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그 남자, 찬영.
여기는 천재영이 자주 찾는 도서실.
평소 책과 깊은 인연을 맺은 적이 없었던 나는
내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독서 중이시다.
그러나 까만 글씨들을 쳐다본지 10분도 안지나 또 졸음이 쏟아진다.
천재영은 저 꺼벙하게 생긴 도서위원 여자애랑 친한지 가끔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해맑게 웃어댔다.
심통 나.
저 대화의 20%도 못 알아듣겠다니.
“정란아. 나 니가 다니는 독서실 오늘부터 갈래.”
“천재영 좋아하더니 갈수록 맛탱이가 가는구나, 니가.”
친구가 공부라는 걸 해보겠다는데 그런 식으로 싸그리 비웃을 필욘 없잖아.
표정란 나쁜 계집애.
친구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응원가 삼아, 아빠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정란이가 다니는 “새찬 독서실”로 들어갔다.
정란이는 학원마치고 오기 때문에
4시간가량을 새로운 환경에서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래. 원래 학문은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름 깔끔한 젠 스타일의 취향을 가졌다 자부하는 표정란의 독서실이라 믿었건만,
아주머니를 따라 들어간 방은 여자방과 남자방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남녀 혼방"이였다.
이년 공부는 안하고 남자보는 재미에 독서실 다니는 거 아냐?
이런데 정신을 팔아선 안 되지.
정신일도 하사불성!!!
난 독서실의 하얀 형광등 빛이 쏟아지는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30분까지는 견딜 만 했다.
그러나 어느새 정란이 서랍에 있는 만화책을 꺼내 쿠득거리며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2시간째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도 흘려가며
열심히 만화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뜨어어억....
윌리엄이 엠마를 문 앞에서 껴안으며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숨을 죽이고 눈물을 삼켜가며 열심히 보고 있는데
뒤에서 열라 떠드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크크큭..니 여자친구 죵니 이쁘더라~"
"그래? 아 몸매가 별루야."
"하긴..너 얼굴에 그 정도 애라니. 니가 아깝다."
"그렇지? 그래서 나도 요즘 깰까 생각중이야."
떠드는 것도 짜증나는데 대화의 내용마저 나를 짜증나게 했다.
한번만 참자.
한번만 더 저따위 내용으로 떠들기만 해봐.
말하는 고 이쁜 입들을 조져줄꺼야.
다시 독서에 몰입했다.
이번에는 윌리엄의 약혼녀 아버지가 못된 짓을 해대는 장면이었다.
크흐흐흑..어떡해. 어떡해.
"근데 너 갑빠 장난 아니다?"
"요즘 운동을 해서 그래"
"어우 부럽다 야. 멋있어."
"뭘 너도 나처럼 되고 싶으면 운동해. 별거 아냐."
"너는 몸매가 되서 뭘 입어도 옷태가 나 좋겠다."
"하하하하하...뭘..."
하하하하하..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내 옆 좌석의 중딩도 상당히 짜증난다는 표정이었고
나도 저 따위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저기 조용히 좀 하면 안돼요?"
내 목소리에 그것들은 잠시 수다를 멈췄다.
하지만 잠시 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씨발 어떤 개년이야?!!!!"
"야.... 참아라. 보나마나 눈 버린다."
저 새끼들이!
"니네 눈만 썩냐? 내 귀도 썩는다!!!"
그때의 내 깡은 하늘 높은 줄 몰랐나 보다.
말하고 나서 당장 후회했다.
앞의 칸에서 그 놈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누구야? 어디 한번 보자."
그 놈들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무서웠기에 독서하는 척을 했다.
난 줄 모르겠지? 모를거야. 여기 얼마나 많은 애들이 앉아있는데.
마침내 그놈들은 내가 있는 칸에까지 왔고 내 쪽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그때 갑자기 내 옆에서 공부하던 중딩년이 말했다.
"이 언니가 그랬어요."
이런 간첩 같은 년을 봤나.
나는 각오하란 눈빛을 그 얄미운 어린 년에게 한번 찍어주고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놈들을 올려다봤다
"하핫. 이년 졸라 어이없네. 너 잠깐 나 좀 보자"
그놈들은 인상을 한번 쓰고 나에게 따라 나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참내. 그러면 내가 겁먹을 줄 알고?
상당히 겁먹었다. 졸라 무서웠다.
알지 않는가? 난 표정란의 주먹도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아까 대화 중에 운동하는 놈도 있다는데.
나는 뒷동산에 버려진 채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식어가는 처참한 나를 상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등줄기에 시원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순간 재영이가 너무나 보고 싶다.
