이귀는 군사를 모집하고 분조(分朝) 활동을 하던 세자 광해군을 도와 민심 수습에 나섰다. 이듬해에는 숙천(肅川)으로 가서 왕에게 명나라 군의 주둔으로 인해 떨어진 물자 회복 대책을 진언하였고, 선조는 그를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였다.
왜란 당시 이귀의 활약은 동인의 영수 유성룡도 인정할 정도였다. 유성룡은 “장성현감 이귀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만족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1).”면서 이귀의 전공을 인정하였다. 1593년 이후 이귀는 장성현감, 군기시 판관(判官), 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전란수습에 힘을 썼고, 1603년 문과 급제 이후로는 형조좌랑, 안산군수, 양재도 찰방(察訪), 배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북인 중에서도 대북(大北)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귀와 가장 대립했던 정치인이 대북의 핵심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었던 만큼 이귀의 수난은 예고되어 있었다. 이귀는 선조대 후반 대사헌으로 있던 정인홍의 죄악 10가지를 고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자신이 한 번 정인홍의 허물을 말하자 그의 도당들이 멋대로 자신의 일족(一族)의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내쫓기까지 한 사실과 정인홍에게 잘못 보이면 곧바로 모두 과거 시험에 응시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2).
그런데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이 정국의 실세가 되자 이귀는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9월 사간원에서는 “이귀는 괴이한 귀신으로 상소하는 일이 평생의 장기입니다. 전에 소모관이 되었을 때 정인홍을 없는 사실로 얽어서 심지어 ‘오랫동안 의병을 잡고 있다’는 등의 말을 상소 가운데 뚜렷이 언급하여 마치 은연히 다른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의 계략이 너무나 참담합니다.”라고 하면서 이귀의 사판(仕版: 벼슬아치 명부) 삭제까지 주장했지만, 파직으로 마무리 되었다. 또한 장녀 여순(女順)이 죽은 남편의 친구와 간통한 사건으로 인하여, 딸도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616년 이귀는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아들 이시백은 시국이 불안하니 아버지에게 시골로 내려가기를 청했지만 이귀는 본격적으로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을 도모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던 신경진과 구굉 등이 이서와 반정을 먼저 계획하였고, 뜻을 같이할 인물의 포섭에 나섰다. 이때 김류와 함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이귀였다. 대북 정권에서 유배를 갔던 경력과 더불어, 평산부사, 방어사 등을 역임하여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반정 세력과 뜻을 같이 하면서 이귀는 자신의 자식들을 바로 합류시켰고, 평소 친분이 있던 최명길ㆍ김자점ㆍ심기원 등을 끌어들였다. 이귀의 합류로 반정 세력은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 되었다.
1623년 3월 13일 밤 이귀, 김류,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후의 인조)을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귀는 아들인 시백과 시방, 양아들인 시담까지 모두 반정에 참여시킬 정도로 광해군 폐위에 모든 것을 걸었다. 1622년 가을에 이귀는 마침 군사력을 보유한 평산부사로 임명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신경진을 이끌어 중군(中軍)으로 삼아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모의 과정의 일이 누설되었고, 광해군의 대간들은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왔으나 다행히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미리 상궁 김개시(金介屎, ?~1623) 등을 매수해둔 덕분으로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평산부사 이귀가 이끈 병력과 장단부사 이서가 이끈 병력은 반정군이 대세를 장악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당시 평양과 송경 사이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파발길도 끊기는 지경이었던 탓에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평산이나 장단의 군사들은 쉽게 자신의 영역을 이탈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이기와 이서가 이끄는 반정군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또한 이귀는 광해군 정권의 훈련대장 이흥립을 반정 세력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훈련대장 이흥립은 조정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흥립이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흥립이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이귀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정 성공 후 광해군은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광해군을 보좌한 대북 세력의 핵심들은 거의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위경, 한찬남 등 대북파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장 거리에서 처형되었고, 외척으로서 권세를 한껏 누렸던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영수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는 이미 89세의 고령의 몸이었지만,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후원자였다는 점과 반정의 주역인 이귀 등 서인과의 오랜 악연 때문에 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광해군과 북인 세력의 빈자리에 인조와 서인 세력들이 들어서면서 완전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인조반정 후 총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일등공신에는 이귀를 비롯하여 김류, 김자점, 심기원, 신경진, 이서, 최명길, 이흥립, 구굉, 심명세 등 10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대부분 광해군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서인들이었다. [당의통략]에서도 “문무훈신 김류, 이귀, 신경진, 구굉, 장유, 홍서봉, 최명길, 심명세 등은 모두 옛 이이와 성혼의 문인 및 이항복이 일찍이 천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아가는 데 가로막혀 금고에 처해져 유폐되었다가 중도에 일어나서 의거에 협력하여 도왔다.”