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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꾸랑질산 산행
강경선
그젯밤에 아버지가 크게 다치셨다 하기에 걱정되어 전화 드리니 오히려 점심 드시고 산에 어름 따러 가신단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름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 아버지. 올해로 여든 넷. 수전증이 생기긴 했어도 세계 여행을 다니실 만큼 타고난 건강을 지닌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어쩌다가 다치셨을까? 또 다친 몸으로 웬 산행타령이란 말인가?
어찌된 연유냐고 여쭈었더니 어머니가 쑤어 놓은 묵을 드신다고 부엌에 혼자 들어갔다가 어지럼증을 만나셨단다. 나는 화가 나서 어머니께 왜 아버지 혼자 두셨냐고 했더니 옆집에 잠깐 놀러간 사이에 묵을 드시려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묵사발을 들고 의자와 함께 넘어지셨다는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라 놀란 와중에도 어머니는 자칫 너거 아버지가 하마터면 묵사발이 될 뻔했다며 아버지를 놀리시는 여유까지 부리심이 큰 상처는 아닌가 보다 하면서도 웃을 여유가 생기지 않는 건 모시지 못하는 죄책감일까?
점심을 대충 챙겨 먹고 바삐 농협마트에 들러 고기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두유를 싣고 달려가는 친정 길은 오늘따라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고향집으로 먼저 달려간 마음이 허접하게 뒤따라가는 몸을 빨리 오라고 채근하기 때문일까?
앵강곡에서 바라보는 신전 들은 황금빛 벼이삭들이 무거운 고개를 숙인 채 가을걷이를 즐기고, 물이 반쯤 빠져나간 갯벌은 조개도 참 많이 나오겠다. 화계 돔머리를 돌아나가니 몰개섬이 정겹게 그림 되어 떠온다. 제법 큰 부락이었던 새몰은 또 왜 저리 작아졌는고? 탐스런 응기네 감은 초등학교 길에 군침도 많이 흘렸었는데.
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깐 그리운 친정집이 보인다. 언제나 가슴이 뛴다. 언제 쳐다봐도 마냥 살갑기만 한, 내가 태어나고 들락거린 친정집 대문 밖에서
“아버지! 어머니!”
가는귀를 잡수신 아버지를 위하여 목 빠지게 불러댄다. 인기척에 놀란 듯 마루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신다. 온통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새하얀 머리칼이 슬프게 헝클어져 내 눈을 덮는다. 눈물이 쏟아지려는데 안방에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무거운 몸을 일으키시며 무릎을 끌고 나오신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떨리는 어설픈 손동작으로 갖고 간 두유를 뜯으시고는 단숨에 들이키신다. 어쭙잖은 것일지라도 딸이 들고 온 것이면 달게 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려는 뜻이 역력하시다. 하지만 이마며 눈자위 위를 대일밴드로 온통 치장을 하신 모습이 또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고혈압과 심한 요통으로 거동을 잘 못하시는 어머니와 단둘이 느리디 느린 곡조로 얼기설기 사시는 모습이 살얼음을 디디는 듯 안타깝기만 하다. 그 생각을 할 때면 가슴 한 켠이 쿵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난다. 얼른 아버지의 얼굴에 매달려 있는 대일밴드를 떼어내고 소독한 후 연고를 발라 드린다.
“우쩔라꼬 우쩔라꼬 그러십니까? 제발 조심하세요.”
내 걱정에 아버지는 두 손을 저으시며
“걱정마라, 걱정마라.”
는 말씀만 반복하신다. 딸내미의 간호가 살갑게 느껴지시는지 괜찮다고 하면서도 가만히 내게 기대어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시는 모습이 어린애처럼 순하다. 나는 검버섯으로 얼룩진 주름을 걷어내려는 듯 바른 위에 또 덧발라 드리며 정성을 다하려 안간힘을 쓴다.
