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에 줄뿌림으로 파종한 무새싹이 2주일 만에 제법 결기에 찬 줄기와 실핏줄 같은 혈맥으로 가득찬 이파리가 되다니 정말 대견스럽다. 잘 만들어진 두둑과 명쾌하고 시원하게 뻗은 고랑은 마치 단정하게 미장된 온들방처럼 뿌듯하다. 오롯이 내가 한 작품인 것이 자랑스럽다. 봄철 밭만들기 때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한 것으로, 평생 이처럼 빠른 교육의 결과는 경험한 적이 없다.
미리 만들어 놓은 한 개의 큰 두둑과 작은 두둑에 열무와 갓씨앗을 흩어뿌리기로 파종을 하고 가볍게 복토를 해주었다. 이들도 일주일 후에 어여쁘고 수줍은 새싹으로 흐뭇해지겠지...정성들여 물도 훔뻑 주고, 잘 다독여주고 다음 주 중간에 물주기 재회를 약속하고, 포도수확을 위해 포도농장으로 서둘러 떠났다. 9월 들어 하루가 다르게 해가 짧아져서 6시가 조금 지나니 땅거미가 내려 어둑어둑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더 급했다.
농원 사장님이 전기가위를 빌려주셔서 포도봉지를 살짝 열어서 충분히 먹색으로 완숙된 포도송이를 따서 그 향과 맛을 음미하는 순간 지금 여기 내가 선 세상이 천상인 것처럼 황홀함이 온 몸에 퍼진다. 이처럼 깊고, 입안이 꽉차 오르는 묵직한 식감은 포도를 먹어온 지 어언 육십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처음 느끼는 맛인 것 같았다. 정말 평생 새롭고, 평생 처음인 것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 ‘생의 신비’에 감탄했다. 몇몇의 송이는 완벽하고 몇몇은 자그마한 송이가 귀여울 정도, 몇몇은 봉지 안에서 미이라가 된 것처럼 형태가 고스란히 남은 상태로 밀랍되어 있었으나 늘상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이 보탠 게 별로 없는데도 이처럼 풍성하고 온전하게 자신을 내주시는 타종 생명체에 경이로움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 일 같다. ‘좁쌀 한 알에 우주가 깃들었다’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을 포도에서 다시 발견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