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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12월1일 차가운 쌀쌀한 날씨 영하 7.8도 매우 춥다.
김서방 가는 길에 금화 법회보로 함께 나갔다.
웅 동생은 문중 사진 찍은 필림 가지고 넘어가고 나는 선예 기성이를 대리고 놀았다.
저녁 때 택시로 넘어갔다.
오늘 낮에 제수씨 하는 말 사주팔자에 33살까지 살면 죽는다고 하시면서 그동안 3억이란 돈을 벌 계획이라 하셨다.
왜 그런 말을 하실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뜻이 있는 말인 것 갖다.
제수씨 아무리 잘해도 분수밖에 넘친 생활 마땅하지 못하지만 나는 항상 이해하려고 했다.
우리 모두 건강하지 못하고 아버지 말도 못하시고 이런 가정에서 살아주는 것만도 너무 감사하여 모든 것을 이해부터 하며 참고 살았다,
금화 또한 나와 아버지를 위해 온갖 수고를 하며 참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금화가 상금 받은 돈으로 제수씨께 선물을 사다 주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득이 될까? 본인마음 괴로움만 싸이며 속만 보이지 참는자에게 복이온다고 해쓰니 참고 살아야지 별수가 있나? 법회보고 종보와 88년 카랜다 가저오고 혼수품을 사가지고 왔다.
기특하고 가상한 것 하마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러 금화가 시집을 간다고 준비를 하니 꿈결 같은 이 세상 슬픔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해어나 행복을 찾아가서 부디부디 행복하게 살기를 이 오빠는 빌 뿐이다.
새달을 마지하여 이제 며칠 남지 안은 막내 여동생 날을 받아놓고 보내는 아쉬움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무심으로 보내는 날까지 무덤덤하게 시집 보낸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오늘을 보내고 취침 한다.
87년 12월 2일 맑음
오늘은 정산 동생이 농협에 예금해 둔 돈 일백 6십만원을 찾아가지고 오후에 넘어왔다.
부친께 돈이 3백만원 정도 든다고 설명을 앞서 드려는데,
돈을 앞에 갖다 놓고 내일 혼수품 사로 간다니까 돈 많이 든다고 야단 하신다.
금화는 통곡하고 울었다. 나도 울었다.
야속한 아버지 모르니까 이해 못하시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딸은 국민학교 3학년 일학기까지 겨우 보내고 중도에 포기하고 이제까지 고사리 손으로 밥해먹고 빨래하고 들에 일을 함께 하며 객지로 가지 않고 그동안 집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남들처럼 못해 보내는 아쉬운 마음은 업고 그렇게 인정도 사랑도 업는 매정한 답답한 생활하며 무엇 하로 자식은 낳아는지 이런 생각을 하도 답답해서 해봤다.
그런다고 기본 해줄것 안해 가지고 보내지는 안으리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먹은 데로는 해서 보내리라.
이해 못하시는 아버지를 이해시키며 속이 상해 땅을 치며 통곡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지만
속이 상한걸 생각하면 가슴이 매어진다.
아버지 고함치고 안된다 할 때는 이 망할 첨지 혼자서 그동안 혼자 일하며 살았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고 노력한 보람도 없이 자식들께 한을 심어주는지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고생을 다시해야 깨달을 날이 올까 너무 답답하다.
오늘 저녁에 종숙모 시목엄마 놀러 와서 자정 넘도록 놀다가고 대구 종제 오정이 한태서 전화가 왔다.
기도 좀 하고 잤다.
87년12월3일 설천 첫눈이 내렸다.
오늘은 금화 결혼예물 혼수 품목을 적어서 사려고 가야하며 오늘이 자장 날이여서 이불도 만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몰래 첫눈이 소복이 내렸다.
차가 오지 안아 택시를 불러놓고 아침을 차려먹고 돈을 가지고 금화가 정산가서 웅이한태 돈을 막겨두고 먼저 가는데 제수씨도 함께 가시라고 쪽지에 써 보내더니 안갔다.
10시 대서 금화한테서 연락이 없어 나는 또 무엇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고 매부한테 전화하려니까 사장어른께서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예안입니다. 김진홍이 있습니까. 하니 시내 나가다고 하셨다.
알겠습니다. 끊은 후 선미 미장원 전화번호를 알아 미장원에 하니 왔다가 머리 안하고 같다한다.
