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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
채수일 /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장·목사
1. 장로교의 역사와 신학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es)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인데, 그것은 장로교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의 복잡성과 그 후에 전개된 장로교회의 교파적 분열과 신학적 다툼 때문이다.
장로교는 신약성서에 직접적으로 근거한 교회법과 관계되어 있는데, 그 교회법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동등한 권리와 유일한 직제인 장로직을 통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표현되어 있다. 장로는 교인들의 선거로 선출되며, 이런 장로교 정치는 민주적이고 공화 제도적인 국가 형태와 형식적인 유비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장로교는 의식적으로 교황 체제와 주교 중심의 교회 정치에 반대했다.
일반적으로 앵글로색슨 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장로교회는 성공회(Anglikanismus)와 회중교회(Kongregationalismus) 사이에 있었는데, 회중교회는 개별 교회보다 상위에 있는 직제를 전적으로 부인한 반면, 성공회는 성직을 감독, 사제(장로), 집사로 삼등분 했다. 직제의 유일성은 장로교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근본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지양한다.
종교개혁 시기에 장로교의 근본 입장은 1523년 10월 26일,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 천명되었는데, 그 후 취리히의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년)와 바젤의 외코람파드(Oekolampad)에 의해서 기존의 도시 귀족들과 표결을 통하여 약화되었다. 이들과 반대로 제네바의 칼뱅(Johannes Calvin, 1509-1564년)은 법적으로 완전한 교회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칼뱅의 이런 입장은 특별히 스코틀랜드 출신의 그의 제자 존 녹스(John Knox, 1514-1572년)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는데, 녹스는 스코틀랜드교회를 가장 전형적인 장로교로 만들었다. 스코틀랜드는 1557년 에딘버러에서 영주들이 모여 개혁 신앙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할 만큼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 의회는 1560년 가톨릭교회의 교리, 예배, 정치 제도 등 일체를 금지하고, 칼뱅주의 개혁교회로 스코틀랜드교회를 법령화함으로써 장로교를 출발시켰다. 이 때 채택된 신앙고백(The Scotch Confession)은 칼뱅의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했고, 은총에 의한 하느님의 선택, 하느님의 불가항력적인 구원 행위,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성찬례)의 집행처로서 교회,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서의 권위 등이 그 핵심을 이루었다. 녹스에 이어 스코틀랜드 개혁운동을 주도했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62년)은 감독주의를 반대하고 장로회주의를 확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 교사로 나누고, 노회 제도를 도입하여 노회에서 목사 안수와 훈련을 시행하게 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한편 스페인의 통치 하에 있던 네덜란드에서는 찰스 5세가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년) 저작물의 반입과 개혁적인 집회를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1540년대부터 칼뱅주의가 네덜란드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했는데, 그것은 지방 영주들의 후원을 힘입어 종교개혁을 추진한 루터보다 전제 군주로부터 해방을 주장한 칼뱅의 개혁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과의 독립 투쟁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적 신앙과 교리를 확립하면서 교회를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1574년 총회에서 인준된 ‘벨기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은 ‘하이델베르크 신앙 문답’과 함께 네덜란드 장로교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의 장로교는 1523년 남 프랑스의 왈도파들이 칼뱅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는데, 1555년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개혁주의자들이 르 마콘(John Le Macon)을 목사로 선출하고, 칼뱅이 제네바에서 조직한 교회 제도에 따라서 장로와 집사를 선출함으로써 제도화되었다. 1559년에는 프랑스 장로교 총회를 파리에서 개최하고, 프랑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장로교인이 될 정도로 급성장했으나,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박해와 수난의 역사를 겪었다. 1572년의 이른바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사건(파리에서만 3천 명 이상, 전국적으로는 2만 명 이상의 장로교인들이 학살당한 사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대규모 망명(약 50만 명의 프랑스 장로교인들이 종교적 탄압을 피해 영국, 독일, 네덜란드, 미국 등으로 갔다) 등으로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장로교회는 다양한 역사적 경로를 통하여 수많은 교파로 다시 분열되었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등 유럽은 물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아시아 등으로 확대된 장로교는 그 역사적 전개 과정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크게 보아 장로교회는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에 공통 근거를 가지고 있고, 루터보다는 칼뱅의 지도와 신학적 전통 위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말 이미 루터교회와 구별하기 위해 자신을 개혁교회(ecclesiae reformatae)라고 부른 장로교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리와 교회 정치 구조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로교를 개혁/장로교회라고도 말한다. 장로교는 일반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을 그들의 기본 신조로 여겼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7년에 채택된 영어 사용권 장로교인들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뱅 신학을 수용하고 있고, 논쟁적인 문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당시 모든 장로교인들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 후에도 장로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신앙고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신앙고백의 다양성에도 개혁/장로교회는 그 기저에 언제나 칼뱅의 신학적 중심 원리를 두고 있다.
