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송암동 오인사격’ 현장이 자리한 광주광역시 송암동 삼거리를 최근 방문한 5·18 당시 계엄군 중대장 최종원 씨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교도대대 매복조가 있었던 위치를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2] 교회 앞 도로의 왼쪽이 주남마을 방면이다. 11공수여단은 왼쪽에서 도로를 따라 송정리 비행장이 있는 오른쪽으로 진입하다 매복조의 총격을 받고 약 50명의 인명피해를 당했다. [3] 송암동에 있는 광주~목포 간 도로의 모습이다. 이곳에는 현재 테슬라(Tesla)가 들어서 있다. 광주=남충수 기자
5·18 당시 아군 간의 유혈 교전 사태로만 알려졌던 ‘송암동 오인 사격’은 군 전력 약화를 노린 무장그룹이 계엄군의 전남도청 수복을 조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감행한 것임을 증명하는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다.
또 이 사건에는 군 지휘부의 무전을 도청한 무장그룹이 도시 게릴라 전술을 적용한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11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복수의 분석자료들에 따르면 전라남도 계엄사령부인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는 5월24일 새벽 예하 제3·7·11공수부대에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도청이 수복된 27일보다 4일이나 빠른 23일에 최초의 도청 탈환 작전을 계획했다가 돌연 연기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이 때문에 시민군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언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집결 명령을 무전으로 도청한 시민군은 도청 진압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공수부대가 송정리 비행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즉각적인 대응에 착수한 정황이 포착됐다.
전교사의 이동 명령에 따라 화순 방면을 봉쇄하고 있던 7공수·11공수여단은 이날 오후 1시쯤 주남마을을 떠나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0사단 트럭 약 50대에 나눠 타고 광주~목포 간 도로를 따라 진행하던 11공수는 길 양옆에 매복해 있던 무장그룹으로부터 간헐적인 총격을 받았다.
김철수·박노용 씨 증언에 따르면 이에 맞서 대응사격하며 차량 속도를 높여 진행하던 공수부대는 백운동 쪽에서 내려오는 송암동 삼거리에 이르러 또다시 무장그룹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응사했다.
이보다 앞서 전교사 장사복 작전참모장(준장)은 전교사 김병엽 교수부장에게 교도대대 매복조의 배치를 지시했다. “반란군이 군복을 입고 장갑차를 앞세워 15대의 트럭을 타고 봉쇄지점을 돌파하려 한다”는 시민의 첩보 전화를 받은 후였다.
김병엽 당시 교수부장은 훗날 이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 전 교수부장은 사건 발생 16년 만인 1996년 10월 5·18특별법 2심(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저지하라는 도로 차단 임무가 부여된 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첩보를 주는 것만으로 지휘 조치는 한다”며 “교도대는 교수부장의 통제를 받는 부대이기에 교도대장에게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출동한 전교사 매복조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한 남성 2명이 “폭도들이 총을 쏘며 접근하고 있다”고 알리고 사라져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곧이어 총소리가 실제로 들리며 장갑차와 트럭이 빠른 속도로 봉쇄지점을 통과하려 하자 이들이 자기편인지 시민군인지 판단할 여유도 없이 전교사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선두에서 진행하던 병력 수송 장갑차가 90mm 무반동총의 총격을 받고 위·아래로 분리·파괴됐다. 탑승했던 작전참모 차정환 대위가 즉사하고 대대장 조창구 중령의 오른팔이 잘렸다. 동승했던 김동철 병장도 부상했다.
뒤이어 계속되는 총격과 수류탄 공격으로 트럭 4대가 불에 탔으며 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6명이 중상을 입었다. 부상자들은 헬기에 실려 통합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튿날 1명이 더 숨을 거두며 오인 사격으로 총 11명이 사망했다. 공수대원 외에 숨진 전교사 안내 병력 1명을 포함한 집계다.
11공수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참모에게 시민의 제보인 척 걸었던 위장 전화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APC 장갑차를 앞세운 트럭 15대가 목포 시민군과 연합하기 위해 봉쇄지점을 돌파하려 한다”고 제보해 작전참모를 속인 것이다. 지시를 받은 김 교수부장은 조교들로 구성된 교도대대를 매복하게 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11공수가 진행할 도로 양옆에 미리 시민군을 곳곳에 배치해 총격을 가함으로써 공수부대가 응사를 하도록 유인했다. 송암동 삼거리에 마지막 부대를 배치해 사격하게 함으로써 매복군이 11공수를 제보받은 ‘공격자’들로 오인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교전 군 당사자·주민 목격자 “시민군 선제사격” 진술 일치
11공수 63대대 무전병 문병소 중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문 중사는 “11여단은 이동 중 송암동 삼거리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로부터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으나 피해 없이 지나쳤다”며 “APC 장갑차를 선두로 세우고 전진하다가 효천역 500m 전방 고개 밑에서 5~10분 정지했다가 다시 출발하는데 이상한 선두 차량이 끼어든 것을 제가 발견하고 멈출 것을 외쳤으나 그냥 출발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선두 지프에서 장교 복장을 한 자가 빨간 깃발을 내림과 동시에 무반동 총탄이 장갑차에 날아와 장갑차가 폭파됐다”며 “이어 소총과 수류탄 공격이 잇따랐고 트럭 한 대에 안전핀이 31개가 붙어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상술했다.
그러면서 “아군끼리 교전이 시작됐는데 11공수 병력이 산 쪽 매복지로 쳐들어가 1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며 “신문해 보니 전교사 산하의 육군 보병학교 교도대였다”고 밝혔다. 문 중사는 “앞 지프를 따라가 추적해 잡았는데 장교 복장을 한 자가 권총으로 자기 턱밑을 쏘아 자살했다”고 덧붙였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자신을 공격한 시위대를 원점 추적·수색하는 과정에서 비무장 시민 4명을 연행해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간인들이 공수부대를 공격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또한 당시 어린이 피격 사망 사건에 대한 정보도 추가로 드러나진 않았다.