아버지를 간호하는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늦으면 안 된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낫과 톱을 준비하시고 새마당까지만 가서 근처 그늘에 차를 세워두고 올라가자고 앞장을 서신다. 너무나 오랜만의 아버지와 산행이다. 복골 살 때 함께 감을 따러 간 적은 있었지만. 내가 가방과 물병을 들자, 아버지는 거기 가면 물 쌔빗다며(많다면서) 그냥 가자신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나는 기어이 물병을 들었다. 올려다보니 안골 밭 대부분은 아무것도 심지 않고 묵혀놓아 키를 넘는 잡풀만이 우거져 있었다. 길이 난 흔적은 있었으나 잡풀에 묻혀 승용차로 박차고 올라가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노쇠하신 아버지를 한발자국이라도 차로 편하게 모시고 싶었지만 도저히 무리다. 하는 수 없이 처에서 내려 묵정밭을 통과하여 산으로 올라가기로 하고 초행길인 나는 아버지를 앞세우고 힘차게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뒤도 안돌아보시고
“니가 등산을 많이 해서 잘도 올라오는고나!”
하시며 힘을 북돋워주신다.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어린 딸내미로만 여겨지시나 보다.
어머니가 주의를 주신 뱀이 나올까 좀 걱정되었지만 아버지가 계시니 걱정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도 어떤 위험에 처할 때도 아버지만 계시면 족했던 생각을 한다. 비렁바위가 험하게 늘어선 떨돌밭 저만치서 어름나무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칼로 찍은 듯 날카로운 모양의 돌무더기 때문에 그 위를 걷는 내 몸은 아무리 균형을 잡으려 해도 이리 삐뚤 저리 삐뚤 휘청거린다. 아버지는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신다. 정말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아 몸을 오그리며 반은 기다시피 엉금거린다. 아버지는 손을 잡아 주시겠다고 내미시지만 한사코 나는 손을 내저었다.
“하이고, 아버지! 절 얼라로 보십니까? 요런 정도 길은 시푸디 시풉니다. (문제 없습니다의 남해 방언)”
조금 더 오르니 잡나무 사이로 어름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름 숲 전체를 휘휘 돌아보시고는 작년보다 어름농사가 영 떨어진다며 안타까워하신다. 필경 아버지는 딸한테 어름 많은 곳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의 어름 밭 사냥 능력을 십분 과시하고 호기를 부리고 싶으신 것일 게다.
나는 다만 이런 곳에 어름나무가 많다는 것이 신기해서 좋아라 탄성을 지르며
“야아! 야! 신난다. 아버지, 요기도 있습니다.”
깊은 산골에나 있을 법한 어름이 한길과 그리 멀지 않은 이 산에 이리도 아름드리 우거져 있다니! 덩굴마다 가슴을 쩍 벌리고 박처럼 새하얀 속살을 수줍게 드러내 놓고 늘어져 있는 모습이란. 아버지는 그 중 가장 탐스럽다고 점찍어 놓으신 어름 한 개를 떨리는 손이지만 찰싹 낚아 따다가 입에 냉큼 넣어 주신다. 검은 씨가 너무 많아 좀 상그러웠지만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다 밀어 넣어 버렸다. 작은 바나나 같이 하얀 과육이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한 개를 더 따다가 입에 넣으려니 검은 손이 먼저 날아든다. 아버지 손이다. 백설기 같은 알토란 어름 속을 한 덩이 재빨리 입에 넣어 주신다. 나도 질세라 그 중 잘 익은 놈을 골라 아버지 입에 넣어드리니 내야 시간나면 많이 따 먹으러 올 수 있으니 너나 먹으라시며 손을 내저으시면서도 마지못해 받아 들고 달다달다 연발하시며 꿀떡꿀떡 잘도 드신다. 참 행복했다. 무어라 형언할 길 없는 충족감이 행복이란 단어와 함께 오고 있었다.
연로하신 아버지와 나를 낳아준 용소 뒷산에서 이죽거리며 산과일을 따먹는 이 맛을 어디에 비교할까! 어떤 과일, 어떤 소풍, 어떤 산행이 이보다 살가울까? 산에 취하고 어름에 취하고 한없이 따스한 아버지의 사랑에 취해 주름으로 얼룩진 아버지 젊은 시절을 곰씹어 본다.
