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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교회의 응전
그러므로 저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의 성경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진실로 말시온이여, 무슨 권한으로 너는 나의 나무를 찍는가? 발렌티누스여, 너는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나의 시냇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가? 아렐레스여, 너는 무슨 권세로 나이 경계표를 옮기는가? 이 남은 자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너희 마음대로 갈고 뿌리고 있느냐? 이것은 나의 소유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보다 먼저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이 재산의 본래의 소유자들로부터 받은바 틀림없는 양도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다. Tertullian
1. 신경의 발달
신경(creed)은 “나는 믿습니다”를 뜻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_에서 dbfog했다. 신경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남겨주었고 이 신앙 고백은 하나의 틀을 이루어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외에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 같은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는 당대의 신앙고백의 일반적인 형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신앙고백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가현설(Docetism)을 염두에 둔 듯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삶이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신앙고백이후 좀더 모양을 갖춘 신앙고백이 변증가의 대변자라고 알려진 저스틴 마터의 작품에 나타난다. 16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신앙고백은 개인적인 형태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는 태초부터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며 조물주이신 한분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언자들에 의해 성육신하셔서 구원을 알리시고 선한 스승이라고 앞서 선포되신 하나님의 종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신앙고백에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보다 좀 더 발전된 고백형태가 서머나의 장로들의 것이라 알려진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약 200년 혹은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907년에 발견된 발리제트 파피루스(Der Balyzeth Papyrus)라는 한 파피루스에는 매우 흥미있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아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육체의 부활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옵나이다.”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바울의 신앙고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의 신앙고백이 교부들에 와서 더욱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가지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신앙고백과 내용이 같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해석적인 신앙률(Rules of Faith)이 약 150년부터 200년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신앙률은 세가지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앙율은 먼저 교리적인 표준(a Standard of Faith)으로 사용되었고, 세례입문 교육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성경해석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변호하는 신학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신앙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이레니우스(c. 190)와 터툴리안(Tertullian: c. 200)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과 상당히 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전체적으로 내용, 윤곽, 체계를 같이하고 있는 훌륭한 신앙 고백서로 성부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신앙고백의 내용은 터툴리안이 제시한 신앙률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이레니우스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후대에 발전된 사도신경과 흡사하다. 이레니우스의 신앙율이 빌립보서 2장의 내용과 유사한 반면 터툴리안의 신앙율의처음 부분은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다.
초대교외의 가장 집약된 신앙고백은 역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체계화 되었다.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로마신경의 초기형식이 히폴리투스 신경(the Interrogatory Creed of Hippolytus's Apostololic Tradition. c. 215),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쥴리우스 1세(340)에게 제출한 신조, 그리고 사도신경에 대한 루피누스(Rufinus)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존되어 있다. 전형적인 로마 신경은 로마교회가 주후 200년경 세례 문답시 행한 신경이다.
히폴리투스의신경도 성부, 성자, 성령, 공회,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 등의 신앙고백을 따라 문답의 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와 상당히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태가 3세기 초엽에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과 세례문답으로 널리 통용되다가 4세기 중엽에 문답식의 형식을 떠나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사도신경과 매우 근접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340년에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줄리우스 1세에게 보낸 신경이다. 이 신조가 이전의 신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마지막에 죄의 용서와 영생이 추가되었고 좀 더 함축적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사도신경은 약 5세기경에 등장했다. 사도신경의 텍스트 리셉투스(the Textus Receptus) 즉 원형은 프리미니우스(Priminius)의 De singulis libeis canonicis scarapsus 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약 710년과 724년 사이에 등장한 사도신경은 로마교회 신조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며 드디어 로마교회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어 서방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이단의발흥에 대한 교회의 응전으로 생성된 신조는 이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2. 정경의 형성
신경외에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것이 정경의 형성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신약성경이 목차는 무라토이안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으로 알려진 고대 문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200년 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의 대부분은 초대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정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준은 각권이 사도들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가하는 것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신약대로 완전한 정경이 설정된 것은 AD 367년 아다나시우스에 의해서이다. 두 번의 힙포 공의회(Councils of Hippo)가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393)에서 그리고 칼타고 공의회가 어거스틴(Augustine)의지도 아래 북아프리카의 칼타고(carthage : 397)에서 열려 현재와 같은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동방과 서방교회는 그들의 선례를 따라다.