안동 숙모 녹전에서 오지 안아서 동남 다방에서 기다리라고 하여 있게다고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목재소 난희 한태 전화해서 동서가구에서 오늘 장농 찬장 등 계약 하로 가니까 삼촌 전화 좀 해 달라고 했다.
나도 했다. 그래더니 6만원 돈을 덜 주고 살수 있었다.
볼일 순조롭게 잘 보았다며 정산에 와서 금화가 전화 했다.
자고 내일 온다고 했다.
그렇게 하라 하고 낮에는 미산 아지매가 마침 와서 아부지 하는 설거지를 해주었다. 고마웠다.
티브이보다 기도하고 잤다.
87년 12월 4일 맑음
이침을 먹고 책을 보고 종보를 읽고 있다니 옥신이 한태서 편지와 사진이 오고 대구 김현조씨가 샘터 책을 두번째 보내왔다.
보고 있다니 금화 왔다.
부친께서는 짚을 실어 나르고 부친 오셔도 내다 보도 안하고 누워 자고 있다.
깨워서 점심 차려오라 해서 점심 먹고 김서방 생일 선물 쪼기 뜨던 것 뜨고 저녁 해먹고 내일 갈 준비 대강하고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했다. 섭섭하다고 말 많이 했다.
우리식구는 이제 괄로 밖이다.
날짜만 얼른 가서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왜 그런 말을 할까 눈물이 나왔다.
시어머님이 몸만 와도 우리 집은 가득하고 보내는 입장은 보내는 것만도 섭섭한데 너무 해 오려고 하지 말고 간단히 하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눈물이 나도 몰래 흐른다.
저녁 종숙모 미산 아지매 놀러 왔다 가고 티브이보다 기도 좀하고 잤다.
87년12월 5일 맑음 매부 생일날이다
금화는 오늘 매부생일 축하하로 가는 길에 서울로 구인사로 다녀오기 위하여 서울 참깨 한 되 싸가지고 같다.
버스를 노처서 택시를 불러 타고 이불 값을 가지고 정산가서 제수씨와 가던지 안간다면 돈을 안동가서 난희 한태 갔다 막겨 두라했다.
샘터 책을 읽고 종보를 읽고 소죽부엌에 불을 넣고 부친 피마자 따오시라 했더니 저녁이 좀 늦었다.
큰어머니 오시더니 금화 안와나 하시더니 금화안동 갔다 하니까 아재 잡는다며 성난 음성이다.
우리 모두 팔자 기구하여 이런걸 아부지 운명도 기구하여 이런 걸 따뜻한 말로 위로는 못할망정 그렇게 말을 하니 나도 기분이 상한다.
큰어머니도 아버지 부엌에 들어가서 하는 것을 보니 속상하고 안되서 그러게지만 진영 앞에 인사드리고 저녁 먹다니 하계 아지매 사과 부사를 좋은 것 4개 가지고 와서 공양올리고 나왔다.
큰엄마 왈 이게 무슨 꼴이냐 60평생 여자도 아닌 아제가 밥지어 먹고 빨래하고 걱정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너무 기분 나쁘게 이야기 한다.
큰 어머니 이야기 하는 뜻은 나 때문에 제수씨 안 넘어오니 나를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아직 고생 더 해야 한다.
어매 죽고 지금까지 부엌에 들어가서 해보지 안아 금화가 그동안 해준 고마움을 모르며 아버지로서 교육도 못시키고 시집 갈 때도 안 해줄라하니 이런 고약한 아버지 어뒤 있을까?
아제니까 자식먹여 살리느라 아무말 없이 이렇게 있지 어던 사람이 이렇게 고생하고 산단 말인가 하는 큰 어머니 말에 속상한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자식으로서 듣는 나는 분통이 터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가정을 이끌어 온 사람이 누군데 저렇게 말할 수 있나?
이 가정에는 내가 없어도 안데고 금화가 그동안 살림을 살아주지 안아다면 또 안데고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이정도 가정을 유지해 와는데 큰어머니는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지 우리가 아버지를 보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고 내 가슴 아픈 뼈아픈 말을 하는지 단지 건강 하지 못해서 내가 먼저 결혼 하지 못해 그런 소릴 들어야 하니 한편 서러워 미칠 지경이였다.