자수성가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버지, 어디에다 내어 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열 살 때 돌아가셨다. 홀어머니를 봉양키 위해 열여섯 살 어린 나이로 함경북도 청진에 올라가 벌목공으로 일하셨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먹을 것이 없어 흙을 파먹는 등 일주일을 배고픔으로 허덕이다가 큰 맘 먹고 동료들과 의논하여 명태 한 상자를 사셨다. 가마솥에 통째로 넣고 끓여 며칠 굶은 배를 국물 열 그릇으로 채우니 빈속이 성할까 그만 탈이 나버리셨단다. 그 길로 열흘간이나 설사를 쏟아내다가 나중엔 피만 나오더란다.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고스란히 치질이 되어버리셨단다. 그 때 벌어온 10원으로 남들이 버려도 쳐다보지 않을 작은 어장을 사셨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너무나 소잡한 어장이었지만 부지런히 가꾸어 그물을 들이니 몇 해로 연달아 만선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시골치고는 제법 부를 이루고 사회활동도 많이 하시면서 봉사를 아끼지 않으시니 아버지는 어느새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셨다.
그래도 가슴 한 켠에는 늘 큰 오라버니를 셀마 태풍 때 바다로 먼저 떠나보낸 아픈 상처를 담고 사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아버지가 문득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빈산에 나 혼자 두고 가실 아버지는 아닌데. 휘휘 둘러보며 무섬증이 들어서려하자. 아주 가까운 곳인 듯 아버지의 막대기 알림종이 울린다.
“탁 탁 탁!”
돌아보니 큰 참나무 등걸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작업을 하고 계시면서도 어릴 때 담이 몹시 작았던 딸이 놀랄까 신호를 잊지 않으시는 배려가 따스하다. 죽은 참나무 등걸에 걸쳐져 높이 매달려 있는 어름을 발견하신 아버지는 호주머니에 달고 오신 나이롱 줄을 꺼내시더니 장대 끝에 낫을 매달아 칭칭 감아올린다. 곧 훌륭한 장대 낫이 되어 버린다. 어떤 높이의 어름도 거뜬히 딸 수 있는 도구가 된 것이다. 난 아버지에게서 장대 낫을 뺏듯이 받아들고 공중에 원을 그리며 어름을 따 내렸다. 아버지는 잘한다며 나를 치켜세우신다. 신이 나서 더욱 힘차게 내리쳤다. 좀 맛있게 벌어졌다 싶은 것은 까치가 벌써 다 까먹고 빈껍데기만 남았다. 그래, 까치 너도 먹고 나도 먹자. 그래도 내 몫이 더 많을 걸. 한 망태 따고 나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가지고 간 물병을 아버지께 건네면서 많다는 물이 왜 하나도 안 보이느냐고 장난스럽게 넌지시 여쭈니 아버지는 겸연쩍은지
“글쎄 말이다. 작년에는 골골이 물이었는데.....” 하시고는 말씀을 흐리신다. 아마도 집을 나설 때 자신 있게 말씀하신 게 좀 걸리시는 모양이다.
조금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버지는 작년에 산에 갔던 작은 오라버니가 어떤 놈인지 어름을 많이 따려고 덩굴째 잘라버렸더라고 그런 씨할 놈이 못되는 놈은 혼구멍을 내야 한다고 저녁밥상머리에서 욕설을 퍼붓더라고 했다. 사실 그 범인은 아버지였다고 말씀하시기에 오빠에게 자수하셨느냐고 여쭈어 보지 않았다. 대신 둘이서 빈 산이 떠나가도록 배를 잡고 웃었다.
문득 오라버니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일이 생각난다. 집에서 키우는 닭이 밤마다 한 마리씩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처음엔 별일도 다 있다고 놀랐으면서도 고양이 등속의 소행으로 치부해버리다가 그 일이 밤마다 이어지는 바람에 달걀 모으는 재미에 빠진 어머니의 분노가 깊어졌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밤, 잠복을 하고 닭장과 통하는 화장실에서 범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잿구덕 위에 있는 닭장에서 갑자기 닭들의 구구거리는 웅성거림과 털썩이는 충격 때문에 뿌옇게 피어오르는 재와 함께 시커멓게 기어오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익숙한 솜씨로 냅다 멱살을 거머잡는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덜미를 잡힌 범인은 안방 마루턱까지 질질 끌려오는 모습이란 영락없는 비 맞은 병아리다.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결사항전을 해 보지만 한번 아버지에게 붙잡힌 이상 어림없다. 온갖 드센 노동으로 굵어진 아버지의 억센 손이 아닌가! 그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아리며 제 얼굴을 숨기려는 안간힘이 보기에도 민망스럽다. 온 가족이 몰려 나와 드디어 어머니의 근심이 사라졌다는 안도감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신기한 듯 구경하는데.