정경이 완성되기 까지는 거의 300년이 필요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경의 출현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나 종교회의(Synods)의 공식적 선언의 결과는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공식선언은 이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을 단지 확인했을 뿐이다. 신약 성경의 기록과 그것들이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정경의 형성은 이단과 이설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교회에 제공해준 셈이다.
3. 감독제도의 발달
교회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그들의 결집된 힘을 통해 이런 외부의 도전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로마의 클레멘트(A. D. 96)는 96년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uteros)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클레멘트가 감독들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그나티우스에 의하면 감독은 기독교 공동체의 상징인 동시에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의전달자였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다. 두 가지 사상 즉 이그나티우스의 단일 감독제와 클레멘트의 사도직의 계승이 70년 후에 이레니우스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어 감독의 권위를 한층 체계화 시켰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감독들이 똑 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로마교구의감독은 우월한 권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그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설립된 교회이며 그들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로마교회는 사도의 권위를 계승한 교회이며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직을 승계한 정통성 있는 교구이기 때문에 로마교회 감독은 다른 교구보다 더 권위를 지닌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여러 감독들 중에서 베드로와 바울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로마이 감독이 첫 번째 서열에 있었다.
감독의 권위가 2세기 동안에 대단히 성장했지만 권위에 대한 이해에는 견해차가 있었다.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인정한 반면 터툴리안은 사도적 권위를 어떠한 교회에서 찾지 않고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 예르 들면 고린도, 빌립보, 에베로, 로마교회에서 찾았다.
제 3 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 8 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그가 성육신 하셔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오랜 족보 안에 총괄갱신(recapitulate) 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사오가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은 것이다. Irenaeus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초석을 형성하였고, 오리겐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면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신학의 초석이 되었다.
1. 이레니우스이 생애
캐톨릭 교의학의 아버지 또는 “교히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 불리우는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중요성 때문에 기독교회사에서의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레니우스는 일생동안 영지주의를 논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계획을 역사 신학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으며, 신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보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하였으며, 헬라적 사색의 도움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도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자들과도 견해를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목회적 소질을 타고난 이레니우스는 고울에서 복음을 전파한며 이단으로부터 양들을 변호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레니우스는 변방에 있는 켈트족의 복음화와 리용의 교회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후기 자료에 의하면 이레니우스는 리용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던 202년에 순교하였다.
2. 이레니우스의 작품
이레니우스는 수 많은 저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은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과 <사도적 설교의 논증>이다. 전자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기술된 작품으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으로 알려졌다. 다섯권으로 되어있는 이단 논박은 주제에 따라 다름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영지주의의 해설; 2-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 - 선지서, 주의 말씀과 사도들에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 이 책에서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유형인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플톨레매우스(ptolemaeus)의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이런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은 에피데이키스(Epideixis)라고 불리우는 단편작품 <사도설교의 논증>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한다.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 (복구)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독특하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바로 그 형상을 따라서 이간이 지음을 받았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아들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 이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학로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을 수행하심으로 실현된다. 이런 사랑은 섭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섭리는 4단계의 언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언약은 아담언약으로 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이고, 두 번째 언약은 노아의 언약으로 홍수 이후부터 출애굽까지 이며, 세 번째 언약은 모세의 언약으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이고 마지막언약은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종말까지 이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할 수 있는 구심점은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들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며 바로이것이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곧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구속의 정점이다.
