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단발포’ 논란이 일었던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분수대~금남로 일대 주요 건물 및 총격 사망자 위치 분포도. 계엄군이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수평 사격을 가했다면 전일빌딩과 YMCA 부근에 사망자가 몰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5·18 검시조서와 검안서, 병·의원 발행 사체검안서 등을 재분석한 결과 총격 사망자가 여러 곳에 흩어져 발견된 사실이 확인됐다. 또 주요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무장괴한들이 광주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증언들이 당시 잇따랐던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스카이데일리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금남로에 이르는 7개 건물의 옥상 위 ‘집단 발포’가 계엄군의 소행이 아닌 정황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4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진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의 집단 발포 논란이 있었던 5월21일 총상 사망자 53명 중 낮 시간대에 숨진 47명은 도청 앞 분수대보다 다른 지역 사망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계엄군이 마주 보고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다면 전일빌딩·YMCA 앞에서 대부분의 총상 사망자가 발생해야 한다는 의·과학적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다.
당시 계엄군은 1만 명 안팎(시민군 추산)의 시위대에 포위돼 도청 앞 분수대에 사실상 고립돼 있었다. 시민군 측이 주장하는 집단 발포 추정 시점(오후 2시)에는 개별 병사에게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클릭 프롤로그 43년 미궁… 5·18 ‘진실의 문’ 연다 ①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 습격… 軍레커 몰고 무기고 돌진… 20명 ‘우르르’ ② 전남도청 앞 군인 순직… “軍 아닌 시위대 장갑차에 權일병 깔려 숨져” ☞③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부상자를 포함한 구체적인 피격 지점은 전일빌딩과 관광호텔 주변이 최소 30명으로 집계됐다.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던 장소다. 그러나 가톨릭센터 주변은 최소 37명으로 더 많았다. 이밖에 △광주은행 주변(최소 7명) △노동청(최소 5명) △동구청과 광주백화점 주변(최소 4명) △충장로 입구·수협(최소 4명) 등으로 나타났다. 진내과·장동로터리·중앙로·현대예식장·광주여고(신흥주유소)·한일은행·국민은행·전남대 등 다양한 장소에 분포돼 이곳들의 사상자 수는 전일빌딩을 능가했다.
전남대를 제외하고 도청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는 충장로~금남로 사거리(옛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였다. 현재 광주 지하철 1호선 금남로4가역 2·3번 출구 지점으로 하나은행과 씨티은행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금남로를 따라 도청까지의 직선거리는 800m이며 걸어서 10분 걸린다. 당시 도청 앞에 포위된 계엄군은 금남로를 점유한 시위대에 가로막혀 이곳까지 진입할 수 없었다.
사망 시각도 애초 알려진 것과 달랐다. 시민군이 주장하는 대로 오후 2시를 전후해 계엄군의 수평 일제 사격(집단 발포)이 있었다면 사망자가 병원으로 이송된 시각은 오후 3~4시에 집중돼야 했다. 하지만 오전 11시 고(故) 민청진(당시 18세·이하 1980년 연령 기준)씨 사망(영남신경외과 도착 13시55분)을 시작으로 사망자 47명의 사망 추정 시각은 이날 밤까지 여러 시간대에 흩어져 있었다.
학생 이성자(14)양은 오후 1시 동구청 뒷골목에서 등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칼빈소총에 의한 하향사격이 원인으로 분석됐다. 이양의 사망 시각과 위치는 계엄군의 직사화기가 미치지 않는 범위다. 송원전문대 1학년생 최승희(19)군은 1시15분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오른쪽 가슴 총격으로 숨졌다.
이 같은 사망 및 병원 도착 시각은 1980년 5월28일부터 6월 초까지 실시된 합동조사반의 검시조서와 병·의원에서 발행된 사체검안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자료들은 201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추후 위·변조가 불가능했다. 21일 병의원에 입원한 부상환자는 201명이었으며 이 중 157명이 총상 환자로 파악됐다.