아버지 혼자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고약한 큰 어머니 나이 70평생을 살아와도 자기 마음대로 우리 조카들에 아픈 마음은 털끝만큼도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말에 내가 먼저 이해하리라.
불상하고 가엾은 큰어머니 본인은 고생 안하고 호강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볼 때는 지금까지 자손 취닥거리 하면서 마음고생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잇는데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다 고생인데 고생을 낙을 삼고 살아야지 별 도리 업다는 것 여기서 큰어머니 때문에 마음 상한 것을 접어두고 저녁에는 길수모친 숙모 오병 엄마 모여서 기도 한 시간하고 모두 가신 후에 취침 한다.
87년 12월 6일 맑음 눈이 두 번째 새벽에 몰래 왔다.
오늘 아침 일어나니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 쌓였다.
부친은 소죽을 끓여 놓고 아침을 지으셨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 옆집에 영창이 아제 결혼식 하는 날이여서 숙모한테 부조금을 5천원 전해달라고 주었다.
아침을 먹고 티브이 보며 샘터 책을 보다니 금화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재미있게 보냈다며 10시차로 서울 간다고 했다.
어제 제수씨 함께 나가서 다방에서 차도 마시며 얘기 했다며 9일날 이불 꽤메로 나온다고 했다. 속이 풀린 모양이다.
잘 다녀오도록 하라니까 영 레이디 책을 사보니 기분 나쁘게 써다며 올 때 책을 찾아온다고 했다.
낮에는 보일라 굴뚝이 녹아내린 것 다시하고 국을 데워서 점심을 먹고 저녁 쌀을 씻어 놓고 정산 동생 줄려고 쌀 한말 되놓고 집안을 청소하고 소죽을 끓이고 설거지를 했다.
저녁해 둔 것 차려서 먹고 부친은 저녁 먹은 설거지하고 머리 감고 공양미를 진영 앞에 올리고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고 인사를 올린다.
무슨 생각을 하셔을까 낮에는 금화 결혼준비 돈 든 것 농약대금 시목으네 우리 벼짚 절단기 금액 가스렌지 등등 금액을 적어드리고 품무골 밭을 팔아서 빚을 갚아버리고 전밭골 논도 내놓고 조금만가지고 혼자 하도록 하라하고 부자간에 의논 했다.
그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디면서 기도하며 살리라 기도하면 모든 괴로움도 슬픔도 사라지며 희망이 용솟음치니까.
도와주소서 관세음보살님하며 티브이 보며 책보다 일기 쓰고 기도하고 잤다.
12월 7일 맑음
샘터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있는데 대밭골 숙모가 왔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있다니 부친께서 떡을 찌고 점심상을 차려 오셨다.
함께 먹자니 속이 아파 못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그제 밤에 하계댁 사과 공양 올린 것을 깎아서 먹으라고 썰어주니까 숙모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떡 찐 솥에 뜨신 물에 밥을 말아 먹으라고 권하니까 겨우 두 숫갈 말아먹었다.
하계댁 오고 길수부모 선자모 시목 엄마 이렇게 와서 놀다 떡과 감주를 모두 먹고 숙모둘이서 치우고 설거지하고 저녁도 다해주고 갈 때 떡국과 쌀 한말 주어더니 쌀은 안가지고 그냥 갔다.
저녁 먹고 부친께서 시목으네 집에 갖다 주고 오셨다.
길수모 저녁에 다시 놀러 오셨다 간 후 티브이 보며 편지도 쓰고 하였다.
숙모가 불상하고 가엾은 생각이 든다.
젊은 몸으로 작은아버지를 만나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내 한태는 너무 잘해 주어는데,
아픈 몸으로 품을 팔고 때 조석을 결식하여 위장병이 생겼다.
낮에 내가 한말 숙모 오병이 졸업하고 돈 벌로 가면 오국이 대리고 우리 집에 와서 나와 아버지 함께 살면 어떨까 하니 살아내겠나 했다.
쌀 한 말은 대구 오정 사촌이 돈을 보내 줄 테니까 꼭 한말 사드리라고 부탁해서 우선 우리 쌀 한말을 주어는데 사촌이 돈 보낸다하면 안가지고 갈 것 같아서 그냥 우리 쌀 주는 것으로 했다.
