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지난 2월 중순 도네츠크주(州)의 주도 도네츠크시(市) 북서쪽 우크라이나군의 요새인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를 점령한 뒤 전세가 러시아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측 모두 이를 인정하는 편이다.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는 현재 병력과 포탄 부족에 군의 사기 저하까지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책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주요 전선에선 러시아군의 탱크 진격을 막을 수 있는 대전차 방어선 구축에 나섰고, 젤렌스키 대통령 등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미국 등 나토(NATO) 측을 향해 패트리어트 방공미사일 등 첨단 방공 시스템과 155㎜ 포탄 제공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겉으로나마 세력 균형을 이루기 위해 장거리 드론을 동원해 러시아 본토의 정유소 등 에너지 시설 파괴에 나섰다. 팽팽한 대치 상황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 전쟁의 판을 바꾼 '스마트형 폭탄'
전쟁의 판을 바꾼 '게임 메이커'의 하나로 지목된 것은 러시아의 '스마트형 폭탄'이다. 정식 명칭은 '에어 폭탄'(авиационная бомба, 날아가는 폭탄이라는 뜻, 항공기·airplane에서 air의 기능을 가진 폭탄/편집자)이다. 국내 언론은 이를 '활공(滑空) 폭탄'으로 번역했다. 순항미사일과 같이 자체 추진력은 갖고 있지 않지만, 스스로 하늘을 날아가 목표물을 때리는 폭탄 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에어 폭탄' 혹은 '활공 폭탄'으로 쓰기로 한다.
러시아 에어 폭탄 설명 장면/텔레그램 영상 캡처
미 뉴욕타임스(NYT) 등 서방 언론도 아브데예프카의 함락 이후 러시아 '에어 폭탄'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NYT는 3월 5일자에서 "러시아군이 최전선에서 공군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며 에어 폭탄의 위력을 소개했다. 루스템 우메로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도 아브데예프카 함락 이후 "'에어 폭탄'을 투하하는 러시아 항공 전력을 잡을 방공시스템이 각 전선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활공 폭탄'은 항공기로 투하하지만, 사전에 좌표 설정이 가능하고 또 유도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게 특·장점이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항공기 편대는 적진의 상공으로 어렵사리 침투한 뒤 공중에서 폭탄을 새까맣게 투하하고 돌아섰다. 폭탄은 중력에 의해 지상 목표물을 향해 떨어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전에서는 항공편대가 굳이 격추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 가까이로 침투할 이유가 없다. 목표물에서 최소 40km이상 떨어진 곳에서 '활공 폭탄'을 떨어뜨리면 된다. '활공 폭탄'은 입력된 좌표를 향해, 혹은 유도 기능을 통해 목표물로 날아간다.
러시아 항공우주군(공군 격)은 현재 3가지 유형의 '에어 폭탄'을 보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좌표 유도 에어 폭탄(управляемая планирующая авиационная бомба, УПАБ)과 좌표 조정 에어 폭탄(планирующая корректируемая авиационная бомба, КАБ), (단순) 고폭발성 에어 폭탄(неуправляемая фугасная авиационная бомба, ФАБ)이다.
러시아 일부 매체는 고폭발성 에어폭탄(ФАБ)에도 유도 기기를 부착해 위력을 더욱 높였다고 전한다. 현지 언론에는 통상 '카브'로 통한다. 그러나 국내 언론은 '활공 폭탄' 혹은 '파브'(FAB)로 쓰고 있다.
러시아 에어 폭탄 파브(ФАБ)-1500 생산 장면/사진출처:topwar.ru
미 CNN 방송은 지난 3월 "러시아의 파브(FAB)-1500에 의해 전선의 균형이 바뀌었다”며 "전문가들은 패트리어트 미사일 방공망이 그러한 폭탄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어 시스템으로 믿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군사 전문 인플루언스들은 FAB-1500의 정확도가 5m라고 주장한다. FAB-1500-M54는 KAB-1500의 혁신적인 개량형이다. 소련 시절인 1970년대 개발된 KAB-1500은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우크라이나군이 '카브'(КАБ, KAB)를 두려워하는 것은 러시아군의 정찰 드론이나 FPV 드론(사람이 직접 조정하는 드론/편집자)이 방어시설을 한번 쓱 훑고 지나가면, 곧바로 '에어 폭탄'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피하고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거의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수호이(Su)-34에 탑재하는 '에어 폭탄'
'에어 폭탄'을 발사하는 러시아 항공기는 주로 수호이(Su)-34와 Su-35 전폭기다. 항공기당 '에어 폭탄' 2~6개를 적진을 향해 투하한다. 목표물에서 적어도 수십㎞ 떨어진 곳에서 '에어 폭탄'을 날려보내지만, 첨단 방공 미사일의 격추 범위가 넓고 길어진 만큼, 항공기의 격추 위험도 적지 않다. 특히 미국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이 위력적이라고 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6일 자국 TV와의 인터뷰에서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의 대규모 추가 지원을 요구한 이유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방공 미사일 비축량이 충분하지만, 무엇을 먼저 보호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라고 토로하며 "우크라이나 전역을 커버하려면 패트리어트 미사일 25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대응 방안은 러시아의 Su-34 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는 미 F-16 전투기의 활용이다. 미 NYT는 그러나 F-16 전투기는 일러야 오는 7월 우크라이나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것도 6기에 불과하다. 추가 공급은 해를 넘길 것으로 예상됐다. F-16 전투기로 러시아의 '에어 폭탄' 사용을 억제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최대 고민은 러시아가 계속 새로운 '활공 폭탄'을 개발, 전장에 투입하는 데 있다.
