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열차에서 보는 풍경
김경희
1985년 「월간문학」 등단. 에세이집 「사람과 수필이야기」 외. 시집 「시목(詩木)」 외.
칼럼집 「매화 눈트는 이 아침에」.
느린 열차 안 풍경에는 고전음악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호남선 열차에는 흑백사진 속 고향 풍경과 함께 생활인의 검소한 모습이 있습니다. 한국인들 삶의 뿌리와 함께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람들의 순한 모습이 있습니다. 경쟁을 멀리 하고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가는 허기진 삶의 원형도 남아 있습니다. 내 누나가 가출할 때 처음 타보던 그 긴 열차에는 눈물의 근원 샘이 있고 못 살아도 서로 보듬어 주던 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완행열차에는 서민들의 꿈과 인생의 짐을 날라다 주던 소달구지 시대의 흔들림과 동요의 가락이 살아있습니다.
광복절이 있는 달 하순 경 전주역에 도착했습니다. 7시 51분 여수행 기차를 승차하려면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유는 마음의 여백이요 평안입니다. 한국화의 빈 공간의 자유입니다. 비어 채울 수 있는 임자 없는 암자의 공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더 좋을 사유의 공백지대입니다. 모처럼 역 풍경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대합실 중앙에는 추억 공간이라는 ‘메모지 붙임판’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노란 메모지가 수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주를 다녀간 사람들의 정서적 작은 비늘이 한 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주시장(市場) 일주 정말 감사했어요. 전주, 전주, 전주 사람들-’ ‘조례동 세다, 양승식 왔다 간다. 심심하면 옆 사람한테 말을 걸어요, 한옥마을 너무 예쁘고 ○○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 짱!’ 등등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대합실 한 곳에는 보관함이 있고 365일 은행 자동화코너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의 중앙엔 알림판이 놓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방송과 함께하는 남이섬 아침고요 수목원’이라는 광고가 예쁜 꽃들을 배경으로 눈길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표 파는 곳 옆 벽면에는 책 읽는 기차여행 캠페인과 ‘하나 된 국민이 최상의 안보이다’라는 전광판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좌석이 있는 공간에는 ‘북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책은 ‘에세이 기증도서, 월간 잡지, 국내 소설’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술책’이란 말이 있는데 이곳 대합실에는 술술 읽히는 책이 많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 되어 티켓을 들고 개찰구로 갔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개방된 역이었습니다. 근무자가 모자 쓰고 팔에 완장을 두른 채 서서 천공기로 일일이 차표에 구멍을 내며 확인하던 시절은 5 공화국과 함께 건너갔는가? 싶었습니다. 2호 차 일반실 40 호석에 앉았습니다. 내 아내와 두 명의 친구도 그림자 같이 앉아 갔습니다. 처크덕 처크덕 미끄러지듯 열차는 간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리, 상관, 임실역을 빠져나가는데 승암산 고덕산 봉우리는 사발을 엎어놓은 듯 두리 뭉실 백성들 마음을 담아 놓은 듯했습니다. 조금 가다가 터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귀가 먹은 것처럼 압이 걸렸습니다. 공기 환경이 달라지면서 귀의 건강을 신경 쓰게 하였습니다. 수학여행 가는 학동처럼 약간의 재미도 있고 장난기도 발동하려 하였습니다. 곡성에서부터 산봉우리는 삼지창 같이 뾰쪽해졌고 강은 살이 쪄 폭을 넓히며 품새 있게 구례 순천과 여수 밤바다를 향해 소리 없이 흘렀습니다.
산에서는 아침 시간에 맞춰 숲에서 머물다 떠나는 구름이 시루떡에서 피어나는 김같이 하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보는 구름과는 턱도 없이 달라 보이는 느림의 비디오 같았습니다. 터널보다 ‘굴’이라고 해야 제 맛이 나는 굴을 여러 개 통과했습니다. 그 순간 빛과 어둠을, 가난과 인내를, 도시와 농촌을, 정신적 비만과 지혜로운 겸손을, 속된 가치와 탈속의 평범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착 가라앉는 가슴의 평온을 무심히 허허롭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시의 어지럼증이 가시고 서서히 맑아지고 편안해지는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맛보려거든 기차를 타 보십시오. 마음속 어딘가에 끝 모를 허무감이 느껴질 때 느린 열차를 타 보십시오. 거기에서 남이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낮고 초라한 자리에서 힘들어도 삐뚤어지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경쟁에 뒤졌다고 생각될 때, 외국여행을 떠나는 이웃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 남행열차에 몸을 실어보십시오. 그동안 서럽게 살아오면서도 서러워할 시간과 눈물 없이 버텨온 나와 고마운 이웃 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