나중에 금화 결혼식 때 와서 돈을 웅이 한태 준다고 했다.
기훈 엄마가 알면 큰일나니까 절대로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
기도 한 시간 하고 잤다.
87년12월8일 맑음
오국 엄마 숙모가 와서 빨래 모두 했다.
아침 먹다니까 큰아버지 오셔서 금화 결혼식 식당 맞춘 얘기 장보기 예물 한 것 보내 줄 것 등등 얘기하고 있다니까 숙모가 왔다.
연탄불에 물 언저놓고 들어와서 얘기하고 있다.
큰아버지 나가시고 나와 부친 옷을 갈아입고 빨래를 모두 할 것 찾아서 했다.
마늘도 물에 담가 건저서 깔 때 쉽도록 해놓고 점심 차려주고 저녁 준비다 해놓고 반찬 국 끌려서 먹도록 해놓고 삶은 빨레도 깨끗이 세탁해서 널고 저녁 때 올라갔다.
몸이 아푼데도 불구하고 몸 앗기지 아니하고 할 것을 다해주니 고맙고 감사하다.
누가 와서 이렇게 깨끗이 청소해 주는 이 없으며 속상하는 소리만하고 가는데 숙모가 이렇게 해주니 무어라 말 할수 없이 고마웠다.
언제 이 어려움을 모두 해탈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도와야 할까?
나는 물질로는 도울 수 없다.
마음으로나마 도와 주어야지 가엾은 숙모 어서 행복해저야 할텐데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
저녁에는 큰 어머니 와서 진영 앞에 촛불을 밝히고 인사드리고 가셨다.
안동 미제엄마 형수도 왔다.
절에서 교도소 있던 자리에 해동사을 다시 세우려고 터를 사는데 본산에서 2억을 보태고 나머지 드는 돈은 안동 신도회에서 시주 한 돈 2억 하고 모두 4억을 가지고 터를 매입했다 한다. 저녁 책을 보다 티브이 보다.
부처님 오늘하루도 이렇게 잘 지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어 감사합니다.
막내동생 금화가 서울에 갔다가 오늘 구인사에 도착하여 전화를 집으로 헸다.
이보살님도 만났다고 했다. 기도 많이 하고 오라하고 집에 와서 얘기하기로 했다.
기도 30분하고 취침하였다.
87년 12월9일 맑음 장날
제수씨 시내 이불 꽤 메는데 가시고 부친은 배추를 뽑아 오셨다.
오늘 장날 햅쌀 한말 정산 동생 집으로 보내려고 상명 아빠한태 부탁해서 맥주와 음료수상자도 정산 함께 보내서 돈으로 교환해 왔다. 안동 숙모 전화가 왔다.
이불 하로 나간나 하여 알아보고 전화해 드렸다.
금화도 구인사에서 안동 도착하여 12시10분경 전화가 왔다.
이불 하는대로 가면 모두 있을 터이니 그리 가도록 하라고 얘기했다.
오후 상명 할매 우표 사오셨다.
전화료도 마구고 MBC 여성 살롱 방송 아름다운 여성 책을 선착순 2천명 접수 한다며 우표 12장 동봉하여 신청하면 매월 한권씩 무료로 우송 해준다 하여 즉각 준비해 둔 우표 12장을 동봉하여 신청했다.
금화가 저녁 먹고 있다니 왔다.
구인사 서울 다녀온 이야기 이불하고 준비 모두 한 이야기를 하고 상명 아빠 길수모 놀러 왔다 가고 티브이 보다 기도하고 잤다.
87년12월10일 맑음
해동사에서 임시법회 참석 통문이 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레이디 잡지책 사온 것을 읽고 저녁 소죽을 끓이고 오후에는 김장 고추를 다듬고 고추장 고추를 다듬어 두고 저녁에는 길수 부모님 놀러 오셔서 대화하시다 가시고 티브이보다 기도하고 취침 하였다.
87년12월11일 맑음
정산에 배추와 사과 한상자 고추를 리어까에 싣고 부친 갔다 오시고 오후 길 닦는데 갔다 오시고 종형수 농약방에서 보내주는 비누 한 장을 가지고 나오셨다 가시고 금화는 집 청소하고 나는 소죽솥에 불을 넣고 종보도 보다 책도 읽고 돈 예산 금화 결혼 준비 옷 사오라고 돈 타고 농약값 준다하고 2십만원 받아두었다.