미국의 군사전문지 밀리터리 워치 매거진은 6일 이례적으로 러시아 활공 폭탄 'ODAB-500'(러시아어로는 ОДАБ-500)을 자세히 소개했다. 러시아 국방부가 전날(5일) 공개한 ODAB-500의 투하 장면을 사진으로 싣기도 했다. Su-34 전투기가 열압력 탄두를 장착한 ODAB-500를 우크라이나군 방어 요새에 투하하는 영상에서 발췌한 것이다.
포병 전력에서 우위에 있는 러시아군이 'ODAB-500'의 공중 지원으로 화력 부문에서 우크라이나를 크게 따돌릴 것으로 이 매체는 전망했다.
러시아 에어 폭탄 ODAB-500 투하 장면/사진출처:밀리터리워치 매거진
러시아 매체에 따르면 'ODAB-500'은 2단계로 작동한다. 먼저 목표물 10m 가까이 접근한 뒤 액체 폭발물을 방출해 '에어로졸 구름(층)'을 형성한다(1단계). 이어 진공 폭발물로 '에어로졸 공기 층'을 폭발시켜 고압 충격파를 퍼뜨린다. 폭발 순간에는 제한된 지역의 공기를 엄청난 힘으로 빨아들이며 건물과 동굴, 참호, 지하 벙커 등을 파괴한다. 또 근처에 있는 병사들의 폐를 파열시킨다.
병사들이 참호나 지하 벙커 등에 몸을 숨기더라도 이 폭발의 충격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게 'ODAB-500'가 무서운 점이다. 일각에서는 이 폭탄이 요새 바로 앞에서 불을 내뿜는 '화염방사기'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ODAB-500 폭탄에는 날개와 방향타 제어 기능을 갖춘 모듈이 장착되어 있어 비행 중에도 경로를 수정해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
ODAB-500 폭탄은 Su-34 전폭기에 최대 4개를 장착할 수 있다. 러시아의 Su-34 보유대수는 냉전 이후 크게 늘어났으며, 2023년에는 생산이 더욱 확대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의 한 군인은 러시아 '활공 폭탄'의 공격을 '지옥의 문'에 비유하면서 "제트기가 바로 달려드는 것처럼 들린다"고 밝혔다.
ODAB-500의 폭발력을 3배 늘린 게 ODAB-1500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 북부 수미 지역 공격에 처음으로 ODAB-1500 활공 폭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일간지 빌트의 군사 전문가 율리안 뢰프케(Julian Repke)는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을 분석한 뒤 "최대 1km 높이의 연기 구름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며 "ODAB-1500 활공 폭탄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에어 폭탄 ODAB-1500의 수미 투하 모습/텔레그램 영상 캡처
◇속속 선뵈는 러시아 스마트형 폭탄들
러시아군은 지난달 북부 하르코프 공격시 또다른 활공 폭탄 'UMBP'(러시아어로는УМБП, универсальным межвидовым планирующим боеприпасом, 다목적 범용 활공 폭탄이라는 뜻/편집자)을 동원했다. 이 폭탄은 FAB-250 에어 폭탄에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갖춘 모듈과 방향타 등을 추가해 정확도를 높인 개량형이다. 특히 터보제트 엔진과 연료 탱크를 장착해 값싼 순항 미사일의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에도 UMBP 폭탄과 비슷한 것으로 'JDAM' 스마트 폭탄이 있다. 1년 전(2023년 4월) 미국 군사 비밀 문건의 대규모 유출 사건 당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JDAM에 탑재된 위성 유도 시스템의 오작동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끈질긴 장거리 미사일 제공 요청에 2022년 말 전폭기 장착 폭탄을 '스마트 폭탄'으로 바꾸는 변환 장치인 'GPS JDAM'(Joint Direct Attack Munition) 세트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바 있다.
미국의 JDAM스마트폭탄/사진출처:janes.com
러시아의 에어 폭탄 УМПБ(UBMP) D-30:사진출처:텔레그램
UBMP 폭탄은 항공기에서 투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제 지상발사 미사일 발사대 '토네이도(Tornado)-S'(러시아어로는 Торнадо-С)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측은 UBMP 폭탄을 러시아제 다중발사로켓시스템인(MLRS)인 '스메르치'(Smerch, Смерч)에서 쏜 것으로 믿고 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나중에 가려질 것이다. 사정거리는 '파브' 에어폭탄보다 긴 최대 90km다.
우크라이나 하르코프 지역 군사청의 올레그 시네구보프 청장은 "하르코프에 대한 러시아측의 공격은 UMPB D-30 폭탄에 의해 이뤄졌다"며 "매우 강력한 폭발력을 갖고 있으며, 위력은 활공 폭탄과 미사일의 중간 수준"이라고 말했다. 당시 하르코프에서는 최소 14개의 고층 건물, 의료 시설, 교육및 행정 기관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의 에어폭탄 '드렐'/사진출처:스트라나.ua
러시아는 또 지난 1월 새로운 활공 폭탄인 '드렐' (Drel, 러시아어로는 Дрель)을 대량 생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의 첨단기술 전담 국영기업체 '로스테크' 측은 "'드렐' 폭탄이 레이더망을 피해 목표물까지 날아가 장갑차와 지상 레이더 기지는 물론, 대공미사일 시스템이나 발전시설 통제센터 등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며 대량 생산 계획을 알렸다. '드렐'은 일종의 집속탄이라는 주장도 일각에서는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