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강화하는 새로운 법안을 11일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는 이날 기존의 법안보다 한층 강화된 방식으로 전시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군동원준비 및 동원에 관한 법률(동원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이 법안은 출석 의원 351명 중 찬성 283, 반대 1, 기권 49로 통과됐다. 아예 투표하지 않은 의원도 18명이나 됐다.
우크라이나 의회의 재적 의원은 450명이다. 그러나 계엄령하에서는 선거를 치르지 못한다는 헌법 규정에 따라 지난해 총선은 무산됐고, 일부 의원들은 자신들의 원래 임기가 끝나자 자진 사퇴했다.
최고 라다(의회)의 표결 결과/사진출처:스트라나.ua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의회가 채택한 새 동원법은 군 동원 기피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군 지도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반격은 더욱 성공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 동원법은 동원을 기피하는 예비역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적발하고 강제로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도록 기존 법률을 보완하는데 초첨을 맞췄다. 이미 긴 전쟁에 지친 우크라이나에서는 인기가 없는 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손실된 병력을 보충하는 예비군 동원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법안 통과에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소요된 이유다.
실제로 법안 심의 과정에서 군 지휘부와 여론을 살피는 정치권 간의 '밀당'이 길어지면서, 무려 4천여건의 수정안이 제출됐고, 최종 법안이 2차 낭독(법안 심의)에서 가까스로 채택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이 법안의 핵심은 △전자 시스템 도입 등으로 동원 소환장(우리 식으로는 군입대 영장) 전달 과정을 대폭 간소화하고 △기피자 색출과 처벌을 강화해 전시 동원 체제의 효율성을 확립하며 △동원 면제 기준을 좁혀 대상자를 늘리는 데 있다. 그나마 동원 대상자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던 동원 3년후 자동 해제되는(전역) 조항은 군 지도부의 요구로 막판에 삭제됐다.
지난해 12월 키예프에서 열린 동원 해제 요구 시위/텔레그램
이 법안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일 서명한 병역법 개정안과 함께 '전시 총동원 체제'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평가된다. 새 병역법은 징집 대상 연령을 현행 27세 이상에서 25세 이상으로 낮췄다. 동원 대상자가 적어도 수십만명 이상이 추가로 확보된 것이다.
◇ 새 동원법의 빛과 그림자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새 동원법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즉시 서명할 것으로 보여 대략 5월 중순에 발효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일부 의원들이 이 법안에 대한 발효 중지 결의안을 제출하면,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늦어질 수도 있다.
정상적으로 이 법안이 발효할 것이라고 보면 실제로 법적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대충 7월 중순 쯤이다. 동원 대상자가 군동원및 징집 사무소(우리 식으로는 병무청)에 병역 신고를 하는 기간, 즉 60일이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18세~60세 우크라이나 남성은 이 기간에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징집 사무소에 자신의 인적사항(병역)을 신고해야 하고, 신고필증(군사수첩, 병역수첩)을 받아 늘 소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 보는 현지 전문가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동원에서 제외된 남성들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병역 신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전쟁터로 끌려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동원을 피해온 기피자들이 순순히 징집 사무소에 나타나리라고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이전보다는 그 부담이 훨씬 크다. 신고기간 60일이 지나면, 신고 미필자들은 법률적으로 바로 병역 기피자로 등록된다. 비록 처벌 규정이 징역형에서 벌금형으로 낮아졌지만, 벌금이 최대 2만2,500 흐리브냐(약 79만원)에 이르고, 운전 면허증 박탈 등 상당한 사회적 제재가 가해진다. 또 수시로 이뤄지는 불심검문에서 발각될 경우, 바로 끌려간다.
최근 키예프 시내에 나타난 군 동원 요원들/사진출처:스트라나.ua
그렇다고 기피자들이 순순히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만성적인 부패 구조다. 언제나 빠져나갈 길이 있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불심검문에 걸리더라도 현장에서 돈으로 '딜'을 하거나, 징집 사무소로 끌려가더라도 동원 대상자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뇌물'로 해결할 수 있다. 아예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소위 '줄'을 댈 수도 있다.
특히 새 동원법에 따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업'의 직원인 경우, 동원이 유예된다. '전략적 기업'에는 양조 공장은 물론, 에피센터(Эпицентр)와 에바(Евa)와 같은 슈퍼 체인점, 에게르준드(Егерзунд)와 같은 생선 가게도 포함됐다는 언론 보도가 이미 나오고 있다.
전략적 기업 종사자들의 동원 유예는 넓은 의미로 '돈이 있는 자는 살고 돈이 없는 자는 죽는다'는 뜻의 유전무죄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부담하는 근로자들을 보유한 기업도 원칙적으로 전략적 기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세수 확보 차원에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말 군 지휘부가 50만명 추가 동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한 사람을 동원하려면 납세자 여섯 명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세금이 많이 내는 사람은 후방에서 계속 일을 해야 전선에 나간 병사들의 비용을 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가 새 동원법 심의 과정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또 동원 기피자들에게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명분이 된다.
◇ 동원을 피해 잠수타는 예비역 속출?
