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정림사지에서 부소산성, 고란사를 거쳐 고도문화사업소를 둘러보고 구드래 식당에서 쌈밥으로 끼를 때우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임천면 성흥산 대조사를 하루 걸음에 다녀 왔다.
조선일보 주말 섹션지에 담백한 정취의 정림사 오층석탑이 객을 맞는다. 이 사진은 폐허가 된 절터에 1400여 년 동안 역사의 증인처럼 자리를 지켜온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근은 몇 년 전과 판이하다. 오층 석탑 뒤로 있었던 건물을 철거하고, 기와 담장을 두르고 왼쪽으로 동산을 꾸몄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알뜰한 당신처럼 군더더기 없는 맵시로 아담하고 정갈하고 묵직하며 대가 집 맏며느리의 차림이다. 신라 석탑과는 판이함을 한 눈에도 알 수 있다. 국보 제9호 정림사 오층석탑은 1층 오른쪽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 새겨 두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말이다. 백제가 만든 정림사 탑신에다 새겼다. 그래서 '평제탑(平濟塔)'이라 하지만 1942년에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태평팔년무진 정림사대장당초)’라 쓰인 명문 기와가 출토 되어 ’정림사지’로 불리게 되었다. 백제가 만든 정림사 오층석탑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니 예서체로 쓴 글씨는 마모되어 돌은 바래 지고 형태조차 분간 못할 정도로 글씨도 낡았다
부여 탐방이라 1950년대 국민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온 ‘고적을 찾아서’라는 글을 되새겨 본다.
멧새들이 예서제서 지저귀는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부소산에 올랐다. 한적하고 깊숙한 맛이 어딘지 모르게 백제의 옛 향기를 풍기는 듯하여 부소산을 돌아볼 때 돌 한 개 기왓장 한쪽에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산마루 영월대를 지나 군창터를 찾으니 창고는 보이지 않고 타다 남은 쌀만 한 알 두 알 손끝에 잡히는데 백제의 한을 말하고도 남는 듯하다.
백제는 위례성에서 한산(廣州)으로 다시 북한산(漢陽)으로 웅진(公州)으로 옮겼다가 사비(扶餘)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경기에서 충청으로 도읍을 옮겼다. 마지막 도읍지가 사비성이다. 백제의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삼충사다. 추모도 없고 참례도 없이 사당 뜰에서 서성대다 자리를 뜬다.
백제 멸망 전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 말이 대웅전에서 죽었고, 백여우가 상좌평 책상 위에 앉았으며,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고,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에서 백제는 망한다고 울었다 한다.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 의자왕은 승리감에 취해 성충은 충언했다가 옥에 갇혀 죽었고, 흥수도 탄현을 지키라는 충언을 하면서 죽었다. 계백장군의 오천결사대도 5만 대군의 신라군에겐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13만 당나라군과 5만 신라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했다.
고란사엔 사월 초파일을 두고 연등으로 빽빽하다. 그 사이를 헤집고 조선 후기의 명필 해강 김규진이가 쓴 ‘백마장강’ ‘고란사’ 현판은 예나 다름없다. 절벽 아래로 백마강이 흐르고 강물 위로 보이는 바위가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다. 강 건너, 마을은 한가하고 한적하다.
지금도 백마강, 낙화암, 조룡대 삼충사, 영월대, 군창터, 사비루는 멸망의 한을 품었겠지. 사복사지를 보고 내려오니 이색적인 건물이 옛 부여박물관이다. 지금은 고도문화사업소 간판을 달고 있지만 고 김수근 건축가의 그 시대에 작품으로 유명세를 탔다. 정문이 일본 도리 닮았다 하여 난리를 쳤다. 그때의 정문은 없애고 부여동헌이 자리했다. 건물 자체가 기둥과 벽채는 없고 지붕이 주춧돌까지 내려앉은 모양이 특이하고 이색적이었다. 이런 발상의 건물을 김수근 건축가가 건축하였다.
