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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일(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1요한 3,18-24.
하느님과 연대하는 방법, 사랑과 자비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이사 5,2)고 말하고, 예레미아서는 하느님이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다”(예레 2,21)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지켜 주소서”(예레 80,15)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포도나무’라는 말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하며, 하느님은 그 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이시고, 신앙인들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고, 하느님의 손길이 다듬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우리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계획과 실현을 잘한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우리가 속하는 집단을 위해, 우리는 계획하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나들이를 할 때는 목적지까지 계획을 세우고, 합당한 교통수단을 택합니다. 물건을 살 때도, 우리는 미리 계획하여 구입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실현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계획하지 않고 접근해서 얻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미리 계획하고, 계획의 결과를 감상하지 않습니다. 그 작품의 세계 안에 우리는 그냥 빠져들고 심취합니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받은 감동으로 우리 자신이 달라져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문학작품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합니다. 감상과 감동은 우리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대상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파장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 자신이 만든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열어 주는 세계에 빠져들고 감동합니다. 복음의 교훈은 계획적이지 않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도 같은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들이 열어주는 세계로 우리는 빠져듭니다. 복음서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를 위해 유익하게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고 예상한 교훈만 복음서에서 얻을 것입니다. 이때 복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계획하면서 기대했던, 우리 자신을 위해 유익한 교훈만 얻어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서가 열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만나지 못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나무의 생명을 살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받아서 살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소인의 근성을 벗어나, 예수님이 보여 주신 큰 생명을 받아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명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며, 측은히 여긴’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셨다”(사도10,38)는 말로 그분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성공을 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마음에 들어, 그들의 가호를 받아 종교지도자로 출세할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유대교의 율법과 관행을 열심히 따라서,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칭찬 받는 길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소중한 것은 오로지 자비하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미움을 받는 원인이었지만, 그분은 그것을 한으로 가슴에 품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랑과 자비는 한이라는 응어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감동하고 심취하셨습니다. 그 점에서 그분은 여느 인간과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계획 없이,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몰두하셨습니다. 신앙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열어서 하느님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 자기의 실천 안에 살아 있게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서는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1요한 3,20)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당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큰 마음을 배워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기 자신의 일에 골몰한 마음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남는다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 세상에 살다가 그것을 대자연에 돌려주고, 어디론가 가는 생명입니다. 떠나야 하는 세상이고, 내어 주어야 하는 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과, 그 마음의 실천만 하느님 안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리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4) 우리 계획의 결과로 우리가 획득하는 명예와 재물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잘린 가지’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 생명의 열매를 우리 안에 맺게 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마음을 영입하여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는 실천이라도, 그분 자비의 몸짓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각자를 다듬어서,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다 농사를 짓는 분들의 공통된 가치 중 하나가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고 돌보는 농부의 시간과 정성이 결실로 그대로 맺힌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니 포도나무에 껌딱지마냥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자연의 순리이며 진리이고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중요한 점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도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머물고 내가 그분 안에 머물러 온전히 하나되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머루가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열리는 포도를 맺기 위해 온전히 주님의 안에 머물러 있으려 간절히 기도합니다. 