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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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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의롭고 겸손한 기도와 삶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나는 착한 목자이다(I am the Good Shepherd).”(요한10,11ㄱ)
교황청 설교가의 세 번째 사순강론 주제 성구입니다. 이어지는 구절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ㄴ)는 주님 말씀이 깊은 위로와 평화, 치유를 줍니다. 착한목자 대신 어진목자 예수님이라하면 더 좋겠습니다.
강론을 듣는 분들 맨 앞자리 중앙에 앉아 있는 흰 교황복을 입은 교황님의 겸손한 모습도 좋았습니다. 며칠전에는 고해소 앞에서 흰 교황복을 입은채 무릎 꿇고 고백성사를 보는 모습 역시 너무 거룩하고 아름다워 스크랩하여 렘브란트의 “자비로운 아버지” 그림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참으로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 감동을 줍니다. 새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 겸손하고 의로운 기도와 삶임을 깨닫습니다.
“장상이란 생각하지 말고 목자라 생각하십시오.”
30년전 분원장 시절, 장상 아빠스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회나 수도회의 모든 장상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보고 배울 신망애(信望愛)의 모범이 예수님을 닮은 어진목자들입니다. 3월8-9일 양일 사이 대만의 가톨릭 대학에서는 “가톨릭과 유교와의 대화 모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유교는 서로 배울 것이 참 많다”라는 말마디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의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을 통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모두가 각자의 전장(戰場)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 비록 타인에게서 지옥을 마주할지라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다산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면 원망받는 일이 없다.”-논어
참으로 이런 이들이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자비와 지혜의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회개와 겸손으로 초대하는 제1독서 호세아를 통한 시처럼 아름다운 주님의 말씀이 참 눈물겹도록 감동스럽고 고맙고 위로가 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프라임아,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이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회개와 겸손, 신의와 예지의 촉구입니다. 봄비하면 즉시 떠오르는 19년전 봄철의 자작시 “봄비”입니다. 늘 읽어도 따뜻한 위로에 미소짓게 하는 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 봄철
회개하여 겸손과 온유, 진실과 사랑에 이른 이들이 바로 봄비같은 영혼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리와 같은 이들입니다. 세리의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의 기도가 가슴을 칩니다. 성전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미사시작전, 미사중에 자주 바치는 자비송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로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정말 회개해야할 사람이 바리사이입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참 무지의 바리사이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의 사람, 세리와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성전 앞에서 꼿꼿이 서서 “오, 하느님!”으로 시작되는 대화의 기도가 아닌 자기도취의 독백이며 온통 남판단하고 자기자랑하는, 전혀 불필요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정말 낯뜨겁고 부끄러운 자기과시의 내용들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의 기도라면 겸손하고 절실하고 절박해야 하는데 세리와는 너무나 다른 기도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자부, 자신하는 이런 이들의 회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으로 완고하게 굳어진 무지의 마음입니다. 봄비 은총이 참으로 절실한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입니다.
새삼 평상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겸손과 온유,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삶입니다. 기도와 삶 역시,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회개와 겸손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의롭고 겸손한 삶을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쟁취(爭取)가 아닌 회개한 영혼들에게 주님으로부터 하사(下賜)되는 의로움과 겸손, 온유의 은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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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 이제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 호세아서는 “자”로 시작하는데
오늘 저는 이 “자”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라는 말은 “자, 이제 조용히 하고 ---합시다.”처럼
지금까지 하던 것을 멈추거나 떠들고 있던 것을 멈추고
“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돌아가자.”와 “알도록 힘쓰자.”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줄곧 있었다거나 지금은 주님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자, 진정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다고 있지만 제가 참으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리사이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 있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의 의로움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다른 인간들 앞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세리 앞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간 정도로 하느님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고,
자기의 의로움을 보고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죄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세리이고,
“자,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진정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서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 주님을 알도록 애쓰자.”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뇌물을 좋아하고,
우리의 마음보다 십일조를 좋아하고,
겸손한 마음보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더 좋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결핍이 있는 인간처럼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 결핍을 인간을 통해서 채우려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it is love that I desire, not sacrifice,
and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자,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압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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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항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기 위해 늘 나 자신을 다그치곤 했습니다. 잠을 줄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시간을 쪼개 쓰면서 열심히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정말로 열심히 산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 스스로 그렇지 않음에 텅 빈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영적 쾌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다그쳐서 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물질적 쾌락을 따르려는 이유인 것처럼,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체험만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오히려 영적 교만에 쌓이기 쉽게 됩니다.
