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숨진 조사천 씨의 아들 조천호(당시 5세) 씨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뉴시스
5·18 ‘꼬마상주’의 아버지 고(故) 조사천(당시 33세)씨가 옥상 위 무장 괴한이 아래로 쏜 총알에 맞고 숨진 정황이 새롭게 밝혀졌다.
6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진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에 따르면 조씨의 직접적인 사인은 총알이 머리-턱-가슴 순으로 관통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지금까지는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에서 탈취한 바퀴형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조씨가 가슴에 총격을 받고 숨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5월21일 당시 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정면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조씨가 맞은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동요하며 분노했다. 조씨의 죽음은 시위대가 계엄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클릭 프롤로그 43년 미궁… 5·18 ‘진실의 문’ 연다 ①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 습격… 軍레커 몰고 무기고 돌진… 20명 ‘우르르’ ② 전남도청 앞 군인 순직… “軍 아닌 시위대 장갑차에 權일병 깔려 숨져” ③ [단독]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④ [단독] ‘꼬마상주’ 아버지도 옥상 괴한 총격에 희생
1980년 5월28일 검찰 검시조서에 조씨는 “칼빈 총상, 좌전흉부 맹관상”으로 명기됐다. 왼쪽 가슴에 맞은 칼빈 총알로 사망한 것으로 검시 당국은 파악했다. 검시 서류 작성에는 광주지검 한광수 검사와 최유섭 의사·나종태 군검찰관(중위)·주영근 경찰관(경사)·박승일 군의관(대위)이 참여했다.
그후 6월2일 전남대학교병원에서 발행한 조씨의 사체검안서 기록에는 “좌전흉부에 1x1cm의 맹관총상과 전흉부에 16x10cm의 피하출혈”로만 적혀 있고 칼빈총상 기록은 누락됐다. 5·18 당시 계엄군(공수대원)은 M16을 보유했다. 당시 정부는 군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공수부대에만 우선 M16을 지급했다.
당시 검안서에는 칼빈 탄환에 의한 왼쪽 앞가슴 맹관 총상으로 사인이 기록됐다. 맹관 총상이란 총알이 몸 안에 박혀있는 것을 말한다. 탄환의 종류를 통해 쏜 총의 종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가슴 총격” 검시조서 vs “머리 총격” 목격자 증언 큰 차이
검시조서와 사체검안서의 공통점은 조씨의 사인을 좌전흉부 맹관상으로 기록한 점이다. 가슴에 총격을 받고 숨졌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당시 주변에 있던 다수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들과 크게 차이가 있다. 당시 목격자 20여 명의 증언을 종합하면 조씨는 직립 상태에서 머리에 총격을 받았다. 서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다.
이에 따라 검시서류와 목격자 증언 간에 근본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가슴에 총격 치명상을 입었다면 턱과 머리가 함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엔 산탄총이 없었다. 산탄총이란 단 한 번의 격발(방아쇠를 당김)로 여러 발의 총알이 날아가도록 설계된 총이다. 계엄군도 시민군도 산탄총은 갖고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격자는 “한 번의 총소리가 났다”고 진술했다. 총성이 한 번만 들린 뒤 조씨가 거꾸러졌다면 단발 사격이었다는 얘기다. 고등학생 김행주(당시 17세·이하 1980년 연령 기준) 씨가 1989년 진술한 전남대 5·18연구소 증언집에 따르면 김씨는 “총알이 그 사람(조사천 씨) 귀 밑을 맞혔다”고 했다.
그는 “오후 2시경 장갑차 위 뚜껑을 열고 태극기를 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타고 있었다”며 “M16이 불을 뿜었고 턱이 완전히 처지면서 두 개로 나뉘어져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장갑차 위 구멍에서 팔을 뒤로 하고 처져 있었는데 위턱부터는 완전히 뒤로 제쳐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조씨가 얼굴(턱)에 총을 맞았다고 밝힌 것이다.
재수생 윤석진(19) 씨는 “관광호텔 앞에서 장갑차 뚜껑을 열고 (나온 사람이) 안전벨트를 맨 상태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며 “총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턱 부분이 아예 날아가 버렸다”고 진술했다.