죽기 전에 꼭 니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었는데. ㅠ_ㅠ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그 자식들을 따라 독서실 옥상으로 따라 올라갔다.
그놈들은 하나같이 까만 밤에 주황빛 불똥을 밝히며 나를 사납게 야려대고 있었다.
"키 졸라 작네. 아가야, 니 학교 어디냐?!"
그 중 젤로 인상 구린 놈이 침을 찍 뱉으며 물었다.
"아, 알아서 뭐, 뭐하냐!"
이미 목소리는 굳게 먹은 마음을 배반한 채 떨려나오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주먹 쥔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제길.
"야 너 나 알지?"
걔 중에서 젤 얼굴이 나은 놈이 왈왈 짖는다.
"니, 니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야 나 진짜 몰라?"
"당연히 모르지. 니가 연예인이냐? 사람들이 다 널 알게?"
차츰 용기를 내서 지랄하는 내가 황당하다는 듯 그 자식들은 미친 듯이
쳐 웃어대기 시작했다.
내 지랄에 무안직격탄을 먹은 그 놈만이 알딸딸한 표정으로 빤히 나를 쳐다본다.
놈들이 웃건 말건 나는 더욱 크게 지랄을 했다.
아마도 금방 학원에서 돌아올 표정란 하나만을 그렇게 믿고 지랄했나 보다.
"야! 너네 독서실에서 그렇게 떠들어도 돼?
사람들 공부하는데 방해되잖아.
떠들려면 나가서 떠들어!! 공부 좀 하게!!"
"아까 보니까 너 만화책 보고 있던데. 너네 학교는 만화책으로 공부 하냐?"
예리한 자식. 그 짧은 순간에 그걸 다 보다니.
내가 너무 방심했었군.
"그, 그건 유익한 과학만화야!!
알지도 못하면서!!"
나 너무 재치있다.
"어쨌든 앞으론 좀 조용히 해줘."
나는 저 말을 남기고 눈썹이 날아가도록 옥상에서 빨리 내려왔다.
놈들에게 보일 뒤통수 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경보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독서실에 내려오자마자 가방을 쌌다.
그놈들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야해.
내가 문제집과 표정란의 만화책을 쑤셔 넣고 있자
아까 내 행각을 꼰댔던 밉쌀구리 중딩이 말했다.
"언니..너무 무모했어요."
"닥쳐!"
진짜 얄미운 년.
내일 독서실 아줌마한테 다른 방으로 옮겨달라고 해야겠다.
"언니 근데요...."
"니 말따윈 듣고 싶지 않아!"
"근데...."
"씁!!"
"뒤에 그 오빠들 와요."
오우 쒜에트!!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그들은 독서실을 빠져나갈 구멍이란 구멍은
다 봉해 논 상태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새끼가 된 것이다.
아까 자기 아냐고 미친 소리를 지껄인 놈이 불쑥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끈다.
그리고 다른 좌석의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 나 본적 있지?"
"이런 미친."
"난 니 얼굴이 진짜 낯익은데.
어서 우리 만난 적 있어!! 기억해봐!!"
놈의 면상때기가 더욱 바싹 내 얼굴로 다가왔다.
지 얼굴 좀 보고 기억해달라는 듯 애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놈은
내가 끝까지 띨구같은 표정을 일관하자 지쳤는지 내 손을 놓아주었다.
지 친구들 쪽으로 걸어가던 놈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내 이름이 윤찬영이거덩?
우리 뭐 동창 이런 거 아니었는지 떠올려봐!!
씨발. 존나 어디서 봤는데."
뭐야? 저새끼.
심하게 구린 뒤끝을 남긴 채 그 놈은 지 친구 무리를 이끌고 독서실을 나갔고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뻥져 서있다 밉살탱이 중딩년의 도움으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가방 안에 사정없이 구겨 넣어 앞이 다 접혀진 엠마를 도로 꺼내곤
방금 전 재수황 같은 무리들을 잊기 위해 독서에 전념하려 책을 펼쳤다.
다음날, 지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 나는 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가득 담고
독서실로 가는 길이다.
어제처럼 만화책이나 보며 시시덕거리지 않으리.
굳은 결심을 하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독서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옴메야~!”
독서실 신발장에 기대 서있는 어제 안 좋은 추억을 공유한 녀석 때문에 식겁할 뻔했다.
지나가다 적을 만난 고양이처럼 털이 쭈삣 서는 기분이었다.
“야 꼬맹이. 책가방 뚱뚱하다? 그것도 전부 만화책?”
