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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묵상글 ( 사순 제4주일. - 구원과 심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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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구원과 심판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될까?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까? 단죄하실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지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걸까?
단죄하러 오신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은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인가? 단죄하시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사전에 단죄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지옥이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사순 제4주일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구원을 바라시고,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사순 제4주일은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단죄와 지옥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가르칩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명 심판과 단죄와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아무리 바라셔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단죄받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교회도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자라는 믿음과 심판자라는 믿음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심판받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하느님을 모진 심판자로 믿었고,
그는 자기의 믿음 대로 심판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고 정말 아무것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진정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 믿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맡깁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굴이랄까 굴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어둡고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 굴을 통과해야 신세계가 열린다는 겁니다.
희망은 굴 저편에 그 굴을 먼저 통과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굴을 통과해 당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믿을만한 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치시고
오늘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 가르침도 믿지 못한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보다 어둠인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 경우 주님은 더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불신과
주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음이 우리의 비 구원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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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부모는 자녀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쏟아붓지만, 자녀가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왜 자녀는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에게 주는 선물이 부모 자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 갑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면 자녀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혼자 병원 다니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면 그만큼 부모 간호하는 데 드는 힘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의존하게 않게 되지요. 실제로 부모에게 자녀가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늘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가 마침내 밤을 몰아내는 빛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이로써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만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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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의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어요(글로리아 게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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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오늘은 사순 4주일로, “기쁨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으로 기뻐 뛰며 흡족해 하리라.”
그리고 <제1독서>에서 역대기 저자는 주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성전은 파괴되고 이방인의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 유배를 끝내주시는 기쁨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실현한 구원과 그리스도께서 실현한 부활을 함께 노래하며, 우리를 기쁨에로 초대합니다.
<복음>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말해줍니다. 흔히 말하는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 혹은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 한 마디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여기에는 하느님의 외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그 사명의 기원과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천명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나,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줍니다(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사랑한 나머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친다).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모든 사람들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축복의 자리요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혹 우리는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어둠’입니다. 그것은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같은 것들 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이타적인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렇습니다. 세상에 빛은 이미 왔고,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구원의 삶과 사랑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비추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감겨있어 빛을 보고 못한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그러니 <시편>(36,11)의 말씀처럼, 빛으로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둠은 물려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어둠을 볼 수 있음은 이미 빛이 비추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둠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둠을 바라보기보다 어둠을 비추어주는 빛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사실, 어둠은 어둠을 보며 어둠으로 이끌지만, 빛은 빛을 보며 빛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이미 세상에 왔고,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며, 기뻐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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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경은“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제의색은 장미색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기도와 희생과 보속, 극기의 삶을 잘 살아오셨습니다. 지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고비를 넘겼으니 좀 더 노력하라는 기쁨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기쁨을 희망하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큰 사랑을 줄 줄 알아야 하는데, 받는 데만 익숙해졌지, 사랑을 줄 줄 몰랐습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다고 했거늘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사랑은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주어진 고기에 묶이지 않도록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면,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기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린다면 아기 새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제 실속을 위해 정신없이 삽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기보다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는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내 원의대로 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댑니다. 영락없이 어미 새의 머리를 쪼는 아기 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금방 하느님께 불평하고 저항했으며 결국 하느님께서 보낸 뱀에 물렸지만, 하느님의 처방에 따라 믿음을 갖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민수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봐서 산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숨겨있는 그분의 사랑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5).
성 콘라도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일깨우십시오.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미사참례를 하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차원을 넘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몸소 씨를 뿌리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의 말씀을 새기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행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동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3,18).라고 말합니다. “외아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보내신 이유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이자 내용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히 살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구리 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에 부름을 받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결국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은총을 주어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인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고 드러난 사랑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의 원리라는 유혹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이 미사를 통해 사랑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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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짧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있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to pass the storm. It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참 멋진 말입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우에서라도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지점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바오로는 이제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환점(turning poi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전환점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입니다.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은 뱀으로 변한 사탄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지고 싶었던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금지했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은총도 함께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늘 전환점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양을 치던 모세는 이제 새로운 사명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탈출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파스카’입니다. 이집트의 모든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시는데 집 앞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맏배는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파스카란 ‘넘어간다. 건너가다, 지나간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파스카를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저의 삶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1986년 1월 저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데 인사 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고, 인사 담당 장교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제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미사에 빠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고 하는 강원도로 갔는데 저는 경기도 용인으로 갔습니다. 꽃길만 같았던 성당 생활은 3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잔디밭에 영양제를 주라고 했는데 대충 주었습니다. 성당 의자를 닦으라고 했는데 대충 닦았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용산으로 출장 가면서 제게 부대로 들어가서 지내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어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성당 군종병 생활을 마치고 인사처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럽고, 속이 상한 일이었지만 돌아보면 제게는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고, 남은 군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장미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선포됩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칙령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키루스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에 있었던 전환점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지금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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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밤거리를 다니다 보면 어두운 곳도 있고, 밝은 곳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가로등’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미사가 끝날 때쯤 모든 불이 사라집니다. 빛을 밝히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쉬울까요? 매일 가는 길이니까 쉽게 찾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히 깜깜해서 어둠 그 자체라면, 어쩌면 집에 가는데 2박 3일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상에 빛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 빛은 우리를 밝히기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들어 올려집니다. 가로등이 높은 곳에서 길을 비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십자 나무에 달리게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진 것임을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라고 말입니다. 어둠을 사랑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십자 나무에 매달아 버립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내 허물을 덮으려고, 내 잘못을 감추려고 어둠을 선택한 적이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빛을 통해서 만이, 누군가를 똑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거짓인지 아닌지 빛을 통해서만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거짓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빛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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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야 생기는 것.
