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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 제 12장 회개하는 다윗
순간의 실수로 죄악의 구덩이에 빠진 다윗을 본래의 영광스러운 자리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의 죄를 지적하시고 다윗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며, 회개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는 대신에 그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밧세바가 출산했던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 솔로몬이라는 새 아들을 주셨고 암몬의 수도 랍바를 함락시킨다. 다윗을 회복시키려는 구체적인 역사가 시작된 때, 곧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온 때는 다윗이 범죄한 후 약 1년이 지난 때였으며, 이 시기는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낳은 직후였다. 그동안 하나님은 다윗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지만 다윗은 회개하지 않았고 죄로 인해 양심의 무감각 속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육신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 나단의 비유와 다윗의 자백 (12:1-14절)
나단 선지자는 적절한 비유로서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지적하였다. 그 일로 말미암아 장차 다윗 가문에 임할 하나님의 보응에 관해 경고했으며 다윗은 즉각적으로 회개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면서 불륜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 말씀이 심령 깊이 깨달아져야 한다.
둘째,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자백과 회개이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했다. 나단이 사용한 비유는 다윗으로 하여금 가난할 때 그를 높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이제 높아진 그가 하나님을 배반한 역설적 현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밧세바가 아들을 출산한 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이제 다윗을 견책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다윗으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고통의 실상을 경험하게 하여 다시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시32: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둘째, 다윗의 완악해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열리시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 것은 인간은 스스로 죄를 회개할 수 없다는 것과,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지 않으신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서 버려진 상태로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겔34:11-1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나단은 부자와 가난한 두 사람의 비유를 했는데 이 비유를 한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여 다윗이 완고해짐을 막기 위함이다.
둘째,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윗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셋째,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이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환하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먼저 ‘부한 자’는 다윗을 의미하며 그가 가진 양과 소가 심히 많다는 것은 수많은 처첩을 거느린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윗이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자기가 사서 기르는 암양 새끼 한 마리’라고 했는데 ‘사서’라는 말 ‘카나’는 ‘한 개인이 사유 재산을 획득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암양 새끼 한 마리는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의 절대 소유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 극진히 사랑하고 길렀던 애완용 양이라는 것이며, 나아가 암양 새끼는 주인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 담겨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암양 새끼와 가난한 주인 간의 동고동락 관계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다윗이 우리아의 가정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다윗의 나이는 41-42세 정도였으며 밧세바의 나이는 20세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과 밧세바의 연령은 2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보아야 한다.
나단 선지자의 고발은 계속되는데 어떤 행인이 그 부자의 집에 와서 하룻밤 거처할 자리와 식사를 요청했다.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부자는 그 나그네를 위하여 그의 요청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가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는 대신에 오히려 가난한 자가 애지중지하는 암양 새끼를 빼앗아 죽여서 나그네를 대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자의 소행은 마땅히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하는 악독한 범행이었다. 나단의 고발 내용은 잠자던 다윗의 양심을 일깨우는데 일단 성공했다. 다윗은 좌정하고 말하기를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히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만 민감히 반응하는 다윗의 모순된 태도였던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입으로 판결한 이 말을 통하여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을 선고한 셈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4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도둑에 대하여 율법이 규정한 배상 기준이다. 지금까지 율법을 무시하고 범행을 저지른 다윗이 율법의 기준을 언급한 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이다. 즉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타인이 하면 불륜이라는 바로 그 말이다.
다윗의 판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의 판결이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죄인 다윗에게 선포되었다. 지금까지의 나단의 비유를 남의 일로만 알고 정죄하던 다윗의 무딘 양심을 결정적으로 일깨워주는 나단 선지자의 신적 선포가 시작된 것이다. 나단은 자신의 사사로운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엄위한 권위로써 범죄한 다윗을 정죄하였는데 그의 첫 마디는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다윗이 판결했던 부자에 대한 모든 죄악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나단 선지자는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전했는데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7-8절에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총에 대한 언급을 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사울의 손에서 7년 반 동안이나 구원하셨다는 것과, 사울이 통치하던 나라를 다윗에게 옮겨주고, 사울의 아내들을 다윗의 품에 두었으며,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모두 다윗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물론 사울의 처첩을 다윗의 품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표현은 당시 정권이 교체될 때 정복한 군주가 이전의 후궁들을 모두 거느렸던 관습을 인용한 것이며, 사울의 왕권에 따른 모든 것을 다윗에게 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더라면 언제든지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과욕을 부려 탐욕과 정욕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9절은 다윗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을 지적하고 그 내용을 고발하였다.