윽, 웬 관심이셩?
나는 그 녀석을 개무시로 일관하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어딜 가?”
헉! 깜짝이야.
실내화로 갈아 신자마자 가방을 잡아당겨 나를 벽에 몰아세운 놈은
오른 팔을 내 귓가에 짚고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 시간 있어?”
키 차이가 엄청 나는 관계로 코가 이놈의 가슴팍에 닿을 것 같다.
쌀쌀한 공기 냄새와 담배 냄새가 확 끼쳐온다.
“훗. 지금 나한테 찝쩍대는 거냐?”
“니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너 진짜... 씨발 존나 누구 닮았는데.
내가 궁금한 건 못 참거든. 하루 종일 보면서 생각해보려고.”
나한테 반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옛날 수법쓰긴.
그러나 아이야. 이미 늦었단다.
난 이미 천재영이란 내 낭군님께 모든 마음을 다 받쳤거든.
나의 한심하단 눈빛이 느껴지는지 놈은 무안함에 헛기침을 하더니
“일단 따라와봐” 하며 내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 1층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버거킹 햄버거를 우거적 씹어 먹고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내가 먹는 것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 놈이 부담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권아미. 이름도 졸라 낯익어.”
이런 상황에서 나의 친구 표정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깝싸고 있네.
“누구지 대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진정 고뇌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놈이 사준 햄버거는 너무 맛나다.
저녁 사먹을 돈 굳혔네.
“윤찬영, 여기서 뭐해?”
녀석의 이름을 친근감 있게 부르며 버거킹에 출몰한 사람은 누가 봐도 예쁘다할 여자애였다.
동그랗고 큰 눈에 청순한 까만 긴 생머리를 한 여자애는 녀석의 어깨를 안다시피
팔로 감싸며 친한 척을 해댔다.
놈도 그 낯 뜨거운 애정표현에 별로 개의치 않는지 고개를 들어 여자애가
누군지 확인하고는 다시 고뇌에 빠졌다.
“쟤 누구야?”
예쁜 애가 나를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보며 묻는다.
“그러게 그걸 모르겠다니까.”
“왜 모르는 애랑 이런 델 왔어?”
얼른 버거 먹고 꺼져야지.
앉아있다간 저 예쁜 애한테 괜한 오해 사겠다.
나는 반쯤 남은 와퍼를 입 안에 쑤셔 넣듯 밀어 넣었다.
그런 내 모습을 혐오스럽다는 듯 예쁜 여자애는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길 잃은 초딩 밥 사주는 거야? 윤찬영 착하네.”
그러자 놈은 갑자기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더니 초딩이란 소리에 심기가 불편한
내 얼굴을 뽕 맞은 사람처럼 멍하게 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생각났다. 권아미.”
그리고 녀석은 고른 치열을 자랑하며 활짝 웃었다.
윤찬영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3개월가량 짝꿍을 했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 당시 파푸아뉴기니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환경이 다 낯설었고
애들 말도 50% 정도 못 알아들었을 때였다.
수업이 너무 어려워 머리에 총 맞은 애처럼 멍하게 앉아있기 일쑤였던 나날들.
기억이 제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다.
“니 진짜 하나도 안변했다. 초딩 때 그대로네.”
새끼 단번에 못 알아본 주제에 하나도 안변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
윤찬영 옆에 아예 자리를 틀고 앉아버린 얼굴만 예쁜년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나를 줄기차게 쏘아보았다.
“나 피곤해 찬영아.”
“피곤하면 니 집에 가. 권아미 교복 보니까 하얀고 다니냐?”
얼굴만 예쁜년의 야림이 더욱 거세진다.
진짜 미치도록 공부가 하고 싶구나.
시덥지 않은 이 커플 사이에서 나는 여기 왜 이러고 있는 거냐?
“권아미!!”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효 같은 그 소리에 나는 가게 문 쪽으로 눈을 반짝이며 돌아봤다.
“역시 니 맞군. 니는 공부는 안하고... 누, 누구냐?”
정란이는 뜻밖의 인물 윤찬영과 그의 여친으로 추정되는 얼굴만 예쁜년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윤찬영은 정란이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인상을 구기며 훑어봤다.
“나는 그럼 이만 가 볼께. 만나서 반가웠어.”
반갑긴 개뿔이었지만 일단은 빈말로 그렇게 인사를 하고 정란이의 등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뭐야? 저 놈은 뭐고?”
버거킹을 나오자마자 정란이가 호들갑을 떨며 추궁질을 해댔다.