영화 ‘탄생’ 다들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잘 그려낸 영화입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 계시다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영화안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이런말 하십니다.
길은 지나가야 생기는 것이다.
신부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늘 길을 잃거나 길을 못 찾아 방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길은 늘 내 뒤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또한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미 우리 신앙의 길을 걸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안내자로서 우리 신앙의 길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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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십자가의 주님
민수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들이 호르 산을 지나 갈대 바다 길로 가는 동안 백성들은 마음이 조급해져 모세에게 불평하며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 많은 사람들이 죽게되자 그들은 그제서야 모세에게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민수기21,4-9)
구리뱀을 보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며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드러내야 죄의 사함을 받으십시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나의 죄를 바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주님의 치욕과 고통,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십시오
죄의 깨달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어도 마땅할 죄인인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하나뿐인 생명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게도 우리를 위해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며 쌓여가는 나의 죄를 깨달야 합니다. 나의 죄 많음을 알게될수록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깨달게 될 것입니다.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 구원의 은총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없다면 그 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감옥에 갇힌 죄인입니다.
오직 주님만의 족쇄를 풀어주시고 생명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온갖 세상의 더러움으로 가득 찬 영혼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죄로 가려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나의 영혼은 주님의 빛이 있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어둠의 끝에는 생명과 희망의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는 인자한 아버지의 마음과 같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빛은 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빛은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정의로운 삶과 고귀한 희망을 지닌 빛의 자녀가 되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32)
주님, 저희를 주님 곁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2. 나약한 사람입니까?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나약한 사람입니까?
3. 십자가를 보고있습니까? 무엇을 보았습니까?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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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자 은총이다
-회개하자, 감사하자, 믿자-
“지상 천국의 삶”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66,10-11참조)
입당송 이사야서 말씀이 우리를 한껏 고무합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사순시기 절제와 금욕, 극기의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어둡고 우울하고 심각하게 지내는 시기가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고 기쁘게 지내는 것이 합당하며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장미색 기쁨으로 즐겁게 지내라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장미주일이자 일명 “래타레(Laetare:즐거워하여라) 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늦깎기로 40세에 서품되어 75세이르기까지, 두배로 성실히 살겠다 다짐하며 사제서품후 만35년동안 거의 날마다 강론을 써왔어도 첩첩산중 산을 넘듯 늘 처음처럼 힘듭니다. 강론 걱정 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고, 강론꿈꾸다 일어난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때는 이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고 이정도 강론뿐이 안되나 하는 좌절감에 불암산에 오른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강론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일기쓰듯 쓰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게 쓰기도 합니다.
꼭 한달 남은 4월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국내 여야의 상황이 흡사 생사가 달린 듯 격렬한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새삼 가톨릭교회의 은총의 3월 사순시기가 어지럽고 혼란한 나라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은총의 3월 사순시기 힘껏 기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3월 사순시기, 서사가 사라진 몰역사의 시대, 국어(나라 말)을, 국사(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문신”이란 소설집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박경리문학상 수상, 집필부터 탈고까지 25년, 거장 83세 윤흥길 필생의 역작, ‘언제나 큰 문제에 대해 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남은 생애 다시 이런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다.’”- 표지글 그대로 목숨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치열한 작품입니다.
