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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당신의 현존을 더욱 크게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인데, 비가 내리고 난 후,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갈릴래아 호수 인근에 노란 겨자꽃이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는 표현을 할 때, 좁쌀만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자씨만하다고 합니다. 좁쌀도 작지만, 겨자씨도 실제로 보니 참 작더군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른 겨자씨만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8-19)
바꿔 말하면 그 작디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나, 죄투성이인 내 안에도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더 작아 보이고, 더 큰 죄인처럼 여겨지는 이웃 안에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낮은 이를 총애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부르십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시선으로 볼 때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루 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저녁이면 온몸이 녹초가 됩니다.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의 처지와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험하지 못할 작은 삶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넘어지면 상처나 충격이 만만치 않은데, 낮은 밑바닥에 있다 보니 웬만한 넘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입지 않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바비큐 기계를 열심히 돌렸습니다. 기계를 본격적으로 돌리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숯불을 피워야 하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어찌 어찌 하다 보면 손이나 팔, 얼굴에 숯칠을 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며 웃습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겠다며 이런 저런 수리나 공사를 직접 하다가 비전문가이다보니 완전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헛수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그 삶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더 당신의 현존과 사랑, 자비를 크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작은 자가 될 때, 더 밑으로 내려갈 때, 더 확연히 우리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 20년 전에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것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왔고, 들으므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가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겪으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 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인류학자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반면 사람들의 생각은 더 짧아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햇수로는 훨씬 더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생각은 짧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사상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누구보다 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년 전, 피정 중에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지금의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33년의 세상 삶을 사신 예수님보다 훨씬 더 인간 세상에서 오래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시간을 정말로 길게 사셨습니다. 얼마나 긴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미와 영향이 이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이 짧아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통해 오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처럼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움 속에서 묵묵히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씨를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의 가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고 하십니다. 사실 겨자씨는 정말로 조그마한 씨로, 유다 문학에서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이 작은 것의 상징을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가 와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서 변화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들을 끌고 갈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신 스스로 사랑의 삶을 살면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또 누룩이 부풀어 오르듯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길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알려줄 것이고, 그건 실제 가치보다 더 저렴할 것이다(버나드 홉킨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것은 누룩과 같다.”(루카 13,21)
누룩이 잘 부풀어야
맛있는 빵이 만들어지듯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영혼의 세계를
속속들이 성장시키는
누룩이라네.
우리 안에
지혜와 성령이라는
누룩이 들어오면
우리의 영적 세계는
더욱 자유롭고 풍성해진
하느님 나라가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아주 작은 일을 소홀히 하거나
아주 작은 사람을 홀대한다면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이 풍요로움 삶입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면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둘이 한 몸을 이룸은 큰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5,21-33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