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림사(崇林寺)의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신라 경덕왕(742~764)때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명문화된 기록은 「익산지」의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을유년에 행여(行如)선사가 중건했다는 기록과 보관중인 명문기와, 주변에 전해내려오는 숭림사와 파랑새의 전설 등으로 미루어 최소 고려 1345년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왜구의 침탈이 있었을 당시 승병대장이었던 뇌묵 처영대사가 숭림사를 본부로한 승병들의 본부로 상요한 탓에 왜구들의 심한 공격을 많이 받은 탓에 당시 「보광전」만 남고 불타버렸으며 이후 1697년(숙종 23년) 우화루와 영원전을 새로 창건하고 이후 나한전을 지었으며, 1987년에 주지로 부임한 지광스님아 범종각, 산신각, 일주문 요사인 안심당과 해탈교, 세심교를 신축하였고 올해 템플스테이 지정사찰로 지정되며 템플스테이 전용관인 적묵당과 화장실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숭림사 입구에서 만난 일주문.
고즈녁한 시골 산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주문 안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차량을 가지고 들어갈수 있다.
절 입구에서 약 1km에 이르는 길은 가족과 함께 걷기 정말 좋은 길이다. 평지라 힘들지 않고 주변의 개천과 숲을 감상할수 있도록 잘 조성이 되어 있다.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몰려와 상식없이 술과 고기를 굽는 냄새가 절까지 풍겨들어오고 술취한 사람들의 소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 몸살을 앓고 있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숭림사 전경
몇해전 보광전 뒷편 소나무 숲에 벼락이 떨어져 전각으로 옮겨붙어 화재의 위험에서 벗어난적이 있어 소방당국에서 소나무숲에 피뢰침을 세워놓았다.
▲ 숭림사에 들어서기전 만나게 되는 우화루. 선종사찰로 창건된 사찰인만큼 선객들의 강당으로 사용되었을것으로 보이는 전각이다.
일주문이 세워지기 전에는 일주문의 역할도 했다.
▲ 최근에 조성된 범종각.
숭림사는 도량이 좁아 범종각을 우화루 바깥쪽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 숭림사의 주 법당인 보광전 모습.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불탄것을 전쟁이 끝난후 광해군 조에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작지만 조선시대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밖에서 볼때는 초라해 보이지만 내부는 매우 섬세한 건축양식이다. 보물 825호로 지정되어 있다.
▲ 보광전 목조석가여래 삼존불. 조선 광해군시절에 조성된것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좌우 협시보살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조성되었다.
▲ 숭림사 보광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수 있는 닷집(보개)과 용 조각.
부처님 집인 닷집과 부처님을 호위하는 용의 꿈틀거리는 모습이 섬세하고 시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옛 단청의 색깔도 희미하게 남아 있어 조성당시의 불교미술을 한눈에 알수 있다.
▲ 공포의 안쪽인 내연목을 단순하게 처리하지 않고 용의 모습과 극락조등을 표현해 부처님 세계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조각으로 인해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나 하는생각이 든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가까운 군산 상주사 대웅전에서도 볼수 있다.
▲ 우화루 왼쪽에 위치한 정혜원 모습.
선종사찰답게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는 의미로 정혜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건물의 뒷편역시 전통사찰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후원과 선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생활 공간이라 사진을 올리는 것은 부적절해서 올리지 않습니다.
▲ 영원전 내부모습.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왕은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죄값(업)을 염라대왕등 10명의 대왕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전북 유형문화재 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한전 내부모습. 석존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16나한은 본래 군산 보천사에 봉안되어 있던것을 일제가 물러나며 가져가려고 익산역까지 운반하던중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바람에 무서워 가져 가지 못하고 가까운 숭림사에 놓고 간것이라고 한다.
▲ 올해 준공된 적묵당. 전통산사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샤워시설등이 갖춰져있고 참선등 수행공간의 역할도 할수 있도록 되어 있다.
▲ 숭림사의 옥의 티라고 할수 있는 석탑.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곳에 있는지 도량의 배치에도 어울리지 않고 도무지 이해가 안되 주지 스님께 여쭤봤지만 사정이 있다는 말씀만 들을수 있었다.
▲ 도량입구의 부도군.
누구의 부도인지 명문이 희미해 알수 없다. 하지만 부도가 있는것으로 미루어 예전에는 고승대덕이 많이 배출된사찰로 보인다. 부도밭옆으로는 최근 조성한 올레길같은 명상길이 조성되어 있다.
숭림사와 파랑새의 전설
때는 1345년 고려 충목왕 때의 일이다.
왕궁에서는 충목왕의 왕비 몸에 난 등창으로 근심이 가득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여러 의원들이 병을 고치려 했으나,
등창은 갈수록 심해지고 왕비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왕비는 지난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어느 사찰에 자신이 머무는 동안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왕비는 그 사찰의 모습과 산세를 일러주며 절을 찾게 하였다.
마침내 찾게 된 절은 지금의 숭림사였으며,
왕비는 숭림사에서 자신의 몸을 바쳐 관음보살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날,
기도 중 향긋한 향기에 취해 잠시 잠에 빠져든 왕비는
꿈속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자신의 몸에 난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왕비는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등창을 살펴보니 깨끗이 나은 채 미묘한 향내음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에 왕비는 관음보살께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병이 완치되어 궁궐로 돌아간 왕비는 그 이후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아 관음기도의 도량으로 삼게 되었다
※ 숭림사 뒷편 야산에 주지 지광스님이 동백과 차 나무를 수백그루 심어 놓아 몇년후에는 여러사람들이 함께 즐길수 있도록 심어놓았으나 여름철 피서객들이나 등산객등 무책임한 사람들이 이용해 대부분 뽑아가고 절주변에 몇그루 남아 있지 않다고 스님이 한탄하더군요. 그대로 두면 좋은 풍경이 연출될텐데 아쉽더군요.
스님은 그래도 또 나무를 심겠다고 하시더군요. 이번에 새로 나무를 심으면 제발 잘 보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숭림사는 익산지역에서는 드물게 전통 양식이 잘 보전되어 있는 사찰입니다. 문화재 관람료도 받지 않으면서 문화유산을 지켜내는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 고초가 느껴집니다. 사찰측이나 불자들, 관계기관만의 노력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락철이면 몸살을 앓고 있는 숭림사를 통해 불교문화유산을 보전하는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수 있을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