개혁교회 신학의 창시자는 츠빙글리였고, 두 세대 동안 개혁교회 신학을 만드는 데는 칼뱅 외에도 부커(Martin Bucer, 1491- 1551년)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년)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칼뱅은 비록 개혁교회 신학의 창시자는 아니었지만 성서 주석의 내적 통일성을 보이면서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16세기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조직 신학자가 되었다.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36년; 1539년; 1543년; 1550년; 1559년에 개정)는 그의 대표적 저서로서 그의 신학적 사고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에 따르면 개혁/장로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보기’ ‘성령의 내적 증거(interius spiritus testimonium)로 성서를 이해하기’ ‘그리스도의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서 삼중직(Lehre vom dreifachen Amt Christi)’ ‘하느님의 주격성’의 강조와 ‘피조물의 신격화에 대한 절대적 부정’ 구원의 확실성으로서 ‘예정론’ ‘신앙에 앞선 성령의 강조’ 곧 인간이 의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주체도 인간의 종교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적 삶’의 강조, 다시 말해 ‘성화론’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 장로교의 역사와 신학
2.1. 한국 장로교의 역사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는 곧 장로교회의 역사라고 할 만큼 장로교회의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신자의 한 사람이며, 성서 번역을 한 서상륜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에 소속되었던 로스(John Ross)와 메킨타이어(John McIntyre) 선교사에게 장로교회 예식에 따라 세례를 받았고, 일본에서 성서를 발간한 이수정 역시 재일 장로교 선교사 녹스 등과 교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4년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의사 알렌(H. N. Allen)과 1885년에 온 언더우드(H. G. Underwood) 역시 미국 북 장로회에 소속된 선교사였다.
북 장로회에 이어 1892년에는 미국 남 장로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 주로 호남 지역을 맡아 선교했고,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가 데이비스(J. H. Davis) 목사 남매를 보내, 경남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1898년 캐나다 장로교는 의사 그리어슨(Robert Grieson), 목사 푸트, 멕레(Duncan M. McRae) 등을 파견했고, 이들은 주로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선교지로 삼았다. 미국 장로교와는 달리 캐나다 장로교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의 새로운 신학 형성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금은 한국 장로교회가 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지만 결국 스코틀랜드 장로교, 미국의 북·남 장로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개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장로교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2.2. 한국 장로교의 교파
장로교는 한국교회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190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안수를 주기 위해 같은 해 9월 17일,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들과 36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한국 장로교 첫 노회(독노회)를 창설함으로써 최초의 한국 장로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 독노회는 1912년 7개 노회로 분립,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구성했다. 이렇게 출발한 한국 장로교는 이미 1910년 최중진 목사의 자유교 선언에서 분파적 요소를 보였고, 무교회주의, 신비주의 운동 등 장로교 밖의 인물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가 결정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였는데, 한국 장로교는 고신파의 분리(1952년), 기장의 분리(1954년),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의 분리(1959년), 합동파가 다시 사당동파와 방배동파로 분열(1979년)하는 길을 걸어 왔다. 이렇게 규모가 큰 장로교들 외에도 단독으로 생성된 장로교는 1980년 당시 29개 교단이었으나, 1994년에는 40여 개 장로교로 분열되어 문화관광부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싼 고신파의 분리, 신학적 논쟁으로 분리된 기장,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권 문제에서 기인한 통합과 합동의 분리는 비교적 역사적, 신학적 정당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합동 측 내부의 지속적인 분열은 나름대로 신학적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교권 다툼, 지역 이기주의로 소급된다.