이어 “목뼈가 허옇게 보이고 피가 솟구쳤다”며 “도청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았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총알이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 (턱을) 분리를 시켜 버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대학생 나상옥(21) 씨는 “내가 탄 차가 관광호텔 부근에 이르렀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며 “장갑차에 탔던 청년(트레이닝 바지를 입었음)이 장갑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 가다가 목 오른쪽 부위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다”고 했다. 나씨는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도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며 “청년이 목에 맞은 것은 정조준에 의한 것이었고 오른쪽 목에 맞은 점을 미루어 아마 관광호텔에서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상술했다.
▲ [1] 5월21일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한 시민이 장갑차 위에 올라와 있다.(붉은색 원안) 이 시민이 조사천 씨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씨는 사진 속 시민과 같은 모습으로 장갑차 위에 서 있다가 옥상에서 발사한 총알에 맞고 숨진 것으로 분석됐다. [2] 우측 가로수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카톨릭센터 빌딩이다. 이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이 인도 옆 3차로를 지나가는 장갑차에 탄 조사천 씨를 저격한 것으로 분석됐다. 건물에서 장갑차까지의 거리가 약 7m, 건물의 높이가 약 21m 이므로 발사각은 약 72도로 추정된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 씨의 피격 탄도각과 비슷하다. [3] 조사천 씨의 피격부위 모식도. 5.18재단/구글거리뷰
조씨 시신 태극기로 덮고 “계엄군 만행”… 시위대 거짓 선동
당시 증인들 “단발 총성에 조씨 고꾸라져… 귀밑에 맞았다” 시위대 말대로 가슴에 맞았으면 턱·머리가 함몰 될 수 없어 총 쏜 가톨릭센터 옥상 발사각 72도… 조씨 피격 탄도 비슷
화물차 운전사 임병석(19) 씨는 “내가 운전하는 레커 좌측에는 장갑차가 서고 뒤에는 불도저, 지프차가 뒤따랐다”며 “장갑차에서는 화순에 산다는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을 향해 서서히 진격했는데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그는 “장갑차에 탄 그 사람의 머리가 총알을 맞아 닭고기를 칼로 다져놓은 것처럼 돼버렸다”며 “설마 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쏠까 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당하고 나자 지프차 위에 그 시체를 옮겼고 시체를 태극기로 덮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시민군들에게 계엄군의 만행을 알렸다”고 말했다.
식당 종업원 김용오(21) 씨는 “장갑차가 서서히 도청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제일은행 부근쯤이었을까? 갑자기 ‘땅!’ 하는 총성이 울려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에서 내려보니 장갑차 위에 탔던 (사람이)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며 “언뜻 보아 얼굴에 총을 맞았는지 입이 한쪽으로 처져 있었고 주위에서 시민들이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로 덮고 있었다”고 했다.
당구장 지배인 이규홍(26) 씨는 “관광호텔 부근에서 장갑차에 타고 있던 청년이 상체를 드러내는 순간 도청 앞에서 쏜 M16 총에 턱 부분을 맞고 쓰러졌다”며 “곧 유동 삼거리로 데려와 살펴 보니 장갑차 윗부분에는 피가 흥건히 젖어 있고 청년의 목이 겨우 매달린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재봉견습생 이용일(19) 씨는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며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는데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고 했다. 앞서 이씨는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와 바로 내 옆 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며 이미 옥상 총격이 시작된 이후 조사천 씨가 장갑차에서 총격을 받은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소방공무원 시험을 마친 장세경(25) 씨는 “장갑차 위에 탄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도청을 향해 간다고 했다”며 “청년이 탄 차가 관광호텔 앞에 이르자 연발 총성과 동시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뒤로 넘어졌다”고 했다. 그는 “청년은 코에 구멍이 뚫리면서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고 묘사했다.
서채원(19) 씨는 “모든 시민의 눈은 그 장갑차로 향했다”며 “그 장갑차가 광주관광호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총성이 울려 퍼졌다”고 했다. 이어 “순간 태극기를 들고 앞에 서 있던 젊은이가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다”며 “분수처럼 솟아오르던 그 붉은 피,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보았던 그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대학생 박영순(27) 씨는 “나중에 말을 들어 보니까 장갑차에 탔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술했다.
