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w Life, 2021년 추석에, 슬픈 추억
내게는 슬픈 추억이 참 많다.
내 나이 열여덟로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서른셋 꽃다운 나이의 울 엄마를 잃었고, 뒤이어 우리 집안에 몰아닥친 가난으로 향학의 꿈을 접고, 날품팔이 노동판을 전전하는 슬픈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내게 있어 그 세월에 쌓인 사연들은 하나같이 슬픈 추억들이 되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더 슬픈 것은 배고픈 추억이다.
특별히 배고팠던 추억이 하나 있다.
군 입대하기 직전이었으니, 거슬러 55년 세월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용산역전의 저탄장(貯炭場)에서 막노동으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
집안 어른이 그 저탄장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탄 장사를 했었는데, 그때만 해도 활황이었던 문경 봉명광산에서 열량 좋은 괴탄이 화차에 실려 오면 그 괴탄을 일꾼들과 같이 지개에 지고 내려서, 정해진 구역에 쌓아뒀다가 서울 전역의 주물공장으로 화물차에 실어 보내는 일을 했었다.
주어진 신분이야 회계였지만, 실상 하는 일은 괴탄을 지개에 지고 나르는 일이나, 쌓아놓은 괴탄이 흘러내리면 다시 퍼 올려 되쌓는 삽질을 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주된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고 받는 봉급이란, 나 혼자 먹고 살기에 딱 맞는 막노동꾼의 일당 정도였다.
나 혼자 먹고 살 것이라면 배고플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형편이 그렇지를 않았다.
엄마 잃은 7남매의 장남으로서, 아직 철부지들인 여섯 동생까지 챙겨야 했었다.
그때 40대 초반이었던 아버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져 일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 먹었고, 마지막 남아있던 초가삼간마저 남의 집이 되고 말았다.
온 가족들은 방 두 칸짜리 셋집으로 밀려났고, 돈 벌만한 동생 둘은 뿔뿔이 가출을 했다.
그래도 나는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열 살도 채 안된 철부지 동생들의 끼니라도 때울 벌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고향땅 문경 점촌역전 저탄장에서 막노동꾼 일을 했다.
그러나 쪽이 팔려서 도저히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고향땅에서 국민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 그래도 전교에서 때론 1,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내가, 탄가루 덮어쓴 막노동꾼으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였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다.
결국 집안 종손이고 장손이고 맏이인 나까지 가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다면서 또 다른 일거리를 찾는다는 것이, 또 용산저탄장의 막노동꾼이었던 것이다.
먹는 것을 아껴야 했다.
그렇게 아껴 남은 것으로, 고향땅에서 헐벗고 배고픈 동생들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내가 주로 때운 끼니가 바로 라면이었다.
그 끼니도 아침저녁 두 끼였고, 점심 한 끼는 그냥 굶었다.
라면 또한 배부르게 먹지 못했다.
라면 한 개로 아침저녁 두 끼를 모두 해결했다.
그 해결 방법이 이랬다.
아침에 라면 하나를 끓이는데, 일단 물을 많이 부어서 끓이고, 끓인 후에 녹말가루 한 줌을 넣어 꾸들꾸들하게 식힌 뒤에, 그 꾸들꾸들해진 라면을 절반으로 딱 쪼개서, 하나는 아침에 먹고, 남은 하나는 저녁에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운 것이다.
그렇게 허구한 날을 그렇게 불어터진 라면을 먹으면서, 내 슬프게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즈음에 유행하던 색소폰 연주곡 ‘슬픈 로라’는 이미 슬픈 나를 더 슬프게 했었다.
마침 점심때였다.
남해 편백자연휴양림 매점에서의 끼니를 때울만한 먹을거리라고는 컵라면 그 한 가지밖에 없었다.
어쩔 수없이 컵라면으로 점심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까마득한 그 옛날의 배고파서 슬픈 추억의 사연 한 토막이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