총괄갱신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측면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런 사탄에 대한 투쟁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단계로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현현되어 총괄갱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가져왔으며, 그리그도의 부활의 통해 사탄의 비장의 무기였던 사망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하며 그 때가 오면 만물은 그에게 귀속될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총광갱신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담이 인간의 머리이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사탄을 정복한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정복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케 이루기까지 성장시켜 줄 가능성을 회복시켜 주셨어도, 이 가능성은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갱신 사역을 진행시키시고,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 자시에게 연합시켜 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실체는 물질적인 요소를 평가 절하시키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가 확신하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자시들의 비밀 전통과도 사도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왜곡된 것이며 그들은 총괄갱신의 구속사역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이단들은 교회의 위협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장애물인데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4. 이레니우와 전통
이레니우스는 사도적인 전통(가르침)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교회에 보존되어 왔으며, 따라서 “진리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온 세계에 분명하게 된 사도들의 전통을 어느 교회에서나 분면하게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호소는 정경형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레니우스는 4복음서를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4복음서가 이레니우스 시대에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레니우스의 역사관을 언급해보면, 이레니우스가 구속사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 신학자로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통시적인 역사 이해는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데서 출발한다.
5. 요약 및 평가
이레니우스는 최초의 교부로서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요약하고 3세기와 4세기 교부들로 잇는 교차로에 서있다는 점에서 역사 신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한 시대를 여는 역사적 교차로에 있었던 이레니우스가 이전 사상들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레니우스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매력을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제 9 장
라틴 신학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단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적’ 기독교 ‘플라톤주의적’ 혹은 ‘변증론적’ 기독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치워버려라 Tertullian
라틴신학은 로마에서 보다는 칼타고를 중심으로 태동되기 시작했다. 칼타고와 북아프리카에 언제 어떻게 교회가 생겨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후 180년에그곳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교회는 주로 로마인들이나 그들과 상업적인 거래를 했던 퓨닉계인들 가운데 존재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두드러지게 도회적이고 , 도덕적이고 라틴적이었다. 북아프리카는 터툴리안(212), 키프리안(258년) 그리고 어거스틴(430) 등 3명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를 배출했다.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현대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터툴리안 (c. 150-c. 212.)을 서방신학의 대변자 혹은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그가 서방신학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지대하다. 그의 작품은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교리 및 신학논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비록 그가 분리하여 공교회에서 이탈하기는 했지만 그의 저술들은 위대한 서방교부들에 의하여 전수되고 연구되었으며 라틴 교회에서 무게있게 취급되어왔다.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약 200년경 칼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은 터툴리안은 점차 몬타니즘으로 기울다가 207년 경에는 몬타니즘에 합류했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공교회에서 완전히 분리해 나갔다. 그가 몬타니즘에 합류 하게 된 일반적인 견해는 첫째는 제랄드 브레이(Gerald L. Bray)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합류한 것은 이 집단이 터툴리안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집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몬타니즘의 금욕주의적인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태도와 일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세 번째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교회가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다.
2) 터툴리안의 작품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의 범주는 변증론(Apology)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신으리 신앙을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툴리안은 신앙을 변호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일련의 변증서를 저술한 터툴리안은 변증적인 차원을 넘어 이설과 이단들을 반박하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이 직접 이단들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들을 반박하는 것에 비해 터툴리안은 법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비판하였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만이 전통을 소유할 권한이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단들은 취득시효를 상실했으며 전통적 교회가 그 권한을 가진다.
변증서나 반박외에 터툴리안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의 작품 부류는 도덕적, 예전, 권징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의 성격상 목회적 작품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작품들, 그리고 이교철학을 논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3) 터툴리안, 이성, 신앙, 철학
터툴리안이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철학 거부 태도는 신앙과 이성에 관한 그의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인간이 믿는 것인 그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믿음에 과한 지식은 이성에 관한 지식과는 다르다. 전자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성적 증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대의 철학이 이단들과 연계성이 있음을 발견한 터툴리안은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터툴리안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살던 당대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철학적 용어에 빠져들지 않았다.