고 기록하여 반정의 주체 세력들이 이이와 성혼, 이항복의 제자인 서인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서인 내에서도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다. 우선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갈려졌고, 훈서는 다시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나뉘어졌다. 김류는 노서의 주류가 되고 이귀는 소장의 주류가 되면서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인조 초반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仁城君, 1588~1628)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인성군의 처벌 문제로 다시 김류와 대립했다. 이귀는 인조의 왕통 안정을 위하여 인성군의 처벌을 적극 주장한 반면, 김류는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후금에 대한 대외 정책에서 이귀는 현실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국가 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기에 후금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주화론(主和論)의 주창자(主唱者)였던 최명길과 뜻을 같이한 것으로, 서인의 주류 세력과는 대립되는 입장에 있었다.
인조대에 이귀는 호위대장,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우참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고, 그 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 강화 등을 적극 건의해 이를 실현시켰다. 이귀는 자신이 적극 참여하여 만든 인조 정권의 안정을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한 관료였다.
인조대의 정치 현안 중 가장 큰 이슈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추숭 문제였다. 인조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생부의 추숭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때 인조에게 힘을 실어준 인물이 박지계와 이귀였다. 서인 산림의 영수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비롯하여 다수가 전례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어 추숭에 반대했지만, 박지계가 이론적으로 추숭의 정당성을 설파하였고 이귀는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거듭 추숭을 건의하였다. 결국 정원군은 왕으로 추숭되어 원종(元宗)이 되었다. 이로써 인조는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잇는 왕이 되면서 왕권 강화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가 있었다.
이귀는 자신이 옹립한 왕 인조의 정통성 확립과 정권의 안정이 곧 반정의 정당성을 가져온다고 믿고 인조를 위해 자신의 모든 정치 인생을 보냈다. 인조 역시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 이귀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했다.
공이 병을 얻으니, 임금이 의원을 파견하고 내약(內藥: 내의원에서 제조한 약)을 보내어 문병하도록 하기를 하루에 두세 번이나 하였다. 임종하던 날에 기운을 차려 창문의 해를 향하여 부복(俯伏)하여 절을 하는 것처럼 하기를 세 번 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는 임금을 영결(永訣: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짐)하는 뜻입니까?”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의 거애(擧哀: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고 나서 머리를 풀고 슬피 우는 것)하는 소리가 외정(外廷)에까지 들렸다. 임금의 옷과 신발, 금단(錦段) 등 염습할 도구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이귀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보필한 충직한 신하였다. 이제 갑자기 세상을 버려 내가 매우 슬피 애도한다.”하고, 또 이르기를, “그가 정승에 이르지 못한 것을 내가 매우 후회한다.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특별히 상지인(相地人)을 보내 땅을 가려 장례를 지내주라.”하고는, 술을 하사하고 장례에 쓸 물자를 하사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이르러 여러 고아(孤兒)들의 형편을 묻고 하사한 물품이 끊어지지 않았다. 일찍이 하교하기를, “지난 밤 꿈에 선경(先卿, 죽은 이귀를 가리킴)을 보았는데 울고 있기에 나 역시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깨어 생각하니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국조인물고] 이귀의 비명(碑銘), 조익(趙翼) 씀
인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귀의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이귀는 현재 이원익, 신흠, 김류, 신경진, 이서, 이보(능원군, 인조의 동생)와 함께 종묘의 인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어 지금도 가까이서 인조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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