담장을 따라 기왓장으로 골을 만들고 화강돌과 주먹돌로 물길을 놓아 작품 같았다. 곳곳에 황토에다 기왓장을 박아 보도블록으로 대신했으니 산수문양의 전돌에서 착안한 것 같았다.
공터는 백제 관북리 왕궁터로 잔디밭이다 황량한 바람은 산성으로 불고 새로 돋아난 잔디만 본색이다. 의자왕은 항복 한 달 뒤 왕자 4명과 귀족 88명, 백성 1만2807명과 당나라로 끌려갔다. 두 달 뒤 왕은 죽어 낙양성에 묻혔다. 당나라 병사들이 사비성을 휩쓸며 약탈한 광경을 망상하며 구들래 돌쌈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벽에는 4.50년 전에 영화 포스터가 붙었다.
구드래라는 지명은 삼국유사에 왕이 배를 타고 예불을 드리러 갈 때 사비수 언덕 바위에 앉아 망배 하자 앉았던 바위가 뜨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불렀다. 그 구들돌이 구드래로 변했다 한다.
일본에서는 물건의 품질이 좋지 않을 때 ‘구다라나이’라 한다는데 뜻인즉 ‘백제의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란다. 백제를 내왕한 일본 배들이 백제 포구의 ‘구드래’를 백제의 이름으로 착각 때문일까 무식함, 때문 일까
부여박물관의 돋보이는 유물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의 와당, 산수문양의 전돌, 금동대향로이다.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계곡 주차장 공사 도중 진흙 구덩이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난리를 피해 숨겨둔 것이라.
중국 조각사가 전공인 원위청(溫玉成)은 백제금동대향로를 '백제금동천계금마산제조대향로' '百濟金銅天鷄金馬山祭祖大香爐'라는 새로운 해석이란 논문에
향로 꼭대기에 새는 봉황이 아니라 ’천계天鷄‘다. 봉황은 머리 위로 두 가닥의 깃털이 있고 꼬리에도 깃털이 있지만 금동대향로의 새는 닭벼슬과 꼬리를 지니고 있어 한 마리의 수탉, 꼬리 긴 닭(長尾鷄)이 틀림없다.
천계의 부리와 목 사이에 끼어 있는 둥근 알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크기가 닭과 같은 어떤 기운에 의해 생긴 천란(天卵)으로 수탉이 생기고 천계의 아래쪽에 발로 움켜쥐고 있는 큰 타원형의 일은 유화가 낳은 크기가 다섯 되 정도는 것으로 동명왕을 품은 알임을 추축할 수 있다.
높이 두어 자 남짓한 대향로에는 어느 한 부분도 그대로 놓아둔 밋밋한 면이 없다. 향로의 몸체를 이루는 연꽃판도 꽃잎만 두지 않고 꽃잎에 청어鯖魚 비토飛兎 선조仙鳥 등의 모습을 부조해두고, 꽃잎과 꽃잎 사이에도 날짐승과 물짐승을 새겼다.
향로의 윗부분 ‘봉래산’을 새겨 놓은 뚜껑은 20cm 높이에 4단, 5단으로 굽이치는 74개의 산봉우리와 계곡을 이루고 계곡에는 폭포가 흐르고 나무와 꽃이 자라고 사이사이에 이승저승이 생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다섯 악기를 연주하는 오악 사상, 기마상, 선인상 등 16명의 인물상이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느냐’하는 것이다. 대향로는 백제의 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불사초가 있는 蓬萊山이나 桃都山이 아니라 백제의 개국의 금마산(金馬山)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의 조형은 음양오행학설을 바탕으로 하늘을 숭배하고 조상에 제사 지내는 관념을 핵심으로 설계 제조된 하나의 걸작이다. 향로이름은 백제금동천계금마산제조대향로(百濟金銅天鷄金馬山祭祖大香爐)라고 하는 것이 부합되는 것이라고, 그런 관점으로 보면 보는 멋이 깊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