다윗이 하나님의 율법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겨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탐욕과 간음,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저질렀다고 하셨는데 그 악은 죄가 없는 헷 사람 우리아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였다는 것이다. ‘죽이고’라는 말 ‘하라그’는 적개심을 품고 누군가를 살해하는 고의적인 행동을 뜻하는 말이다. 암몬 사람의 칼에 우리아가 죽임을 당하도록 획책한 다윗의 범죄는 왕과 신하간의 신의의 관계를 고의적으로 끊어버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다.
셋째, 10-12절은 범죄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고이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다윗의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의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에 휘말려 들것이라는 선언이다. 이 예고는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장자 암몬의 죽음, 아도니야의 죽음, 솔로몬 사후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되어 반목하고 질시하며 전쟁을 했던 모든 일들이 이에 해당한다.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고 하셨는데 암논의 근친상간, 그로 인한 압살롬의 살해 사건, 압살롬의 반란 사건이 그것인데 특히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고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한 사건으로 인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다윗은 은밀하게 밧세바와 상관하고 그 죄악의 열매를 감추려고 부지런히 애를 썼다. 실상 인간의 모든 범죄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저질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고 반드시 정죄당하고 심판당할 날이 오게 되며 그 심판은 공개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이 된다는 것이다.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지적과 심판의 경고를 받은 다윗은 한 마디 말로 죄를 인정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간단한 한 마디 말이지만 다윗의 진심이 응결되어 있는 진정한 회개요 자복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인간을 상해한 것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무시했다는 대신 관계의 죄악이었음을 자백한 것이다. 이때 다윗이 지은 시가 시편 32편, 51편이다. 그의 회개의 기도를 보면 다윗의 회개는 참 된 회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특성은 4가지이다.
첫째,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 즉시 회개하였는데 이는 그가 선지자의 대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증거이다.
둘째, 다윗의 회개는 매우 간결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변명하려는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했던 것이다.
*시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셋째,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숨김없이 토설한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내어 놓고 사유하심을 간구한 것이다.
넷째, 다윗의 회개는 겸손한 회개였다. 선지자의 책망하는 말투에서도 자신의 죄를 어린아이 같이 내어 놓고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다. 왕의 신분이라는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증거였다.
다윗의 죄의 고백을 들은 나단 선지자는 다시 한 번 다윗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며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다윗의 죄의 열매인 아이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이다.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고 할 때에 ‘사하다’라는 말 ‘아바르’는 ‘치우다’ ‘제거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거두어 가신 후 본래 죄가 없었던 것처럼 여겨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이기 때문에 이러한 죄를 사하심은 곧 그의 목숨을 살려주신다는 은총이었다. 따라서 ‘당신이 죽지 아니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사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심은 부성적인 사랑 이외에도 다윗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왕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신다는 약속인데 아직은 다윗의 뒤를 이를 솔로몬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의 죄는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의 범죄로서 신정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공적인 성격의 범죄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신정 국가인데 그 나라의 왕이 율법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훼방거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따라서 이 훼방거리를 없애기 위하여 왕에게도 율법의 공평한 형벌을 내려 이를 외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형벌은 곧 죄의 열매를 제거하여 원수들의 시비를 막고자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조차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요, 자비였던 것이다.