“초등학교 동창. 우리랑 같은 독서실인데 우연히...”
라고 하기엔 너무나 살 떨리는 만남이었지. 어제는.
하여튼 동창이든 뭐든 착한 아이도 아니고
왠지 질 안 좋아보이고 날라리 같은 저런 아이는 더 이상 말 섞지 않는 게 좋아.
s(-ㅅ-)(-ㅇ-)v 아미 논스톱 v(-ㅅ-)(-ㅇ-)z
웅성웅성.
방과 후 교문 앞은 여느 때와 달리 병아리 장수 아저씨가 찾아온 초등학교 앞만큼이나
북적거렸다.
뭐 좋은 구경이라도 났나? 정란이가 큰 키를 이용해 교문 밖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데
“아씹 개년, 좀 비켜.”
우리학교 양아치 함태양이 내 어깨를 치고 교문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 뒤를 서율과 이름 모를 얼굴 구린 양아치무리들이 뒤따랐다.
“역시 실물도 재영이가 훨씬 낫구만.”
“니는 이 뭔가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내 재영이타령이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못한 건가?
내 머리에 상냥하게(;) 알밤을 까주는 정란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나와 현경이의 발걸음을 저지한다.
정란이는 가늘게 실눈을 뜨며 교문 밖 쪽을 보더니 확신이 들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권아미 저 새끼 어제...”
뭐여. 나는 보이지도 않구만.
“니 초등학교 동창 놈이라는 그 놈 같은데?”
“엑?!”
나는 애들이 몰려있는 교문 앞에서 까치발을 해 밖을 보려 노력해봤으나,
그건 내 키에 가당치 않은 노력이었고... 애들 틈을 겨우겨우 비집고 나가 앞에 섰다.
“꼬맹이.”
진짜 윤찬영이다.
윤찬영은 낑낑대며 비집고 나오느라 마구 헝클어진 나를 보며 얄밉게 씨익 웃어 보인다.
“함태양. 오늘은 나 이 꼬맹이 보러 온 거다.”
“그래서?”
아까 모양 빠지게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우리학교 양아치 함태양은 녀석 앞에서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서있었다.
느끼한 서율도 구역질나는 눈빛으로 녀석을 노려본다.
“그러니까 오늘은 조용히 보내주라.”
움찔하는 함태양을 지나쳐 내 앞으로 다가온 윤찬영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내 발끝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윤찬영의 얼굴에는
예감이 좋지 않은 이죽거리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윤찬영을 따라 온 곳은 학교 근처 아파트 놀이터.
놈은 몇 분전부터 가만히 나를 보기만 했다.
뭔가 숨 막히는 눈동자로 계속.
나는 긴장한 채로 윤찬영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찬영이 교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불을 붙이고 구름 같은 연기를 한 모금 내뱉고...
그리고 변태같이 교복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 둘 끌러나간다.
“너, 너 뭐하는 거야?”
이런 개변태새끼한테 농락이나 당하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게 아닌데.
이 새끼는 대체 변태 경력이 몇 년 차인지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너무나 태연하게 옷을 훌러덩 벗고 있었다.
“내가 어제 깜빡하고 말 안했는데 말이야.”
담배를 물어 발음이 새는 목소리로.
윤찬영은 내가 서있는 미끄럼틀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이거 기억나?”
윤찬영이 등을 돌리며 어깨에 보기 흉하게 꿰맨 듯한 꽤 큰 상처를 내 눈앞에 들이댔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초등학교 때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당황스럽게 그런 상처를 내밀어봐야 나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다.
“어, 어떻게 다친 거야?”
반쯤 벗어 내렸던 셔츠를 팔을 들어올려 입으며 돌아보는 윤찬영의 눈빛이 싸늘하다.
“진짜 기억 안나? 니 년이 그랬잖아.”
왜 하나님은 나에게 재앙 같은 기억력을 주셨을까?
난 도대체 13살 그 쪼끄만 나이에 어떻게 저런 큰 상처를 만들어 준거야?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표백제를 쓴 듯 날아간 기억으로
무슨 얘길 어떻게 하겠나 싶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담뱃재를 손가락 끝으로 탁탁 털어대던 윤찬영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말했다.
“다시 안 만났다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여태껏 보았던 그녀석의 표정을 모두 지워버리는,
지독하게 악마 같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기대해. 졸라 괴롭혀 줄 테니까.”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장편 ]
아미 논☆스톱 vol. 08
치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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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26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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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영이의 활약이 기대돼요
감사합니다..ㅠㅠ 사악하게 잘 그려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