2.3. 한국 장로교의 신학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은 초기에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사회적, 신학적 배경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중산층 출신이었다.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중산층 특유의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가난하고 지적으로 열등한 비서구 지역의 야만인들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도덕적 확신, 문명적이고 인종적인 우월감, 문명화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던 19세기의 시대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미국에서는 산업 혁명의 성공으로 산업 자본주의가 완성되던 시기였고, 미국 자본의 해외 진출과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의 이해 관계가 서로 맞물릴 수 있었다. 또 같은 시기에 여러 차례 일어난 대 각성 운동(Great Awakening Movement)을 통해 촉발된 부흥운동의 열기와 하느님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미국인을 선택했다는 확신, 서구 문명과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 등이 이들을 ‘이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세계 선교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의 중산층 배경과 복음적 신앙은 결과적으로 윤리적, 종교적 엄격성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들은 성서 문자주의, 주일성수, 조상 숭배의 배격 등 종교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춤, 도박, 음주와 흡연의 금지, 근면과 저축, 절약하는 생활 태도 등 윤리적 영역에서도 엄격성을 요구했다. 교회의 신앙적 순결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신자들의 윤리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가 결국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타종교와 전통 문화에 대한 독선적 배타성, 개인적 경건에 대한 관심, 친미주의 성향, 그리스도교 신앙과 서양 문명의 동일시, 신학의 보수적 근본주의를 강화시켰던 것이다.
그밖에 미국 선교사들이 남긴 중요한 신학적 태도의 하나는 이른바 정치와 종교의 분리였다. 선교사들은 정교 분리의 원칙이 서구 문명 국가들의 사회적 원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점에서 개신교가 가톨릭과 구별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한국 개신교의 가톨릭에 대한 배타성의 근거에는 이런 정치적 태도 외에도 마리아론, 교황 체제 등에 대한 오해나 왜곡된 정보에 의해 각인된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정교 분리 정책은 그 후 진보적 교회들의 사회 선교적 참여를 비판하기 위한 보수주의자들과 군사 독재 정권의 도구로 이용되기는 했지만, 신사 참배, 대통령 조찬 기도회 등 독재 권력의 정당화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서는 이용되지 않았다.
3. 장로교의 영성
나는 영성을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종교 체험(또는 신 체험)을 바탕으로 한 믿음과 삶, 생각과 행동, 이론과 실천의 합일로서 생명의 충만과 역사의 구원을 지향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영성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느님의 주격성,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개혁/장로교회의 고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개혁/장로교회는 인간의 종교 체험이 하느님의 말씀의 응답과 혼동되어 경건주의로 전락하거나, 종교적 자의식의 표현으로 치환되거나, 신비주의적 체험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했고 지금도 경계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명제도 의롭게 하는 하느님의 구원 행동에 초점이 있지 인간의 믿음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장로교회는 인간의 종교 체험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시도나, 인간이나 제도의 신격화, 공적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비판한다. 그래서 개혁/장로교회에는 영성의 훈련, 제도화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칼뱅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 속에 있고 죽기까지 의롭게 되어야 할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윤리는 하느님의 계명으로서 명령에 대한 복종에 기초한다. 계명에 대한 복종은 강력한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짊어지는 제자의 길을 강조하게 했다.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희망에서 인내를, 소명에서 책임을, 예정에서 내적 확신을 얻어 날마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거룩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칼뱅은 ‘그리스도의 왕권론’을 신정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고, 스위스의 제네바를 하느님의 주권과 지배가 이 땅 위에 부분적으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나는 칼뱅이 주장한 ‘복종을 통한 개인의 윤리적 혁신’과 ‘신정 정치’의 이상, 곧 하느님의 나라 운동을 개혁/장로교회의 영성으로 이해하고 싶다.