앞으로 예상되는 동원 회피 방식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잠수 타기'다. 징집 사무소에도, 길거리에도 나가지 않고, 일자리도 구하지 말고 전쟁에 끝날 때까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미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 '잠수'를 탈 것으로 보인다. 여성 보호자와 함께 해외로 도피하는 18세 이하의 소년들이 당분간 크게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새 동원법은 (병역 신고후 받는) 군사 수첩이 없는 자국민에게는 해외에서 영사 조력을 받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우크라이나를 떠난 18세 이상의 남성들을 겨냥한 조치다. 여권 등 해외에서 우크라이나 법률적 문서를 얻으려면, 일단 귀국해서 병역 신고를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귀국하는 순간 다시 해외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는 젊은 남성들은 귀국하기 보다는 잠수를 타거나, 현지에서 시민권 취득을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다.
해외에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 젊은 남성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또 다른 방안은 체류국의 '강제 추방' 조치다. 실제로 발트 연안의 에스토니아는 지난해 말, 군복무 의무가 있는 우크라이나 남성을 추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에스토니아 내무부 측은 "우리는 우크라이나 젊은 남성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며 "그 대상은 7천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에스토니아가 범죄인 인도에 관한 규정을 EU측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원칙적으로 '범죄인 인도'라는 법원 판결에 의해서만 우크라이나 병역 기피자를 추방할 수 있다. 어느 나라든 '범죄인 인도' 소송은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같은 사실을 잘 아는 독일은 아예 병역 기피를 이유로 우크라이나 남성들을 추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르코 부시만 독일 법무장관은 지난해 말 "우리는 개개인의 의지에 반해 징집이나 군복무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에는 병역 의무가 있는 우크라이나 남성 약 20만명이 체류 중이다.
새 동원법이 앞으로 우크라이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11일 "우크라이나의 인구통계학적인 문제로 인해 추가 동원으로 한 세대가 완전히 사라질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NYT는 "우크라이나에는 이미 40대 남성이 20대 남성보다 두 배 이상 많고, 군 복무에 적합한 30세 미만의 건강한 남성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수가 작은 세대에 속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1990년대 경제불황으로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졌고, 그 추세는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20대 남성의 인구가 현저하게 적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어가는 우크라이나 군동원 요원들/사진출처:영상 캡처
우크라이나의 동원 현실은 이미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게 미 워싱턴 포스트(WP, 2024년 3월 17일자)의 지적이다. WP는 흐멜린스키 지역의 마코프 마을을 예로 들면서 "지금까지의 동원으로 이 마을에는 남자가 거의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이미 동원된 동네 이웃들이 모두 최전선에 가 있고, 그중 일부는 죽거나 다쳤다는 사실을 알고 전쟁터로 끌려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이 매체는 밝혔다. 일부 주민들은 루마니아와 몰도바 국경을 넘어 해외로 도피했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고도 했다.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징집 요원들은 텅 빈 거리를 배회하며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다고 살벌한 현지 모습을 그렸다.
WP는 우크라이나에서 새 동원법이 채택되자 즉각 "우크라이나에 패닉(공황)을 촉발할 위험이 있다"며 “동원은 인기가 없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동원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예비역들이 더 이상 전쟁에 참전하기를 꺼린다는 사실이다. 새 동원법에 따라 60일 간의 병역 신고 기간이 지나면, 수십만 명 많게는 수백만 명의 동원법 위반자(동원 기피자)가 나올 게 뻔한데, 이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보내려면 시계처럼 세밀하게 작동하는 거대한 동원 체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부패한 우크라이나 군동원및 징집 체제로는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스트라나.ua는 전망했다.
◇ 더욱 강경한 동원 강화 목소리도
그런 탓인지, 일각에서는 군 동원에 관한 더욱 강경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이미 수십만 명이 죽거나 부상했기 때문에 25세가 아니라 20세부터 동원해야 하고, 이스라엘과 같은 여성 동원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여성 의원인 마구아나 베주글라야와 같은 강경파는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한다"며 "헌법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니, 모든 젊은이들이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여성의 대규모 동원 주장에 아직 손을 내젓고 있다.
우크라 동원 예비군들/사진출처:페이스북
동원 강경론 뒤에는 불편한(?) 동원 현실이 숨어 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수도 키예프(키이우)에서는 한 달에 각 지역(우리 식으로는 구)별로 평균 100명이 동원된다. 10개의 지역이 있으니 시 전체로는 한 달에 약 1,000명 꼴이다. 키예프 인구는 2023년 8월 기준, 320만 명(비탈리 클리치코 시장 추산). 우크라이나 인구는 현재 약 3,150만 명(사회 정책부 추산)이니 그 비율로 따지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한 달에 1만명 정도가 동원된다. 도시보다는 지방의 동원 비율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월 동원 인원은 최대 2만명이다.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올해 초부터 매달 3만 명 이상이 우크라이나 참전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일부 과대포장됐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최대 동원 규모보다 적지 않다. 그 결과, 크리스토퍼 카볼리 유럽주둔 미군사령관은 "전쟁 중의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러시아군 병력은 2년전 개전 당시보다 15%나 더 많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무기나 병력 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앞서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크라이나의 동원 현실을 보면 앞으로 그 격차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전쟁의 승패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