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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큰 희생과 자기 포기, 인내와 사랑을 요구하는 좁은 문!
참으로 특별한 이력을 지닌 우리 시대 탁월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가톨릭 신학자인 스콧 한(Scott Hahn)입니다. 그는 원래 미국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런 스콧 한이 198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가톨릭 신자로 회심했습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성경 학자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한동안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정신없이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변한 사람을 보고 주변 사람들 가만있지 못합니다. 다들 한 소리씩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그는 당시의 고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한 지 약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하느님께 대들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친구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무슨 처사가 이렇습니까?”
친구들은 갑자기 변한 저를 도무지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남기고 다들 떠나갔습니다.
“너는 변했어. 우리는 더 이상 너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아라!”(스콧 한,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라’, 바오로 딸 참조)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처음 직면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을 묵상해봤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좁은 문'은 십자가가 아니다>
복음: 루카 13,22-30
오늘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저는 좁은 문을 ‘십자가’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좁은 문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도록 만드신 예수님의 작품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여닫는다는 것은 조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주어져 있는데 십자가를 지고 당신께 올 수 있도록 예수님게서 마련하신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니 트레호(Danny Trejo)는 괴로운 과거, 중독, 투옥을 극복하고 사랑받는 배우가 되어 회복과 구원을 체험한 놀라운 사람 중 하나입니다. 대니는 1944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력, 범죄, 마약이 만연한 가정과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약물을 시작했으며, 8세에 마리화나를 시도하고 12세에 헤로인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토레호의 삶은 범죄와 중독으로 더욱 악화하여 청소년 구치소에서 여러 차례 수용되었고 결국에는 성인 교도소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습니다.
1960년대 초에 당시 그는 헤로인 중독에 깊이 빠져 있었고 분노와 폭력에 시달렸으며 종종 싸움을 위해 독방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그는 변화하겠다는 개인적인 결심을 했고, 인도를 구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렇게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었습니다. 이때 그를 이끌어준 영적 기반 회복 모델이 12단계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더 높은 영적 권위에 항복하고, 책임을 받아들이고, 보상하고, 공동체에서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이 트레호의 회복의 기초가 되었고 그의 인생관을 바꾸었습니다.
석방된 후에도 트레호는 절주에 전념했으며 AA(Alcoholics Anonymous) 및 NA(Narcotics Anonymous)에 합류하여 새로운 커뮤니티와 목적을 찾았습니다. 그는 빠르게 AA의 후원자가 되어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자기 경험을 힘과 공감의 원천으로 활용했습니다. 현재 트레호는 위험에 처한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학교, 교도소, 회복 센터에서 연설하면서 변화 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빌 윌슨은 AA(Alcoholics Anonymous)를 공동 창립자입니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알코올 의존증이 되었으며 각종 노력으로 되지 않던 금주를 한 가지 깨달음을 통해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윌슨은 여러 차례 술을 끊으려고 시도했으며 종종 짧은 기간 동안 금주를 경험했지만, 매번 재발했습니다.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년간 의학적 치료, 심리 상담, 자기 훈련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악화하였고, 일련의 입원과 뉴욕시의 타운스 병원에서의 회복 시도 실패 후 1934년에 바닥을 쳤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욕망을 못 박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혼자 힘으로 질 수 없습니다. 빌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에디라는 친구에 의해 술을 끊는 것도 믿음의 힘, 하느님께 항복하고 의존하는 노력,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윌슨은 알코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평안함과 해방감을 느끼는 강렬한 영적 경험을 합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으며, 더 높은 힘에 굴복하는 것이 중독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알코올 중독자 밥 스미스 박사와 함께 알코올 중독자 익명 단체(Alcoholics Anonymous)를 설립하여 공동 지원, 책임 및 영적 원칙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동은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획기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이미 편안해진 방식에 몸과 마음을 가두지 마라. 그러는 순간, 오직 그것만 원하게 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말은 영화 ‘아마데우스’, ‘백야’의 안무 총괄 책임을 맡았던 미국 무용계의 여왕 트와일라 타프(Twyla Tharp)의 말입니다. 리더십 전문가인 김남인 씨가 타프와 인터뷰할 때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정상에 오른 비결은 무엇인가요?”
타프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 5시 반, 옐로캡(택시)의 문을 여는 순간이에요.”
그녀는 무용을 시작한 후 50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5시 반에 이미 예약해 놓은 ‘택시’를 타고 체육관으로 가서 온몸과 정신을 깨웠다고 합니다. 그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피곤할 때가 있고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울 때가 있지만 이미 와 대기하고 있는 택시의 문을 열고 앉으면 다시 이불로 돌아갈 수 없기에 일단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무용에 대한 태도가 그녀를 세계 최고 현대무용가로 만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연습을 하는 일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택시’라는 매개체가 없다면 이루기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접하게 됩니다. 운동하거나 공부할 때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적은 사람들이 함께 십자가의 길로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고해성사가 힘들고 성체성사가 지겹더라도 그것을 꾸준히 하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줍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의 의미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셨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라는 데 있다고 하신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1990년대 초반, 노래방이 생겨나면서 친구들과 자주 들렀던 생각이 납니다. 시간제한이 있는 노래방에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약 1분이 채 남지 않았을 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렀던 노래는 꼭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노래방에 있는 노래 중에 가장 긴 노래였습니다. 이 가장 긴 노래를 함께했던 친구들이 한 소절씩 부르면서 마무리했던 것이지요.
이 노래가 끝난 뒤에는 시간을 초과하면서 놀았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 잘 부르는 노래, 의미 있는 노래 등으로 마무리합니다. 왜 바뀌었을까요? 시간을 연장하는 것보다 노래 부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떠올리며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지금의 삶 자체가 중요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당연히 후자인 지금 삶 자체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 자체에만 집착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죽음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지금 삶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삶, 자기가 잘하는 삶, 또 의미 있는 삶으로 자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삶에 특히 사랑하며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 건강, 재물, 성공이라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해서는 구원의 길로 향하는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통해 이 세상에서는 첫째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의 가치를 통해서는 꼴찌처럼 보이더라도,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때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지금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혹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면 어떨까요? 참으로 막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을 코 앞에 두고서 울며 이를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구원의 좁은 문을 향한 지금 우리 삶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의 명언: 책임감은 성숙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헨리 클라우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우리는
넓은 문 앞에 서있기를 좋아하였네.
주님께서는
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권고하셨지만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네.
주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좁은 문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기득권을 누리며 현실에 안주하고
노력하지 않고 적당주의와 대충주의로 때우는 삶
넓은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매 순간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
좁은 길입니다.
귀찮고 하기 싫고 불편을 감내해야 되기에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좁은 길은 외롭고 두려워서
자발적으로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쉽게 현실과 타협하며 넓은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 좁은 길이 옳다고 믿으며 가는 그 단 한사람과 함께 갈 때
우리도 그 단 한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불의를 일삼는 편에 서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눈치 보느라 맹종하느라 아닌 걸 알면서도
바른 말을 못하고
옳은 일을 하는 자의 편에 서지 못해
불의를 일삼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6,1-9
1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3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4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5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6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7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
8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9 그리고 주인 여러분,
여러분도 종들을 이와 같이 대해 주십시오.
겁주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며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