일기 쓰고 티브이 보고 기도하고 이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부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동장과 담당직원 선거 투표 통지표 돌리로 왔다 갔다.
87년12월12일 맑음
금화 시아버지 환갑잔치에 갔다.
오늘 막내여동생 시부 회갑하는데 거든다고 갔다. 올 때 혼수품 준비 해오려고 돈 좀 가지고 갔다.
부친과 나는 아침을 먹고 길수모께서 그릇을 설거지 해주고 가셨다.
저녁에는 종숙모와 종형수씨 김장 마늘 깔 것 가지고 와서 내가 속을 좀 썩히더라도 제수씨를 들와서 살림하도록 잘 타일러보라고 얘기 하신다.
왜 이렇게 우리 때문에 집안이 걱정을 해야 하나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길수모도 오시고 이런저런 얘기하며 11시까지 다 까서 가시고 나는 기도 좀 하고 잤다.
87년12월13일 맑음 영하9도
별일 없이 오늘하루가 지나갔다.
부친 아침 국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고 소죽을 끓여주고 아침상을 차려서 먹는데 감사한 마음이다.
부친께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수고해야 한다니 어떻게 해야 이 수고로움을 덜어 들일까?
나는 영레이디 잡지책을 읽고 티브이 보며 하는 일 없이 보내고 저녁 재종형님 시목 엄마 놀러 와서 10시까지 놀다 간 뒤 일기 쓰고 기도하고 안동종형수가 와서 낮에 설거지하여 점심상 차려주고 먹은 후 설거지하고 참깨 두말 팔았다.
이렇게 모든 사람 신세를 끼쳐가며 살아야 한다니 이일을 어찌할까?
전생현생 지은 업이 너무 많아 나와 부친이 고행을 해야하는가보다.
모든 이들이 적선을 하고 복을 지을 지어다.
부처님이시여 도와주는 모든 분들께 큰 가피력을 주소서 부처님에 자비하신 위신력으로 소원성취 이뤄지도록 기도 염불정진 축원하는 것이 나에 소임이 아니던가 자비하신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이 중생과 부친을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께 부처님 가피력을 입으시게 하소서 기쁘게 하소서 괴로움이 소멸되어 희망에 날이 대고 달이대어 1년 10년 세세 년년 근심걱정 업게하여 주소서 이렇게 염원기도하며 오늘을 마감 하였다.
87년12월15일 화요일 맑음
금화시집에 갔다 오늘 왔다.
아무 것도 안하고 책을 보고 있다니까 동장과 담당서기 함께 와서 하는 얘기 내일 투표 기권 하지 말고 갈수 업는지 하면서 태풍피해로 준다는 명목으로 돈 만원을 주고 갔다.
큰 어머니 왔다 가고 금화가 막배로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왔다.
청첩장도 가지고 와서 부친과 함께 모두 봉투에 넣어두고 시집에서 있어던 이야기도 하고 티브이보다 기도하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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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87년이 1988년으로 본문의 년도가 중복표기된 듯 하지만,
누이동생 (금화씨)가 결혼을 하였군요.
초등학교 3학년 10살 ~ 11살 어린나이에 학교를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가사를 떠안었던 누이의 결혼을 앞두고
혼수비용문제로 현실의 힘듬앞에 오누이가 찢어지는 마음으로 통곡을 하였던 가슴아픈 나날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온 가족이 정심으로 마음을 모아 고난을 극복한 결과로 오늘날의 금화씨가 성공하여 옛말하며 잘 사는것이라 여겨집니다.
예, 일기는 날짜가 생명인데, 입력과정에서 그런 오차가 있었던듯 싶습니다.
일단 1987년 12월의 일상이 맞기에 본문 날짜 수정했습니다.
형님 생전에 활보에게 시켜가며 공들여 한글파일로 옮긴 일기지만 오타도 많고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남은자의 몫으로 알고 형님이 그토록 자신의 삶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했던 만큼 수고 스럽더라도 남은일기 잘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남의 일상이지만 이렇게 읽어주시는 호돌이님이 고맙습니다.
정말 어려웠지만, 한점 부끄럼 없이 그 고난의 세월을 살아낸 우리 남매들...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