4) 터툴리안의 세계관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그의 종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세계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사회가 기뻐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며, 이방인이 행복할 때 기독교인은 슬퍼하고, 저들이 슬퍼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역설이 가능하다. 세상의 쾌락을 멸시하며 세상의 활동을 비웃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없는 쾌락이라는 논리다. 이와 같은 터툴리안의 부정적인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어느 정도는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가담한 이후 몬타니즘의 부정적이며, 종말론적아고, 금욕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터툴리안은 고등성경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두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양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두고 있다. 그는 또한 신앙의 규범(“regula fidei")또는 신앙율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언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은 주후 248년에서 258년까지 칼타고의 감독으로 봉직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처음에 감독의 직위수락을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직무에 열성적으로 헌신하여 오랫 동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이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키프리안은 3차박해로 역사에 알려진 데시우스의 전국적인 박해기간에 8년동안 칼타고 감독을 지냈다. 그가 감독이 된지 불과 2년 만에 데시우의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진행된 최초의 박해였다. 로마 제국 내에 모든 국민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키프리안 자신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 전투에서 살해되고 251년 박해가 종결되자 박해 기간에 숨어 있던 키프리안이 칼타고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박해기간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교회에 재 입교 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키프리안은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은 순교자들과 핍박 중에도 절개를 지킨 고백주의자들을 크게 존경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영적이고 내적인 통일성에서만 찾지 않고 오히려 가견적인 교회의 일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가견적인 단일체로서의 교회 밖에는 영적 생명이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변함없는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을 확대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와 직결시키고 교화가 하나이듯이 감독직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하나됨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됨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것은 곧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3) 키프리안 대(對) 노바투스
교회일치를 강조하며 분열을 막으려는 키프리안의 정책이 북아프리카 감독들과 로마 감독의 지지를 받았다. 노바투스가 “허황된 사상에 빠져 스스로를 카타리(Cathari)파라고 부르는 특이한 이단자들의 지도자가 되자 이 문제로 대단히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종교회의에서는 키프리안의 입장을 따라 이방신들에게 실제로 제사를 지낸 자들은 죽을 때에 공교회에 재 입교 시킨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는 노바투스, 노바투스와 연합한 오만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견해를 채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 간주한다. 우리는 과거 재난을 초래했던 회개라는 치료책으로 그들을 치유하여 주어야 한다.
교회 일치와 정치적인 일치를 추구했던 콘스탄틴이 즉위하여 326년에 칙령이 발표되면서 노바티안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는 노바티안의 감독 아케시우스(Acesius)가 참석하였다.
4) 북아프리카 교회와 로마교회의 대립
로마에서는 감독이 그러한 사람(노바티안 교회에서 세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공교회에 들어오기 원했다.)에게 안수하는 절차를 밟은 후 그들을 교회로 입교시켰다. 반면 북 아프리카의 꽤 많은 교회들 중에는 , 그러한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의 감독 스데반의 주장은 서로 달랐다. 키프리안은 칼타고 교회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그러자는 제 2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감독 스데반은 교회 밖에서 일지라도 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했다면 유효한 세례로 인정하고 세례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안수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를 두고 아프리카와 로마 사이에만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범 교회적 논쟁점으로 일찍이 몬타누스주의자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의 세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각 지역마다 의견이 대립되었다. 로마나 팔레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 유효성을 인정한 것에 반해 라틴 아프리카, 안디옥, 갑바도기아, 길리기아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주어 왔다.
3. 요 약
비록 키프리안이 교회의 영적 측면의 일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인 교회 속에서 교회의 일치와 통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집약한다면,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서는 켤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순교로 일생을 마감했다. 또 다시 발레리우스 황제시에 박해가 발생했을 때 키프리안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지 않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집에 감금되었다. 얼마 후에 키프리안은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자의 대열에 올랐다. 키프리안의 견대들은 순교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위광에 힘입어 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힘포의 어거스틴과 그의 도나투스파(Donatist) 대적들이 서로 키프리안을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했을 정도이다.