또 하나 이미 오래전 품절된 <김점선 10cm 예술>을 수도형제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입해 읽고 있습니다. “천사의 집(Angel Home)은 상품판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천사의 마음으로 신뢰, 믿음, 희망, 소망을 나누는 곳입니다.”라는 발송처의 소개도 이채로웠습니다. 이어지는 책의 표지글과 박완서의 소개글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조르바 김점선, 그의 인생은 예술이다. 그는 온몸으로 그림을 한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나는 그 여자처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를 본적이 없다. 아무도 그 여자를 길들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화가이자 작가인 참 자유인 김점선은 이미 15년전 2009년 타계했습니다. 작년 광복절이후 계속되는 저의 만세육창 기도와 행복기도 앞부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이어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 앞부분입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나눴던 지금도 즐겨 외우는 자작 기도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고 즐겁게 지상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바로 -“회개하자, 감사하자, 믿자”-의 구체적 실천이 지상 천국의 하늘나라 삶을 살게 합니다.
첫째, “회개하자!”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사순시기 3월은 무엇보다 회개와 정화의 시기입니다.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은총입니다.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치유도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에 이르기까지 과정의 그 마음 상태가 악순환의 반복처럼 인간의 치부를 보여줍니다.
배신하고, 부정하게 만들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비웃고...참으로 구제불능 상태의 백성들이고 이어지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주님의 심판이라지만 자업자득 스스로 초래한 심판이요 이래서 회개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은 때가 되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한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둘째, “감사하자!”입니다.
감사의 선택, 감사의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로부터 배우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회개에 이어 감사의 자발적 선택, 감사의 훈련, 감사의 습관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렀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나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구원에 대한 자발적 감사의 응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부단한 감사의 삶이 구원의 기쁨을, 구원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
셋째. “믿자!”입니다.
불신이 아닌 믿음을, 어둠이 아닌 빛을, 거짓이 아닌 진리를 선택, 훈련,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믿음의 선택과 결단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복음의 핵심진리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심판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을 때 빛보다는 어둠을, 진리보다는 악을 사랑하게 되니 바로 이것이 어리석게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으십시오. 참으로 위대하고 결정적 구원의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니 주님은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빛이요 힘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을 때 생명의 빛, 진리의 빛, 희망의 빛 속에 길을 잃지 않고 온전한 참삶을,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 이런 주님이 없다면 어떻게 이 험난하고 어둡고 삭막한 광야여정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회개의 삶, 감사의 삶,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과 일치된, 기쁘고 즐거운 구원의 행복을, 지상 천국의 하늘 나라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길, 저의 빛, 저의 힘,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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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모두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랑이 오시다
품는 이에게 스미어
사랑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시니 사랑이다
사랑이 되다
기꺼이 오시는 사랑을
오롯이 품기 위하여
되니 사랑이다
사랑이 가다
품는 이에게 스미어
늘 사랑이기 위하여
가니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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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사순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함을 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통하여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그리고 어둠이 아니라 빛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맛볼 때 거기에 삶의 참된 행복을 느끼며 내면에서 기쁨이 흘러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본질은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참되고 완전한 기쁨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환란을 견디어 내는데 있다는 것을 성인들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참된 행복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카리스마를 초월하고 예언보다 더 귀중한 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행복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통이 수반되는 사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을 때 간절히 청했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 받은 고통과 그 고통을 견디어낸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결핍(에로스)의 사랑, 기쁨(필리아)의 사랑, 자비(아가페)의 사랑인 사랑을 모두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완덕은 자비(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자비는 용서의 미덕이며 용서의 비결이며 용서의 원리이다. 이 자비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보여주시고자 했던 사랑을 우리가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합시다.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이상한 언어를 해석할 수 있고 천상일을 환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생겼고 더 부유하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기적들을 행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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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그러나 그 기사 쟝은 언젠가 엠마오에서 제자들이 그랬었던 것처럼 구세주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의 앞에 구세주께서 나타나시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잠을 깨운 사람을 보내기 위하여 다만 공손하게 동정의 몇 마디 말을 던졌다.
“당신의 그 원통한 상처가 내 마음 속 깊이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당신의 상처와 고통을 바라보면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마음도 감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의 극심한 상처를 치료한 수 있는 의사를 알고 있지 못합니다. 또 나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불의에 대해 보복해 달라고 외치면서 이 불의에 대해 속죄의 행위와 참회를 하도록 힘쓸 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재판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주(城主)이기도 한 쟝 뒤 브와는 그 방문객의 말은 알아들었으나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고통당하신 모습으로 발현하시어 당신의 상처와 그 쓰라린 아픔을 보여 주심으로써 이 소박한 신심을 가졌던 기사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들이 정의감과 동정의 연민에 가득차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잘못을 뉘우치는 영혼들이 기도와 보속으로써 자신의 죄와 다른 영혼들의 죄를 속죄하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께서 매일 당하시는 그 극심한 모욕에 대해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며 마치 의사처럼 당신 사랑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그런 영혼들을 애타게 그리워하셨던 것이다.(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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