농사가 기본이 아니어도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아는 이치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열매가 포도여야 한다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와 세상은 콩 심은 데서 팥이 나거나, 팥 심은 데서 콩을 맺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려야 하는데 사과가 열려도 아무런 이의 없이 인정하는 불의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항해하던 여객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침몰되었고 국민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해야 할 구조 노력을 하지 않아 304명이나 되는 생명이 죽임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는데도 그저 교통사고라고 치부합니다.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법을 만들고 대책을 마련하여 우리의 아이들에게 안전한 나라를 전해 주자는데 종북세력이라며 손가락질 합니다. 노동자들을 재화획득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신자유주의에 물든 기업이 이윤을 목적으로 숱한 해고 노동자들을 만들었고, 생계의 수단을 빼앗긴 이들은 생명마저 희생당했는데 기업과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칩니다. 자연과 환경의 파괴로 이어지는 원자력 발전을 마치 대체 에너지의 마지막 선택인 양 선전을 하고, 그것을 위해 산골 마을의 생존권마저 짓밟으면서도 당연한 권력행사라고 우깁니다. 정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가 하느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무력을 키우기 위해 강정을 깨부수는 정책이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개발과 도시계획의 논리로 주거 정의를 산산히 부숴 버리고 삶의 터와 가족을 잃은 철거민들을 법이란 미명으로 짓누르는 재벌들도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검은 돈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돈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주었다는 사람을 구속하고 수사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불의한 일이며 부정한 일입니다. 공동선이 뭉개지고 정의와 진리가 재물과 이윤으로 교체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도 올바로 가고 있다고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세상입니다. 포도나무에 대한 복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렇습니다! 정의가 근간이 되지 않는다면 평화는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지지 않는다면 삶과 노동에 대한 존엄은 불가능합니다. 자기만 편하게 살면 된다는 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공동선은 남의 얘기가 됩니다. 진실규명이 없다면 재발방지는 거짓 정권이 쌓는 모래성일 뿐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 이루어지는 개발과 발전은 몇몇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불과 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려 나갈 뿐입니다. 또한 포도가 아닌 다른 열매를 맺는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콩 심은 데서 팥이 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팥 심은 데서 콩이 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들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서는 포도가 풍성한 열매로 맺힌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전히 진리와 하느님의 의로우심은 살아 있음을 기억하고 외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윤과 재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허상이라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농부이신 하느님이 심으신 진리와 정의의 포도나무,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같은 열매를 맺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 안에 온전히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박명기 신부님(다미아노)
[생활 속의 복음] 머무름을 통해 좋은 열매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 그런지 엄숙하고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명령어법을 통해 강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물질을 섬기며 두 길(1열왕 16,29-34; 예레 7,21-31)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성경 저자들과 예언자들의 강렬한 질타가 생각납니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0> 문화적 도적3 혼인,하느님 앞에 맺은 확고한 계약
단일성과 불가해소성 가진 가톨릭의 혼인 [아! 어쩌나] 291. 사제가 될 자격이 있는가 문: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끔 내가 사제 생활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혹시 하느님이 실수로 뽑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부터 신자들이 나를 알면 실망할 터인데 내 본모습이 드러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게 인간적이라고 위로를 해주는데, 그래도 제 마음은 편치가 않습니다. 사제로서 살 각오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격지심이 드는 것이 늘 제 마음을 편치 않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사제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네 마음의 가난부터 보아라.”
저의 시골 친구 신부가 경남 산청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 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해 주었는데 매우 가슴 뭉클하게 들었습니다.
나환자촌에서 그 친구가 얻은 유일한 교훈은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내고 있어 생명력이 왕성할 때 그 분들에게 봉사를 했습니다. 어느 곳에 가니 빈 무덤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파 놓았지만 아직 사람을 묻지 않은 빈 무덤들인 것입니다. 그 곳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님에게 그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수사님은 지금 살아계신 나환자들의 지체가 떨어져나가면 그 떨어져나간 몸의 일부분을 본인들이 고이 싸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무덤에 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의 무덤엔 팔이 묻혀있고, 어떤 분들은 다리가, 또 어떤 분들의 무덤엔 눈이 묻혀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생명이 왕성한 때였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은 삶과 별개가 아님을 느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을 늘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단 일분도 우리의 생명을 늘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에는 손도 발도 눈도 코도 없는 한 할아버지가 엎드려 수박에 머리를 박고 드시고 있어서 뭐 도와드릴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으시고 자신을 불쌍히 바라보는 그 친구에게 혀로 점자 성경책을 읽으시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분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역시 몸이 매우 불편하신 한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그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베드로, 괜찮아. 안 도와줘도 돼. 먼저 네 안에 있는 가난을 먼저 찾아봐.”
그 친구는 아직도 그 할머니의 말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가난이 무엇일까?’
그러던 중 산골에 눈이 왔고 몸이 불편하고 눈이 안 보이시는 그 마을 분들을 위해 아침부터 정말 열심히 눈을 치웠다고 합니다. 그 분들을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어깨가 우쭐 했습니다. 그 때 뒤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음성 같았다고 합니다.
“베드로, 수고했어!”