M1 사망자가 M16보다 2배↑… “계엄軍과 무관”
옥상 위 집단 발포는 오후 1시15분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후 1~3시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병원 도착 시간이 기록으로 남은 24명 중 14명은 칼빈 등 M1에 의해 희생됐다.
5·18사료편찬위원회(2009 간행) 기록에 따르면 계엄군이 4층의 도청별관과 상무관 등 도청 주변 건물 옥상에 공수부대원을 배치한 시점은 2차례의 시민군 장갑차 공격 이후 3번째 3차 공격이 시작된 오후 2시50분이 지나서다.
중앙일보 광주 주재 이창성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도청 주변 옥상에 배치된 계엄군이 돌진 차량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3시48분이었다. 따라서 병원 응급실 도착시간이 오후 4시 이전인 21명은 계엄군 총격에 의한 희생자가 아닐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망에 이르게 한 총기류도 계엄군의 것과 달랐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낮 시간대에 숨진 47명 중 M16(14명) 사망자보다 M1 사망자(30명)가 2배 이상 웃돌았다. 5·18 당시 계엄군(공수대원)은 M16을 보유했다. 당시 정부는 군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공수부대에만 우선 M16을 지급했다.
칼빈과 개런드를 합친 M1소총은 시위대가 예비군 무기고와 파출소에서 탈취한 총기류로 알려진 상태다. 예비군 대대와 경찰에는 M16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다.
칼빈소총을 든 계엄군의 사진이 한때 공개됐지만 도청이 수복된 다음날인 28일 현장 수습을 위해 신규 투입된 경계병력의 모습인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당시 계엄군은 칼빈소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 당시 시위대는 칼빈뿐만 아니라 M16도 소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M16 사망자 14명도 건물 옥상 위 무장괴한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당시 시위대는 5월19일 가톨릭센터 빌딩을 습격해 CBS 방송국 경계병들로부터 M16 3~4정을 빼앗았다는 증언이 있다. 21일 오전 8시10분쯤에는 20사단 지휘관 차량을 습격해 M16 4정과 탄창 14개를 탈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같은 사람이라면 21일 금남로 건물 옥상에 있던 무장괴한들에겐 최소 7~8정의 M16 소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시민들 軍 적개심 키우려 누군가 ‘이간질 공작’
당시 계엄군은 M16 사용… M1 피격 사망자가 더 많아 건물 옥상서 하향 사격으로 인한 사망·부상 상당수 확인 생존 피해자들 “공수부대가 쏜 총 아니었다” 잇단 증언
▲ 비극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옛 전남도청 건물(왼쪽). 이 앞에 있는 분수대 광장에서 1980년 5월21일 계엄군과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고층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들이 하향사격을 가했다는 당시 광주시민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하향사격은 계엄군을 향한 시위대의 장갑차 돌진 등 잇단 도발행위와 맞물려 자행된 것으로 분석됐다. 건축자재공장 공원 고(故) 박종길 씨의 피격부위 모식도. 박씨는 왼쪽 이마와 턱, 가슴 자상에 이어 탄환이 몸 안에 박힌 맹관총상을 입어 전형적인 하향사격 피해자로 분류됐다. 남충수 기자
이에 따라 계엄군이 있지 않은 지역에서 총격이 누구의 소행인지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생존 피해자들도 공수부대가 쏜 총격이 아니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무장괴한들이 옥상에서 총을 쏜 건물은 △전일빌딩 △YMCA △가톨릭센터 △광주은행 본점 △노동청 △동구청과 그 맞은편 광주백화점 신축 공사장 등 7곳으로 추정된다.
KBS오월항쟁 무장편에서 양화공 이세영 씨는 “나는 도청 분수대 앞에서 총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씨는 “트럭 운전석 뒤 창문에다가 발을 걸치고 태극기를 이렇게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분수대 앞에 있었던 공수부대들은 제가 맞았던 하복부(아랫배)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하복부로 바로 맞았던 것은 YMCA나 전일빌딩에서 쏜 저격 총탄이었다”고 증언했다.
