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요즘 에어컨을 전혀 틀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각 수석들께서도 가급적 에너지 절약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최고 기온이 섭씨 30도를 훌쩍 넘어섰던 지난 월요일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말입니다. 이쯤 되면 올여름 청와대 직원들은 무덥게 지낼 각오를 해야 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보나 마나 대통령은 웬만해선 에어컨을 켜지 않고 여름을 날 것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올여름 우리 사회의 키워드는 절전(節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절전의 초점은 에어컨 사용 제한입니다. 그 선두에 대통령이 서 있는 셈입니다. 대통령은 상의하달(上意下達) 식의 에너지절약 분위기가 공공기관으로, 그리고 민간 분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전력 사정이 호전되면 다행입니다. 올해의 전력 부족난을 당장 넘기는 데는 이런 땜질식 처방이라도 작동해야 하니까요. 그만큼 예비전력 부족 문제가 심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에어컨이 주는 혜택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여름에 시원한 사무실이나 주택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이를 뒷받침할 기술과 경제력이 생기면서 에어컨은 직장과 가정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값싼 전력요금이 뒷받침합니다. 우리는 이제 에어컨이 없는 빌딩이나 아파트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어컨은 1902년 ‘윌리스 캐리어’라는 미국의 엔지니어에 의해 발명되어 1911년 미국 발명특허를 얻은 후 인류의 생활방식과 경제 지도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전기 기구입니다. 도시의 구조를 바꿨을 뿐 아니라, 과거엔 도시가 발달할 수 없었던 덥고 황량한 곳을 대도시로 바꾸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에어컨의 상업화 이후 미국의 선벨트(Sun Belt)는 각광받는 도시개발 지역이 되었습니다. 마이애미, 댈러스, 휴스턴, 피닉스 등 남부의 대도시들은 에어컨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이 발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바이와 같은 중동의 사막 도시, 싱가포르와 같은 열대의 도시가 번창하는 것도 전적으로 에어컨 덕택입니다.
싱가포르 국가 창시자 리콴유(李光耀)는 에어컨을 가리켜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의 논리인즉 열대지역(싱가포르) 사람을 가장 생산적인 인력으로 바꿔놓은 것이 에어컨이라는 설명입니다. 싱가포르 환경장관은 한술 더 떠서 “에어컨이 없었다면 싱가포르인들은 하이테크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야자나무 그늘아래 앉아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습니다. 두 사람의 지적이 매우 센스 있고 또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물엔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는 법, 에어컨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예비전력이 필요합니다. 전기는 참으로 고급스런 에너지이긴 하지만 아직 대량으로 저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름에만 쓰는 에어컨을 위해 막대한 규모의 발전설비를 갖춰 놓아야 합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폭염은 시작되고 예비전력 부족으로 전력공급을 맡은 정부 부처와 관련 기관에 비상에 걸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력 공급의 30% 이상을 담당하는 원자력발전 분야가 비리 스캔들로 정상적인 가동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올 여름은 블랙아웃(대정전)의 그림자 속에서 국민이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에어컨 없는 아파트에서 여름을 지내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앞뒤 창문을 열어 통풍이 잘 되게 하고 아주 더울 때는 부채질을 하면 견딜 만합니다. 사람 몸의 적응력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있습니다. 우선 소음이 덜해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아파트의 경우를 보면 냉장고, 컴퓨터, 텔레비전 세트, 세탁기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가전제품이 뿜어내는 소음이 가득합니다. 여름이 되어 문을 꽁꽁 닫고 에어컨을 켜면 그야말로 아파트는 선박의 기관실에서나 들리는 기계음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에어컨을 치우면 냉방병에 걸리지 않고 전기요금도 절약되니 ‘에어컨 없는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의 소비성향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에어컨을 씁니다. 노약자나 어린 아기 등이 있는 가정은 에어컨이 없으면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에어컨이 있어야 능률이 오릅니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절전을 호소하는 것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 효과가 있을 텐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 전력부족으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소비자 심리가 발동할 뿐입니다.
에너지 문제, 특히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력 요금에 가격 탄력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세계 수준으로 볼 때 전력을 값싸게 공급하다보니 전력난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에너지의 빈국이면서 에너지의 효율적 사용 측면에서는 바닥을 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소비자는 절전형 가전제품을 찾지도 않고, 그러니 기업은 그런 제품을 개발하는 데도 소홀합니다. 귀한 줄 모르니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고 펑펑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전력 수급문제의 땜질식 처방, 이제 근본적으로 해결했으면 합니다. 새로운 정부의 초반에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말했네요. "그동안 전력난이 발생할 때마다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갔는데 이제는 근본적인 대책을 새롭게 마련해야 하겠습니다."고. 그러나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력공급 체제는 고장 중이고 수요체제는 낭비 중인데, 모두가 중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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