3.1. 개혁과 책임
장로교회에는 ‘하나의 권위 있는 신조’가 있을 수 없다. 이 점은 16세기 유럽의 같은 종교개혁 전통 위에서 발전한 루터교와도 다르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조’ 또는 오늘의 ‘일치 신조’만을 가지고 있는 루터교와는 달리 장로교회는 칼뱅의 ‘신앙문답’을 비롯해서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벨기 신앙문답’ ‘헬베틱 신앙고백’(스위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67년의 미국 연합 장로교 신앙고백’ 등 다양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서를 통해 끊임없이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는 장로교 전통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전통은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고, 신앙은 역사적으로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장로교 정신이다. 역사적 산물인 특정의 신조를 절대시하지 않고, 성서 문자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중요하게 여기는 정신은 교회든 국가든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 독단과 인간 집단에 대한 개혁과 저항의 근거가 된다.
개혁/장로교회는 자유가 하느님의 은혜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는 곳에 하느님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본다.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이에게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권력을 비신화화한다. 특히 오늘날 정치 권력이 조작되고 매수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을 소위 ‘자유 민주주의’로 정당화할 때, 그 자유의 허구를 폭로하고, 구조적 빈부 격차와 착취를 소위 ‘자유 시장 경제’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자본의 자유’를 폭로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물리적 힘으로 독점한 자유의 오만성에 도전한다. 자유의 개인적 향유를 위해 다른 사람이나 자연의 파괴에 아랑곳하지 않는, 오직 힘으로 자유를 확보하려는 자유의 계급성에 저항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내면적 자유, 곧 영적 자유나 정신의 자유로만 이해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하느님과의 개인적, 내면적 관계에서, 죄의 해방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결단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루터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교회의 국가 권력에 대한 무관심 또는 무비판적 순응을 위한 이론적 도구로 활용되었던 루터의 ‘두 왕국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루터의 ‘두 왕국설’이 정교 분리의 이론적 근거인지 아니면 오히려 국가 권력으로부터 교회와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근거인지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논의의 자리가 필요하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개인적이고 내면적으로만 이해할 때 빠지게 될 이른바 ‘양비론적 태도’의 위험성은 지적되어야 한다. ‘양비론’은 역사적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무기이다. 역사에 대한 판단이 성공하면 칭찬 받고,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비난받지 않은 자기 정당화의 거점을 언제나 가지고 있는 입장이 ‘양비론’이다. 그러나 ‘양비론’은 ‘양시론’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이란성 쌍둥이’와 다르지 않다.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윤리적 결단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지속적인 저항과 개혁을 그 내용으로 한다.
3.2. 평등
개혁/장로교회는 ‘하느님의 절대적 주격성’을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그리스도교 하느님의 배타성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모든 피조물의 우상화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지역적 개별 교회 공동체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까닭은 그리스도가 어느 장소이든지 믿음을 가진 공동체가 있는 곳, 말씀을 듣고 성만찬을 나누는 곳에 현존하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국가 교회적 체제와 조직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론은 그러므로 개별 교회의 높은 책임 의식을 강화하고, 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민주적 공동체성’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평등’을 수립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이 비록 유럽의 사회적, 문화적, 정신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라도, 급진적 사회 개혁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헨리 8세의 개혁은 영국 가톨릭교회의 합리화로 끝났고, 대륙의 루터교에서는 신학의 개혁은 있었지만 교황의 교권적 구조가 여전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후들의 지배 체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칼뱅주의자들의 교회 역시 제도적 교회로 남았고 지방의 행정 장관과 장로교 사이의 새로운 관계만 독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뱅은 성서 연구를 통하여 감독, 장로, 목사의 본래적 동일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성직의 동격성의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장로교 정치 원리의 핵심을 마련했다. 