아버지는 돌연,
“어느 집 어느 놈의 자식인지 내 오늘 물고를 내고 말끼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거부하는 범인의 멱살을 죄어 잡고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받쳐 들어 올렸다.
바로, 아버지의 둘째 아드님, 작은 오라버니가 아닌가. 어름서리나 닭서리나 아버지에게서 진 빚 갚음을 단단히 하는 셈이 되는구나 싶어 혼자 깔깔거렸다.
내려오는 길에 매실같이 생긴 것이 붉으죽죽하게 익어가는 열매를 발견했다.
“아버지! 이게 산복숭아 아닙니까?”
“그래 관절염에 좋으니 따가지고 가서 이서방 술 담가 주거라”
남편에게 좋다는 말에 나는 닥치는 대로 복숭아를 따 내렸다. 이때만큼은 전설 속에 나오는 장한 열녀(?)가 되어.
내려오면서 아버지께 산 이름이 무어냐고 여쭈었더니 대뜸
“꼬꾸랑질산”
이라고 말씀하셨다. 참 이름도 재밌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아버지가 임의로 붙이신 것인지.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호구산 자락에 있는 이 산에 자주 오르셨던 아버지가 굽이굽이 능선이 많아 꼬꾸랑질산이라고 이름 붙인 듯싶다. 호구산보다는 꼬꾸랑질산이 훨씬 정겹다.
내년에도 후내년에도 아버지와 꼬꾸랑질산에 오르는 행복이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첫댓글 때늦은 사고지만 월간 문예사조 11월호에 등단한 부족한 제 글입니다. 이쁘게 봐 주시고 정진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십시오.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더니 역시 였군요!!! 그리고 효녀를 둔 아버지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에구머니나! 부끄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늘 불효막심하여 죄스럽기만 합니다.
선상님! 전 왜 이렇게 눈물만 날까요? 그 달디단 얼음열매 생각을 하면서도 눈물이 납니다.왜 이럴까요? 울 아부지 생각이 납니다. 옆에 계신데도 한번도 아버지를 좋아햇던 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철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눈에 한번씩 보입니다. 밤이면 쥐가 난 다리 덕에 끙끙거리시며 훌쩍이시는 연약한 아버지가 새삼 생각이 나서 울먹입니다.
우리 교장선생님은가슴으론 한없이 따님을 사랑하지만 잘 표현이 안되었는데 이제부터 잘해야 되겠다고 하십디다...대부분의 아버지들은 표현을 잘 못하시지요. 그래도 내가 먼저 살갑게 다가가면 곧 용기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여든이 넘으신 아버님과 딸과의 부녀산행이 이루어 진것은 꼬꾸랑질산에 가면 어름이 있다는 사탕같은 산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모녀간의 정겹고 끈끈한 나드리나 쇼핑 그리고 여행은 흔한 얘기거리지만,이렇게 부녀간의 살같고 풋풋한 대화와 산행은 좀처럼 보기드문 일로써 역시 샘의 삶의 방식이 상상을 초월하는 이벤트 적인것 같습니다.좋은 결과 있기를 기원합니다.그리고 어름 많은곳 다음 기회에 살짝 귀뜸해 주세요.
예, 이리 개직기 땡기 와 보시다.
용소하니까 미연이 언니가 생각나네요 지금 어느 학교에 계신지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남해고등학교 그리고 이동중학교 교장셈으로 재직 하셨읍니다
미연이 언니가 둘 있는데요? 그리고 조성수 교장선생님 자제분?
예 맞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아시네요 제가 둘쩨 딸입니다 첫째 딸은 부산에서 교편잡고 있지요 그 언니 친구가 미연이 언니입니다 61년생
묵사발이라는 단어 때문에 혼자서 엄청 웃었어요 옆에서 아들이 엄마가 잘못되었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볼정도로요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조교장선생님이 춘부장이시라면 전 그분의 제자입니다.