제 10 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master)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Clement of Alexandria
칼타고가 제국의 서부에서 로마 다음의 제 2의도시가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 로마 다음의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칼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칼타고는 로마 적인 특성을 지녔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다.
주전 200년부터 주후 3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집트 전체를 합친다면 유대인의 총수는 약 100만에 육박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 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에서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헬라 파 유대인으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곳에서 주전 250년경에 70인경(the Septuagint)이 번역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대표적 인물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로 역사에 널이 알려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는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까지 활동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초를 놓았다.
스토아 철학에서 회심한 판태누스(Pantaenus)는 저스틴이 로마에서 운영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알렉산드리아에 설립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팬태누스를 만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성경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180년경으로 추측된다. 클레멘트는 자신의 강요(Institutions)에서 판태투스를 스승이라고 칭할 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판태누스가 죽자 클레멘트가 그를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그 학교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교육받은 헬라 지식층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1) 클레멘트의 작품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스트로 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라고 불리우는 8권으로 된 책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클레멘트의 저서는 <교사(Paedagogus)>라는 제목이 붙은 8권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헬라인에의 권고(Protrepticus: The Exhortation th the Greek)>, <회심에의 권고(An Exhortation to Conversion)>,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교회법(Ecclesiastical Canon)>등이 있다.
이들 클레멘트의 작품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특별히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3개의 작품으로 클레멘트의 진리 인식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들은 <회심에의 권고(Exhortation to Conversion)>, <교사(Tutor)>, 그리고 미완성 작품 <잡문집>(Miscellanies)등이 있다. 그의 첫 작품인 회심에의 권고는 기독교 변증학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어떻게 로고스가 처음 우리를 회심시켰는가를 성명한다.
<교사>는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으며 어떻게 로고스가 우리를 교회시키는가를 다룬다.
세 번째 작품 <잡문집>은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하여 참 지식(true gnosis)에 이르게 하는 가를 설명한다.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클레멘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그가 기독교 진리와 희랍 철학의 진리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기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저스틴과 아테나고라스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담대하게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것은 로고스가 진리의 원천으로 헬라인들의 철학과 기독교인들의 진리, 둘 모두의 저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클레멘트는 “철학도 진리 참구의 존재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였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Paidagogos)인 것이다.
클레멘트는 헬라인들이 철학을 통해 습득한 시작은 기독교인의신앙을 심오하게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클레멘트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신앙이란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신앙의 관계는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레멘트는 신앙과 이성이 떨어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믿음의 시발자로서 이성은 믿음보다 우선된다는 것이다. 신앙으로만 만족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젖으로만 만족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의 사상은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관 그리고 역사관에 깊이 반여되어 있다.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이해
클레멘트의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된다.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즉, 진보된 의미로 이해했다.
클레멘트의 신관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따라 신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은 속성이 없으시고 분질의 범주를 넘어서 계시며, 하나님은 정의내릴 수 없는 분이므로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단순히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하기 보다는 성경의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한다.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클레멘트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해석은 의의가 있다. 역사의 주체이며 모든 지식과 피조물의 근원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의 역사의 정점이며 헬라와 유대 역사를 한 점에 모으는 전환점이다.
5) 클레멘스 사상 요약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결론적으로,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현대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고, 초대교회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로고스론이다. 이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는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또한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헬라적인 특징과 성경적인 특징이 분명한 구분없이 한데 어울려 마치 현대판 종교 다원주의를 제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의 사고 속에서는 헬라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제창하려는 내면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진리를 축으로 하여 헬라 철학을 끌여들여 조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클레멘트의 기독교 사상의 방법론은 오리겐의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2. 오리겐
3세기 초반 기독교계에서 혜성 같이 떠올라 정통과 이단 양측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후 185년경에 탄생하여 254년에 세상을 떠난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였다.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선구자였다면 오리겐은 명실공히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60평생 이단들과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였으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하였고 유대인 사회에 대해 기독교를 증언하였으며 교회 내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일하였다. 존경을 받았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과 사상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왔다. 클레멘트의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초속이 되었다면 오리겐의 신학과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1) 오리겐의 성장 배경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하였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심하게 박해할 때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가 순교했다. 당시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오리겐의 영혼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경건에 힘입어 오리겐은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catechumens)학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곧 오리겐은 “모든 신자들에게서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 오리겐은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고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친구들마저 놀라게 했다.