칼뱅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 대표가 성직자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교회 정치와 권면과 징계, 신조와 정치의 결정, 신앙 공동체 생활의 감독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평등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럽 종교개혁의 이런 개량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교회 내 개혁에 대한 저항은 이미 종교개혁 당시부터 ‘종교개혁 좌파’ 또는 ‘급진파’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이들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넘어서 중세의 봉건 질서 자체의 변혁을 시도했던 종교개혁 급진파들이었고 그 후에 전개된 모든 급진적 개혁 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지나친 개체화와 개별 교회 중심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간파할 수 없다. 개별 교회 내부에서 제기되는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더 효과적인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한 교권적 제도와 장치가 장로교 안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대부분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마틴 루터는 1523년,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높고 낮은 자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실 높은 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 현실의 그리스도인들 사이는 그렇지 않다. 일치와 평등은 약속된 현실이지, 실현된 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혁/장로교는 끊임없이 개별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는 물론, 교단과 개별 교회 사이의 관계, 다른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갈등, 곧 권위주의적 조직과 민주적 조직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와 교회들 사이의 평등의 이념을 지향하고 실현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3.3. 섬김을 위한 자유
종교개혁의 근본 정신이며 동시에 개혁/장로교의 신학적 전통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자유의 재발견’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칼뱅은 루터와 달리 인간이 율법(계명) 없이도 사랑과 자유 안에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낙관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역설적 자유, 곧 은혜로 주어지는 자유, 복종을 통한 자유라는 의미에서 해석한 점은 개혁자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1520년 교황을 논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내용은 역설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주제로 요약되는데,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물 위에 있는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봉사하는 종이며, 누구에게나 종이다”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유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원할 때 주장되고, 이런 자유는 언제나 힘있는 자들의 정당화에 기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의 행동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로서 모든 인간의 인간 됨의 기초가 된다. 자유가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써 그것이 지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확보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는 자아 실현 또는 자기 관철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자유의 기준은 언제나 개인이지 공동체가 아니다. 그런 자유는 힘있는 자의 정당화를 위한 도구이며 현상 유지의 이데올로기 구실을 한다.
오늘날 개혁/장로교가 부딪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은혜로 주어진 자유’를 ‘섬김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섬김을 받기 위한 자유’로 이해하는 데 있다. 섬김을 받기 위한 자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나 인간 관계를 모두 자본주의화하고, 이것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 아니라 오직 소유 관계에서만 보게 한다. 그 자유의 중심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또는 자기 조직의 이기심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섬김의 자유이지 지배를 위한 자유가 아니다. 스스로 종이 된 이들의 자유, 섬기는 자들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절제된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이웃과 타인인 것이다(갈라 5,13 참조).
3.4. 분열과 일치
장로교의 특징은 다른 여타의 개신교들, 곧 종교개혁 전통에서 출발한 모든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본질이기도 한 분열에 있다. 종교개혁 자체가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논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전통보다 말씀과 믿음을 강조하고, 교리보다 은총을 앞세우고, 교권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교회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성직자들보다 하느님의 백성을 교회의 주체로 선포함으로써 기득권 종교와 대결했다. 논쟁과 대결. 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개신교 전통의 처음부터 있었던 일이다. 심지어 분열은 개신교 성장의 한 배경이기도 하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다툼인지, 그 목적과 다툼의 방법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정체성이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지 일 것이다.