2.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 (12:15-25절)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그 대신에 은혜를 베풀어서 새로운 아이 솔로몬을 주셨고,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아이의 이름을 여디디아라 하셨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죽은 아이를 다윗의 자식이라 하지 않고‘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라고 함으로 다윗의 불륜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치시므로 아이가 고통스럽게 심히 앓았던 것이다.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고 골방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 다윗은 골방에서 7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렸는데 이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한 것이다. 왕의 신임을 받는 늙은 장로들이 다윗을 일으키고 음식을 권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고 7일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7일 만에 아이가 죽었고 신하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 이유는 아이가 살았을 때에도 금식했는데 아이의 죽음을 소식을 들으면 왕이 너무나 크게 상심하여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들은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확인한 후 일어나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에 돌아와 음식을 먹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신앙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신하들이 다윗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다윗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틀어놓았다. 즉 지금까지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는 여호와의 뜻을 돌이키고자 했던 것이며,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아이가 불쌍하여 하나님께 자비를 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이미 죽었으므로 한 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니 죽은 아이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가 거주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다윗 역시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본서는 이제 밧세바를 더 이상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셨음과 아울러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즉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솔로몬’은 히브리어로 ‘쉘로모’인데 ‘평강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지은 이유는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아이의 출생으로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진정한 ‘화목 관계’ 즉 평화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아이 이름을 재차 지어주신 것에 의해서도 뒷받침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밧세바가 낳은 넷째 아들인데 마치 첫 아들처럼 기록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둘째,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미리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기사보다 앞서 기록되었는데 실상은 랍바 성 이후에 출생하였다. 랍바 성에 대한 포위 공격은 첫 아이를 잉태하였을 때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로부터 밧세바는 3명의 아들을 더 낳았고 마지막으로 솔로몬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랍바 성 함락 이후 적어도 7-8년 이후에 솔로몬이 출생했을 것이다.
나단을 통해 주신 솔로몬의 이름인 ‘여디디아’는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라는 이름의 뜻인 ‘다윗’과 내용상 같은 이름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셔서 솔로몬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승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셋째, 찬란했던 다윗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솔로몬이 역사의 전면에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디디아’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관심은 다윗에게서 솔로몬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 100세 때에 이삭이 태어나고 그로부터 이삭은 팔레스틴의 새 시대의 주인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관심의 집중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다윗의 나이는 50세이었으며 그로부터 2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나 자식들의 불화와 압살롬의 반역, 세바의 반역, 인구조사 등 수많은 난관을 겪으며 역사의 후방으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3. 랍바 성의 함락 (12:26-31절)
다윗이 암몬 족의 왕성 랍바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다윗의 군장 요압의 활약에 힘입어 랍바 성은 거의 함락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때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랍바를 치니 그 성은 이내 함락되고 말았다. 먼저 요압은 랍바의 왕성을 점령하였고 이제 그 왕성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는 ‘물들의 성’ 곧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을 공격하기 전에 다윗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다윗 왕을 모셔왔던 것이다. 이처럼 요압이 랍바를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청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요압은 진심으로 다윗 왕을 존경하고 그에게 모든 공로와 영광을 돌리고자 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요압이 군대 장관의 자리를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다윗 왕에게 아부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요압은 맹목적인 헌신을 잘 했으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아부라도 서슴지 않고 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에게 랍바 성 점령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위치를 더욱 보장받고자 했던 것이다.
다윗은 요압의 보고를 받고 곧장 랍바로 가서 그곳을 쳐서 점령하였고 그 성에서 노략한 수많은 물건을 가져왔는데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와 자기의 머리에 썼다.’고 하였다. ‘그 왕’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암몬 족속의 왕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 곧 말감 혹은 밀곰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왕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왕관의 무게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암몬 족속들이 왕처럼 섬기는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금 한 달란트의 무게는 34.27kg이며, 다윗이 왕관을 머리에 쓴 행위는 그가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다윗은 랍바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했는데 이는 암몬 족속을 노예처럼 부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암몬 족속의 모든 성읍에도 이와 동일하게 부역을 시켰다. 그 이유는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들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 주었기 때문에 그에 상당한 보복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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