그런데 그 할머니 뒤로 자신이 쓸었던 눈들이 이미 햇빛으로 다 녹아있었던 것입니다. 해가 뜨면 저절로 녹게 되어있었던 눈을 자신이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쓸데없이 헛수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 신부는 그 이후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새로이 성전을 짓고 봉헌했는데 성전을 지을 때의 모토가 ‘백삽일포’라고 합니다. ‘백 번의 삽질보다 한 번의 포크레인이 뜨는 것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 때의 깨달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마 할머니께서 찾으라고 했던 가난이란 바로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기에 느껴지는 그 분의 부재’를 의미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더 이상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포도나무이시고 당신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가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저도 요즘 성당의 이런저런 공사를 하면서 불우이웃을 위해 제가 매달 내고 있는 돈을 본당 예산으로 넣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런 좋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까지 승승장구하게 만드셨지만 다윗은 병적조사를 하여 하느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사실은 성당의 계단, 스테인드 글라스, 주차장, 휴게실 등에 들어갈 돈을 계산하며 제 힘으로 돈을 맞춰보려 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야 할 돈에까지 손을 대려 했던 것입니다. 말로는 주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모든 좋은 열매가 다 맺힐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분께 완전히 의탁하지 않고 나의 계산대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가난이고 고아입니다.
우리가 주님 없이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께만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기만 한다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붙어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들과 음식을 먹으면서, 혹은 시장 복잡한 가운데 그 분께 붙어있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분께 붙어 있는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어야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하나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루 기도시간을 오래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가고 있다면 사람들은 잡고 있을 손잡이와 같은 것들부터 찾습니다. 이것이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할 시간을 찾지 않는다면 여전히 혼자 버티려고 하는 가난한 인간인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님(요셉) -요한 15장 1-8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됩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가 주님과 우리의 관계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떨어져 있지 말고 붙어 있어라..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고 하시는데요.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다가 두 가지가 필요하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갈라티아서 2장의 말씀대로 그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도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이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제관에 있으면서 약간 불평할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성당 옆에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 때나 경운기나 트럭을 가지고 사제관 옆까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 단열이 잘 안 돼서 추운 것도 있죠. 보일러도 잠깐 작동이 잘 안 되었었는데, 여기 동네 분위기는 여러 번 부탁해야 겨우겨우 오는 모양입니다. 그런 상황일 때 저라면 아마도 불평을 늘어놓고 짜증을 낼 텐데요.
제 방에 늘 보이는 말씀, 곧 ‘범사에 감사하여라.’ 는 말씀대로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일을 찾는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보일러가 고장 나서 기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네.. 추우니까 정신이 번쩍 든다.. 이웃들과 인사하고 한 마디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와 같이 그분의 말씀, 곧 감사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 는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살게 되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삶을 살게 되고, 그 일로 어떤 열매를 보게 될 겁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그분께 붙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님을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더 많이 기도하는 일일 텐데요.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죠. 두 가지가 있을 거 같습니다.
하나는 내 힘으로 뭔가 해 보려고 할 때입니다. 외국에 갔다 온 뒤에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보통 12시에 잤는데 그 시간이 새벽 1시 2시로.. 점점 늦어졌고, 아침에는 보통 6시에 일어났는데 그 시간이 7시... 오늘은 8시에 일어났습니다.
밤에는 점점 늦게 자게 되고, 아침에는 점점 늦게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그런 변화가 저에게 말해 주는 것은 기도하는 시간이 줄고, 뭔가 내 힘으로 공부하고 계획하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요즘 주로 소공동체에 관한 책들을 보고 있는데요. 제 생각에 ‘좋은 형태를 찾아내어 우리 본당에 맞게 적용하면 잘 될 거야..’ 하는 착각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 머무르고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는 일일 텐데 말이죠.
또 그분이 일하실 공간을 마련해 드려야,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시고 모아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실 텐데 그러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게으름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냥 몸이 원하는 대로 감정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어떨까요?
항구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다 말다 하다 말다를 반복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될 텐데요.
그런 어정쩡한 모습으로는 신앙생활에 흥미와 열정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열매를 맺기도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게으름에 저항하여 기도하는 힘과 체력과 의지를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강하게 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열매 맺는 가지가 되기 위하여 나무이신 주님께 더 강하게 붙어 있읍시다. 더 많이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간직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님파..’ 라는 세례명을 가지신 할머니가 있다. 그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한 마디씩 하신다.
“세례명을 들으니 양파가 생각나네..” “수영할 때 숨 쉬는 소리 음파.. 가 생각나네..” 한 번 들은 분들은 절대 안 잊어버리는 세례명인 거 같다. -김기현 신부님(요한) [금주의 성인] 5월 7일: 성 아우구스티노 로스첼리 1818~1902년,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신부, 원죄 없으신 성모의 자매회 설립.
성인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받는 가난한 이웃을 먼저 챙기는 사제였습니다. 그 역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를 위해 양치기를 하며 자랐기에,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과 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생활성가]The Present 1집(For the glory of my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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