이처럼 오리겐의 금욕주의적 성품은 그의 생활 전반을 재배했다. 열성적인 금욕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는 오리겐의 신앙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이 오리겐의 신비주의는 무분별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리겐의 금욕주의적인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의 교육활동, 설교, 논박, 특히 저술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의 명성을 더해 주었다.
2)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오리겐의 명성이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외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적으로 오리겐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오리겐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유세비우스의 동시대 인물이며 오리겐의 비평가였던 포르피리(Porphyry)는 오리겐이 헬라철학과 야만인(유대인)들의 말을 혼합시켜 놓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불만의 요지는 헬라인인 오리겐이 헬라문학을 공부했으면서도 이 야만인들의 건방진 말에 현혹되어 자신의 학문의 업적을 야만인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오리겐에 대한 비평은 객관성을 상실한 듯하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하듯 오리겐이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무질서하게 혼합시킨 것은 아니었다.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오리겐의 연구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오리겐은 그의 생애에 무려 6000여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량의 책을 저술했다.
4) 제일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제 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us)는 오리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서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잘 훈련된 신학적 머리와 헬라풍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의 해석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있다. 제 1권에서는 삼위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 2권에서는 물질적 세계, 인간과 인간의 영혼을, 제 3권에는 자유의지, 악마와의 투쟁, 선의 궁극적 승리를, 그리고 제 4권에서는 성경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하나의 연관성 있는 교리 체계를 구성하기를 원하는 자”가 기초적 원리로 삼을 원리들을 제 1원리에서 이렇게 집약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시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사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참으로 고난당하셨고, 참으로 죽으셨다. 그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 하늘로 올리 우셨다. 성령께서는 그 존영과 권세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되어 있으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악한 세력들은 죄악으로 영혼을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려고 힘쓰기 때문에 믿는 영혼들은 그와 같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겐에게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 성경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구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볼 때 구약성경의 사건들, 인물들, 규범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오리겐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콘트라 셀수스(Contra Celsus)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교도 비평가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이다. 셀수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를 비평하였다. 1)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헬라철학에서 얻지 않고 야만인인 유대인들에게서 얻었다. 2) 이적은 참으로 기적이 아니라 단지 마술일 뿐이다. 3) 기독교 교리는 비합리적이다. 4)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이며, 로마병사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이다. 이에 대하여 오리겐은 만일 예수께서 그런 가정환경 출신이라면 간음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5) 오리겐의 신관
오리겐의 신론,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공헌주의 하나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와 같이 영원한 분으로 보았다. 오리겐의 영원 전 나심은 후에 삼위일체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시다고 보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제 2의 하나님(second God)이라고 부름으로써 성자와 성부가 다르면 성자가 아버지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신학은 그 성격상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지난 1세기 동안 역사신학계에 큰 논란이 되어 왔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된다. 예를 들면 초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그 관심이 집중하였고 그 의미에 대하여는 저들의 선배들이 이미 탐구한 것 이상 나가지 못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것이 신화교리이다.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는 인간의 신화를 믿었으며 이런 신화교리는 후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변자인 아다나시우스 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성이 신성인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불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로고스 사상을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 불사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 불사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고스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불사적인 존재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다나시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성육신에 근거한 인간의 신화교리를 시릴에게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속에서 흐르고 있는 기독론 사상의 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중심이 로고스 사상이며, 로고스 사상은 또 구원론 핵심을 구성한다.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본질적우로 오리겐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그이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연속성이 더 강하다. 로고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을 제거하시기 위해 불가시적인 존재가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생명이요, 빛이요, 아버지의 로고스요, 우주의 통치자요, 그리고 왕이시다. 아다나시우스에게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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