성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성당 사람들은 정말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적 쾌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잘못되었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영적 쾌락을 넘어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 영적 교만이 자리를 잡은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와 미덕을 하느님께 자랑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면서 이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쾌락에 빠져 있으며, 이를 넘어 영적 교만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상태, 이 순간에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쾌락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쾌락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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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정직하다. 혼자 있을 때는 자기를 속이지 못한다. 그러나 남을 대할 때는 그를 속이려고 한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것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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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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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죄인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 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곁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과 비난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도하면서 남을 험담하고 자기 자랑만 하고 있으니 하느님과 어떻게 가까워지겠습니까?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잘못이고 허물이며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을 받아들이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속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주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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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 성당으로 왔을 때 뉴욕에서 신부님들이 같이 왔습니다. 먼 여정 동행해 준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신부님들은 사제관의 시설들도 점검해 주었습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사제관의 컴퓨터를 치우고, 저의 노트북으로 다시 설치해 주었습니다. 엉클어져 있던 선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속도가 느려서 불편했던 인터넷을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 해 주었습니다. 회사에 전화를 하니 새로운 장치를 배달해 주었습니다. 저는 냄새에 둔감한데 신부님 한분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점검해 보라고 했습니다. 점검하니 가스가 조금 새고 있었습니다. 다행이 고칠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나올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습니다. 청결을 위해서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설치하였습니다. 열쇠로 열던 문도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번호 키는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댈러스에 온지 3일 만에 제가 바라는 것들이 해결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들이 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결혼한 부부가 잘 지낼 수 있는 5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다투고 싸운 날일지라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면 좋다고 합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자는 말이 있듯이 논쟁과 다툼이 있었을지라도 풀고 잠자리에 들면 좋다고 합니다. 기념일을 잘 챙겨 주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준비한다면 배우자는 감동할 것입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면서 함께 피정을 가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선물은 오늘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보내는 기분 좋은 말도 선물이 됩니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등산을 하는 것도, 골프를 치는 것도,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부부가 함께 하면 더 많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부부라고 할지라도 서로가 바쁘게 지내다보면 무심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물러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도 좋지만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대화는 부부의 관계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랜 불화로 결국 헤어지는 노부부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닭의 날개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헤어지는 마당에도 내가 실어하는 낡 날개를 주네요.” 사실 할머니는 닭의 가슴살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날개를 먹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날개를 좋아하지만 할머니가 날개를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가슴살을 먹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단식하였고, 봉사하였고, 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 율법을 잘 지켰고, 죄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하였는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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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늘 오늘과 같은 복음을 묵상하면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늘 높은 곳을 좋아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을 감추기보다 더 빛나려는 제 모습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선행을 하는 모습도 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복음은 그 이면의 모습을 제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 고개를 숙이도록 합니다. 주님 앞에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 제게 주신 은총이라 여깁니다. 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실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겸손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바리사이의 모습도 있고 세리의 모습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 두 개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마다 두 개의 가면을 번갈아 가며 쓰며 살아갑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모습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만큼은 바리사이가 아닌 세리의 모습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겸손은 우리는 하늘나라로, 밝은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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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한옥은
흙과 나무와 종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옥은 참으로 자연스럽구나!
자연에서 주는 선물
하늘이 준 선물 그대로 보금자리를 만들었구나!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흙과 숨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그래서 아름답구나!
하늘이 준 선물 그대로 사람이 만들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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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 하느님>
오! 하느님
당신께
갈 수 있으나
가지 않는 이에게
당신은
오실 수 있으나
허투루 오지 않으십니다
오! 하느님
당신께
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이에게
당신은
오시고 싶으시니
기꺼이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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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겸손
근엄한 바리사이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세리를 깎아내렸지요. 결국 그는 교만의 죄로 자신의 의로움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거룩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세리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지요. 그는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비를 간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태도로, 가슴을 치는 몸짓으로, 자비만을 구하는 간청으로 스스로를 고발했습니다. 그러니 교만으로 망해 버린 바리사이를 교훈 삼아,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거만한 몸짓은 의로움을 앗아 가고, 건방진 자기 자랑은 그가 받을 상을 앗아 갔습니다. 하느님께서 판결을 내리시기도 전에 자기를 치켜세우며 스스로 판결을 내리다가 비천한 죄인보다 더 못한 자로 심판받았지요. 결코 그대를 다른 사람 앞에, 그가 아무리 나쁜 죄인이라 해도, 내세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영성의 대가는 영혼이 몸속에 주어진 것은 정화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몸에서 분리된 영혼은 지성도 의지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때 영혼은 하나일 뿐이어서, 하느넘께로 돌아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영혼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 속에서만 지성과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몸 안에서만 영혼은 정화될 수 있고, 흩어진 것을 그러모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에 의해 흩어진 것들이 영혼 안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영혼은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는 힘을 얻습니다. 게다가, 영혼은 덕을 실천함으로써, 곧 일치된 생명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정화됩니다. 영혼은 일치된 생명에 의해 정화됨으로써 맑아집니다. 영혼이 대립이 없는 생명으로 뛰어들면, 흘어져 있던 모든 열등한 것이 통합될 것입니다. 지성의 빛속으로 들어간 영혼은 대립을 알지 못합니다. 이 빛에서 멀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죽음과 파멸 속으로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정화된 영혼은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다른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할 수 없습니다.(133)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다섯 째,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은 셈족계의 세 종교 중에서 가장 엄격한 알라의 유일성만을 강조하지만, 그 유일성이 당시 고대 문명 사회, 특히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 부족들의 가부장적 기치관과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군주론적 유일신론은 결과적으로 절대적 유일신의 뜻의 실현이라는 종교적 신념과 결부되어 ‘거룩한 전쟁' (지하드)이나 가부장적 일부다처제의 용납, 여성의 인격에 대한 경시와 사회 진출의 제한, 자비와 정의라는 신의 두 중심 속성 중균형을 상실할때 ‘신의 정의' 라는 이름으로 신정 정치 체계를 강화하면 정치 권력을 절대화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
군주론적 유일신론은 모세의 야훼 유일신 신앙이나 무하마드의 알라 유일신 신앙에 공통적이어서,, 모세나 무하마드가 각각 종교가 기틀을 잡고 적대적인 이교 사상이 그들의 높은 종교적 이상 실현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을 때 전쟁도 불사하며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전투를 지휘했다.
무하마드도 메디나로 옮겨간 뒤 5년 사이에 바드르(Badr), 우흐드(Ohod), 디취(Ditch)에서 치러진 세 차례의 중요한 전투를 직접 지휘했으며, 그가 사망한 후 이슬람교의 세계적 확산에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힘을 바탕에 깐 평화주의' 를 고수해 나아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초기 불교 경전이나, 갈릴리 예수의 초기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비교할 때 분명하게 드리나는 이슬람교 유일신 신앙의 특징이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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