전남대 5·18연구소 증언집에 따르면 사진사 정재회(38)씨는 “21일 오후 1시경 가톨릭센터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중략) 어디에서 총을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청 옥상 위나 수협 위에서 갈겨버린 모양이었다”고 밝혔다.
총알이 날아오는 건물 옥상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증언도 확보됐다.
전남대생 이광호(21)씨는 5·18 증언집에서 “전일빌딩 옥상에서 발포하는 공수부대의 총구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광주로 내려와 시위 현장에 간 건국대생 정건호(22) 씨는 “남도예술회관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조준해 쏜 것으로 추측된다”고 증언했다.
광주를 취재했던 일본인 카지마 고이치(風間公一) 프리랜서 기자는 “(사진촬영을 위해) 관광호텔 옥상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뒷문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한국 각 신문사의 사진기자 다섯 사람이 전남일보사 옥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며 “때마침 나타난 무장데모대들이 ‘당장 나가라’고 몰아치는 바람에 되돌아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21일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등 금남로 일대 주요 고층 건물은 시위대에 장악돼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톨릭센터 직원 유팔동 씨는 “시민군들이 총을 가지고 우리 센터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다”며 “광주 금남로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도청을 향해 총질을 좀 하겠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유씨는 “그 양반들이 총을 들고 그러니까 말릴 수도 없고…”라고 덧붙였다. 7층 건물인 가톨릭센터 옥상에서는 더 높은 전일빌딩(10층)에 가려 분수대 앞 계엄군을 볼 수 없다.
“옥상에서 쐈다”… 군복 입고 계엄軍 총격처럼 위장 노린 듯
건물 옥상에서 하향사격을 가한 무장괴한들이 군복으로 위장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화랑을 경영한 임춘식(28)씨는 “전일빌딩 옥상에 진을 친 공수들은 광주경찰서 방향에 있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관광호텔 옥상에 배치된 공수들은 금남로 5가 쪽을 향해서 무작위로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고층에서 총을 쏜 이들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진술이다.
이와 관련해 21일 당시 전남대에 주둔한 3공수 16대대 팀장 김응근 대위(중대장)는 당일 밤 임신부 피격 사망사건에 관한 증언에서 “전남대에 우리 공수부대 복장을 한 애들이 있었다”며 “걔네들이 조장을 하기 위해서 쏘고 그랬다. 우리는 절대로 이탈할 수가 없다”고 당시 기억을 회고했다.
당시 회사원 김용대(28)씨는 공수부대원 3명이 ‘서서쏴’ 자세로 총을 쏘는 걸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KBS의 ‘5·18다큐, 광주는 말한다’에 출연해 수협 옥상을 가리키며 “저기에서 무장괴한이 총을 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며 “금남로에서는 군인의 모습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총을 쏘길래 시민들이 쓰러지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품었던 배경을 밝혔다.
건물 옥상위 하향사격은 죽거나 다친 피해자의 시신 부검 또는 병원 치료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하향사격은 2곳 이상 부위에 동시 손상을 입거나 사선관통의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꼬마상주’ 영정 사진 속 사망자로 잘 알려진 조사천(33)씨는 총알이 왼쪽 머리 위로 들어가 턱을 뚫고 나간 뒤 다시 왼쪽 가슴을 관통한 것으로 분석됐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쏜 총알에 맞은 전형적인 하향사격 피해 사례에 해당한다.
검시 기록과 목격자 증언 등을 토대로 탄도(총알의 날아간 각도)를 분석한 결과, 고층 건물에서 아래로 쏜 탄환에 맞아 숨진 하향사격 사망자는 김광석(26)·김정(20)·김형관(22)·박민환(26)·박종길(24)·윤재식(31)·임균수(20)·조사천·최승희(19)씨 등 9명이었고 부상자는 김한호(49)씨 등 20명으로 집계됐다.