분열의 이유는 많다. 우리는 교리 논쟁(성서의 권위와 해석 문제), 신앙고백의 구속력 문제(16, 17세기의 유럽 교회의 신앙고백이 어느 정도까지 구속력을 갖는가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한 논쟁), 성령운동과 경건파에 의한 부흥운동의 도전,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처 방법에 따른 이견(국가 권력과 교회의 관계 문제, 노예 제도를 둘러싼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인종 분리 정책과 남아프리카 교회의 분열, 반공주의와 해방운동 등), 사회 문화적 측면(전통 종교에 대한 태도, 언어적 갈등, 이민 등)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학적 입장의 차이, 권력에 대한 태도 외에도 개혁/장로교 역사상 교회를 분열시킨 주요한 요인의 하나는 바로 선교를 둘러싼 것이었다. 선교지 안에서 영역 다툼, 교파 이식으로서의 선교, 문화적 갈등과 식민주의 등 선교는 처음부터 일치보다는 분열에 더 관계되어 있었다. 이런 갈등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진영 사이에서도 심화되었는데, 복음화와 인간화,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 개인적 회심과 구조적 변혁 등 양자택일적인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분열과 마찬가지로 일치에 대한 꿈도 개혁/장로교회에 처음부터 있었다. 칼뱅과 파렐(Farel, 1489-1565년)은 1548년 츠빙글리파와 합의함으로써 세 갈래이던 개신교파를 두 개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치를 위한 노력보다는 분열의 경향이 더 컸다. 문제는 왜 교회가 분열되었는지 근본 원인을 밝히고,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획일화가 아니고 정체성이다. 일치는 선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아버지에게서 온 영광, 곧 십자가의 영광을 표현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드러난다(요한 17, 21-23 참조).
이런 각성이 개혁/장로교회로 하여금 교회 일치 운동에 강력한 공헌을 하게 했다. 장로교의 교파적 연합은 1875년에, 회중교회의 연합은 1891년에 이루어졌는데, 장로교 제도와 회중교회 제도를 가진 교회들의 연합 노력은 1970년 국제 회중교회 협의회 제11차 총회와 개혁교회 연맹 제20차 총회가 각각 인준함으로써 마침내 세계 개혁교회 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을 형성하는 결실을 맺었다. 세계 개혁교회 연맹에는 현재 84개 국, 175개 교단과 7,000만 명의 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의 장로교회 교인들이 있는 나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독일, 헝가리,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이다.
가톨릭교회와 개혁교회의 대화는 1968년 세계 개혁교회 연맹을 통해 시작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시작된 대화는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기보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두 교회 사이의 대화는 일련의 보고서를 통해 발표되었는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1970년) ‘교회의 가르치는 권한’(1971년)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1972년) ‘성찬’(1974년) ‘교역에 관하여’(1975년) 등의 보고서가 그것이다. 대화는 주로 성서 해석학 문제와 교회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교회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가톨릭과 관계성에 치중하는 개혁교회의 입장, 성화하는 성찬례로서 교회관과 표적과 증거로서 교회관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대화는 초기 단계에 비해 훨씬 성숙해졌는데, 이 때 발표된 대화 보고서의 표제는 ‘교회에 대한 공동 이해를 향하여’였다. 이 보고서에서 두 교회는 지난 450여 년 동안 ‘서로를 정죄했던 기억들의 화해’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하며, ‘공동의 신앙고백’을 통해 그리스도론, 구원론, 교회론의 분야에서 이미 합의했다고 인정되는 요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합의되지 않는 부분은 미래에 합의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수용하면서 장래 지향적인 공동 증거, 공동 사업, 상호 권장의 친교를 통해 마침내 신앙과 하나의 성찬례적인 친교에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천명한다.
나는 분열된 개혁/장로교회들 사이는 물론, 개혁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일치는 각 교회가 공의회성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공의회성은 1971년 뢰벤에서 발표된 에큐메니컬 문서가 지적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 지역적으로, 지방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 공동의 기도를 위해, 서로 조언하기 위해, 신앙 안에서 결단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성령께서 그런 모임을 화해와 갱신과 변혁을 위한 목적으로 이용하실 수 있고, 거기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와 사랑의 충만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함께 모이는 것이 공의회성인 것이다.” 공의회성은 각 교인과 각 교회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고 가꾼다. 공의회성은 교회의 근본적인 동등성을 전제한다. 공의회성은 교회 공동체의 정치적, 사회적 모순들을 지각하지만 그것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공의회성은 서로 다른 교회들 사이에서 능동적인 관용을 요구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전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오늘날 다양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교회들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하나는 교회를 본래 공의회성의 빛에서 이해하는 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