재수생 장준영(19) 씨도 “현재 광주백화점 앞에 있었는데 장갑차에 러닝 차림의 한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만세! 만세!’하고 외치고 있었다”며 “그와 동시에 갑자기 총성이 들렸고 장갑차에 탄 청년이 쓰러졌고 장갑차가 후진하는데 목에 총을 맞은 시신이 장갑차 위에서 목 윗부분과 아래의 몸체가 따로 흔들리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사천 씨의 아내 정동순 씨도 목에 총알이 나온 구멍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정씨는 1980년 8월, 사건 당일을 회고하며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여기저기 찾을 것도 없이 출입구 쪽에서 두 번째에 남편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며 “목에 총알이 관통한 상태로 눈을 뜬 채였다”고 증언했다.
“목과 몸체가 따로 흔들렸다”… 탄도로 추정해 본 살인자는 누구
이 같은 목격자 증언을 종합적으로 추론하면 조사천 씨의 사인은 왼쪽 머리와 왼쪽 턱을 부순 총알이 턱 밑 피부를 뚫고 나온 후 다시 왼쪽 앞가슴을 뚫고 가슴 속에 박힌 것이다.
머리와 가슴 중 치명상은 머리일 수밖에 없다. 일부 목격자들이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뤄, 머리는 가죽만 손상된 것이 아니라 머리뼈를 부순 총알이 측두골 부위의 뇌정맥동 즉 측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에 손상을 줬을 가능성이 재분석 결과 제기됐다.
손상 추정 부위는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흥건히 적시기에 충분하고 곧 사망에 이른다.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던 그 붉은 피”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 등의 증언이 그 상황을 대변한다.
또 가슴에 직경 1cm의 총알이 들어간 자리와 함께 가로 10cm, 세로 16cm의 피멍이 생긴 것으로 검시 조서는 기록했다. 피멍은 총알이 피부 밑으로 진행하면서 벌려놓은 틈으로 피가 흘러내려 생긴다. 이에 따르면 총알은 피부밑을 지나며 흉곽과 나란히 진행했기 때문에 총알이 흉곽 내부로 들어갔더라도 심장을 뚫지 않고 폐 속에 박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번 재분석에 참여한 의학박사 A씨는 본지에 “이 경우 가슴 총상으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며 “반면 총알이 가슴 정면에서 뚫고 들어가면 조씨의 부검 결과와 같은 크기의 피멍은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검안서에 1x1cm 총상 주위에 16x10cm의 피하출혈이 있었던 사실은 위로부터 날아온 총알이 피부밑으로 16cm 정도를 주행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뒷받침한다.
목격자 증언을 종합해 추론하면 탄도(총알이 날아온 각도)는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씨가 숨진 당일 금남로 일대 7개 주요 건물 옥상에서 무장 괴한들이 시위대를 향해 아래로 총을 쏜 정황이 이번 재분석에서 새롭게 드러났다. <본지 7월5일자 [단독][5·18 진실 찾기③]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보도 참조>
현장 목격자 윤석진·나상옥 씨는 총알이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이용일 씨는 조씨 사망 직전에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와 자기 옆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조사천 씨가 탄 장갑차는 가톨릭센터에 가장 가까운 차로(3차로)에서 도청을 향해 천천히 운행하고 있었다고 임병석 씨는 증언했다. 당시 금남로에는 약 5000명의 군중이 도로를 점거했지만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무장 괴한이 쏜 총소리에 놀란 시위대가 골목으로 숨어들어 가며 흩어져 장갑차가 주행할 공간이 생겼다.
금남로를 서서히 달리던 장갑차에서 상체를 내밀고 있던 조씨가 일어나 태극기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며 지상 7층 건물인 가톨릭센터 옆을 지날 때 조씨의 머리를 향해 옥상에서 발사된 총알이 날아온 것으로 보인다.
건물에서 3차로를 운행하던 장갑차까지 거리가 약 7m, 건물 높이가 약 21m이므로 발사각은 약 72도로 추정된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 씨의 피격 탄도 각과 비슷하다.
의학박사 A씨는 조씨의 검시가 사망일로부터 7일이나 지난 28일 진행된 점에 주목했다.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나 검사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마주했을 것으로 봤다.
A씨는 “그들의 눈으로는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으로 덮인 측두부의 총상이나 일부러 턱을 치켜들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턱밑 피부 열상은 구분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며 “검시관들 눈에는 가슴에 난 칼빈 총알 구멍과 그 구멍 아래로 16cm 정도의 길이와 10cm 정도의 폭을 갖는 피멍 자국만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광주=허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