따뜻하고,뭉클하고,부럽고...그런 와중에 웃음까지.... 근데 샘님 퐁당님은 단체사진중에서 어느분이신지...^^*
또또...잿밥에 더 관심이!?
ㅎㅎㅎ 그 단체 사진에 저는 없답니다. 미녀가 아니라 감히~ 옆에도 몬갔구만요! ㅎㅎㅎㅎㅎ
ㅎㅎㅎ.내가 너무 파 헤쳐져 버렸네요.ㅎㅎㅎㅎ
한 단어라도 빠트릴까 봐 눈 크게 뜨고 읽었습니다.너무도 가슴에 찡 하게 닿습니다.그저 좋은 글과 모습에 제 자신을 추스리게 됩니다.
감사합니다..열심히 써서 보답하겠습니다.
언제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 알까요..?,,아직도 객지 나가 있는 이 못난 아들놈 걱정 하시느라 저녁 진지 드시고 나만 꼭 전화를 하십니다..알면서도 먼저 전화 드리지 못하는 이 못난 아들은 나중에 큰 일 나면 울면서 달려내려갈것 같네요. 아버지/어머니 라는 이름은 세상 아무것으로도 형용할수 없죠,,;;..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비야..결혼은 어찌 되었누?
이번주 일요일 (11일) 오후2시 청계천/한국관공공사 B1 관광안내전시관에서 우리 전통혼례로 제비가 결혼식을 올립니다.
어머! 누구신지 모르지만 축하해요~~ 관광공사 빌딩하니까 그립네요 83년에 그 빌딩 지을때 롯데빌딩이었는데 지하에서 불이 났는데 공사중이라 문이 전부 닫힌 관계로 연기가 통로를 타고 올라온 바람에 어디서 불이난줄 모르고 전부 옥상으로 대피하는 바람에 지하에서 불났는데 헬기가 와서 사람을 실어날랐어요 제가 83년에 주택은행 무교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거던요 불난건물에서 결혼하니까 살림이 불처럼 일어나겠네요 모쪼록 행복하세요!!!!!!!!
축하축하축하요...새로운 행복의 지평을 여는 아름다운 시간이 우리 날제비에게.....쉼없이 이어지기를!!!!!
날제비...지어미의 사진 좀 올려 보게나.
글을보면서 가슴뭉클함을 느끼면서 효녀시기도 하지만.. 참 복많으신 분이라는데 ,,전 여섯살때 아버지를 잃었지요 그래서 부성애를 잘 모르고 살았는데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참 으로 부러움이..ㅎㅎ 역시 한편의, 소설 멋있었어요,,^^
고마워요..다비..
어제 들어왔다가 너무 졸립고 해서 못 읽고 오늘에야 읽었습니다^^미소가 번지는 글입니다! 언제나 선생님의 글은 따끈따끈 한것이 흐뭇합니다~
양지야...좀 자주 온나...
측하하네, 등단했다고? 국어샘이 그간 학생들 가르치느라 등단을 좀 늦췄나보군. 늦은 등단이지만 건필하기 바라네. 부모님이 이렇게 오래 살아계심에 감사드리게.
하이고...우리 신사님..이 얼마만인가요?
선천적인 게으름으로 이제사 이글을 읽어봅니다....수년전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으로 가슴이 메입니다... 젊음을 배위에서 보내시고, 자식들 뒷바라지하시다가 자식들 장성해서 돌아보니 아버님은 벌써 이 세상분이 아니더이다.. 어릴적부터 원양어선 타시는 아버님을 기다리며, 쇠섬끝자락에서 어머님이랑 조개캐고 꼬막 캐고....그렇게 기다렸는데... 눈물이 납니다......십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도 울쩍할때는 그냥 정자나 감포 바닷가에 앉아 그 시절을 되돌리곤 하는데..
그대의 글은 나를 더 눈물나게 합니다. 바다와 함께 희로애락을..함께했던 우리...그 바다에 오라버니를 보내고 더욱 그리운 바다...미운 바다입니다.
글은 진작 읽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지금은 안계신 오빠가 강경남씬가요. 부산에서 가까운 곳 옆집에 살면서 술도 한잔씩 하곤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