전남대 2학년생 김광석 씨는 금남로에서 부상자를 부축하다 총에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오른쪽 아래턱이 깨지고 가슴에 총알이 박힌 하향사격 피해자다. 체내에서 칼빈 총알이 발견됐다. 선반공 김정 씨는 오른쪽 앞머리와 왼쪽 가슴에 총상이 있어 하향사격 사망자로 분류됐다. 원광대 2학년생 임균수 씨도 왼쪽 머리와 얼굴에 이어 하악골(턱) 골절상을 입었다. 총알이 위에서 아래로 지나 턱을 관통한 것이다.
피격 날짜와 사망 날짜가 확인되지 않은 이발소 종업원 허봉(23)씨는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에 우측두정부골절상과 총알이 나간 사출구에 좌전두 타박 열상이 발견됐다. 정수리 오른쪽에서 왼쪽 앞머리를 탄환이 관통한 것이다. 역시 날짜가 불분명한 건축자재공장 공원 박종길 씨도 왼쪽 이마와 턱, 가슴 자상에 이어 탄환이 몸 안에 박힌 맹관총상을 입었다. 이 같은 분석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중 검시조서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전방위 총구 겨눈 무장괴한들… 반경 1km까지 피격
옥상 위 무장괴한들이 전방위로 총구를 겨눈 정황도 발견됐다. 군과 시민 간 이간질을 목적으로 양민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하향사격의 피격 지점이 분수대에서 반경 1km까지 동서남북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김은환 씨는 한일은행 사거리(현재 광주 지하철 1호선 금남로4가역)에서 누군가가 쏜 총에 맞고 5·18 유공자가 된 것으로 기록됐다. 김씨는 “한일은행사거리 주위에는 공수대원들이 전혀 없었다”며 “아마 관광호텔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쏘았던 것 같다”는 증언을 남겼다.
계엄군은 21일 도청 부근에만 주둔했다.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지 않은 곳에서 숨진 사망자는 △안병태(대인동 중앙예식장 부근) △조남신(무등극장 부근) △최미애(중흥동 집앞) △강복원(송암동 남선연탄 앞) △김용표(광주여고 앞) △김영철(제일은행 앞) 등 6명이다.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펴낸 자료에서 안씨는 칼빈 총상, 강복원·김영철 씨는 기타 총상으로 각각 기록됐다.
고교생 박철옥(17) 군은 “노동청 앞 사거리에 26~27세쯤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며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건물 옥상 같은 위쪽인 것만은 확실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재봉 견습공 이용일(18) 군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터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며 “내가 쏜 총은 그 반동 때문에 울려서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가톨릭센터 건물의 꼭대기를 빗맞고 나갔다”고 했다.
가게 종업원 장종필(18)씨는 당시 트럭 위에서 총소리를 듣고 누웠다가 다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장 씨는 “내가 생각하기에 공수들은 (도청) 앞에서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조준사격을 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장 씨는 금남로 지하상가(한국은행사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계엄군이 있던 분수대로부터 440m 떨어진 곳이다. 트럭 적재함에 누워있는 사람을 수평사격으로 맞힐 수 없는 각도와 거리다.
목수 차용봉(25)씨는 광주은행 옥상 위에서 무장괴한이 금남로 시민을 향해 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차 씨는 “계엄군은 분수대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총을 쏘면 시위대열 정면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을 것인데 자꾸만 옆에서 총알이 날아와 시민군의 오발이 아닌가 생각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이 일이 계속되자 오발 사고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며 “계엄군이 인근 건물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르몽드 기자이자 뉴욕타임스(NYT) 특파원 필립 퐁스는 “시위대 중 몇 명은 계속해서 군중에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번 재분석에 참여한 익명을 요구한 현직 의사는 본지에 “실제로는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던, 계엄군으로 위장한 무장괴한의 총격에 의해 많은 시민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것”이라며 “이는 광주 시위대로 하여금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하려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광주=허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