당시 매복군 중 한 명이었던 최영철 씨에 따르면 시민군 책임자는 급히 지프차를 몰아 송암동 삼거리에 못미처 효덕국민학교 부근에 매복조를 내려놓고 갔다. 시민군 책임자는 계엄군이 나타나면 바로 사격을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들이 매복하고 얼마 안 있어 계엄군 장갑차가 모습을 나타내자 이들이 먼저 총을 쐈다고 김철수·박노용 씨는 증언했다. 계엄군이 대응 사격을 하자 전방에서 매복 중이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대는 이들을 반란군으로 생각하고 총격을 가하게된 게 송암동 오인 사격의 실체였다. 당시 증언과 기록들은 무장그룹의 철저하게 계산된 공작에 계엄군이 휘말린 사실을 대변한다.
무장 시위대 곳곳 숨어 軍 습격… ‘제보받은 공격자’로 위장
교전 당사자·목격주민·시위대 “위장전술” 한결같은 진술 “무전병 출신 ‘대장’이 軍 작전전개 수시 도청” 증언 잇달아
시민들 “시민군 무전기 입수… 軍 병력 배치·이동 경로 실시간 파악”
당시 정황은 시민들의 증언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양화공 최영철(당시 20세·이하 1980년대 연령 기준) 씨는 '5·18 증언집'에서 적어도 5월19일부터 시민군이 계엄군의 무전기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최씨는 “(19일 오후 3시쯤) 가톨릭센터에 난입해 경계병으로부터 무전기와 총 한 정을 빼앗았다”고 실토했다.
김현채 씨는 “우리 특수기동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해병 출신(손인국)이었고 한 명은 몇 달 전에 무전병으로 제대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청 수위실 옆의 쓰레기 더미에서 공수들이 버리고 간 무전기를 찾았다”며 “우리 대장이 무전병이었으므로 망가진 것이나마 잘 고칠 수가 있었고 무전기 3대는 상황실에 주고 우리 차에는 2대를 실었다”고 부연했다.
전남대생 이재의(24) 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특히 이씨는 김현채 씨가 말한 '무전병' 출신의 대장(지휘책임자)으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의 인물에 대해 묘사한다. 이재의 씨는 “22일 도청 서무과 작전상황실로 들어가 보았다”고 시간과 장소를 특정했다. 이어 “계엄군들이 미처 가지고 가지 못했던 무전기는 조작해 사용하기로 했다”면서 “군 복무 시절에 통신병이었다는 한 예비군에게 책임을 지워서 계엄군의 퇴각 상황과 작전 전개 내용을 수시로 청취, 점검하게 하고 외곽지역과 무전 연락을 담당토록 했다”고 보충했다.
천영진 씨의 진술은 더 구체적이다. 천씨는 “유재원이라는 고등학교 동창은 상황실에서 무전기를 갖고 있었다”며 “이 친구 얘기로는 상황실에서 무전기로 계엄군들의 무전을 도청하고 군인들이 어느 쪽으로 간다고 자기들끼리 무전 연락을 하면 이쪽에서 시민군들이 그쪽으로 간다고 다시 전문을 보내 군인들이 오인하게 했다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천씨는 “이 친구가 증인으로 나를 채택했다면서 무전기를 잡은 일이 없다고 증언해 달라는 거였다”며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에게 유리할 것 같아 무조건 무전기를 잡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고 했다. 천씨가 언급한 유재원 씨의 이름은 광주 5·18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에 있는 5·18 유공자 돌판에서 발견된다.
전남대 법대생 김윤기(24) 씨는 “우리에게는 무전기가 한 대 있었는데 예비군 차림의 남자가 주파수를 맞춰 무전을 도청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전남대생 손남승(22) 씨는 “나는 신분과 이름을 속이고 상황실에서 일하게 됐다 (중략) 상황일지를 썼는데 우리 병력은 몇 시에 어디로 배치했다는 것을 쓰고 군인들의 이동사항을 시간별로 정리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YWCA신용협동조합직원 김길식(20) 씨는 “나도 학생들을 따라가 도청 상황실로 갔다”며 “상황실에는 전라남도 지도가 있어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 지점 등과 우리 시민군의 활동 범위 등이 표시돼 있었다”고 기술했다.
“무전 도청 후 역이용… 가짜 첩보 던져 계엄군끼리 오인사격 유도”
김철수(21) 씨와 김문수(13) 군은 시민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기억했다. 김철수 씨는 “점심을 먹고 난 뒤 동네 선후배들끼리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며 “운동장에는 야구를 하던 청년 20여 명과 구경하던 아이들 10여 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백운동 쪽에서 시민군 7명이 탄 군용 트럭이 오다가 학교 앞 사거리에서 멈추자 시민군 7명이 차에서 내렸다”며 “바로 그때 계엄군들이 원제마을 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우고 엄청 밀려왔다”고 했다. 원제마을은 당시 효덕국민학교에서 지원동 쪽으로 난 군사도로변에 있다. 김씨는 “아마 시민군들이 선제공격을 했을 것”이라며 “그것과 동시에 계엄군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고 기억했다.
목공소 직원 박노용(30) 씨는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5월24일쯤이라 생각된다”며 “트럭 한 대가 달려와 집 앞 삼거리에 젊은이 대여섯 명을 내려놓았고 청년들은 총을 한 자루씩 메고 있었는데 마침 지원동으로 통하는 국도에서 계엄군 차가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박씨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민군 쪽에서 먼저 총을 한 방 쏘자 계엄군들도 차에서 내려 총을 쏘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송암동 오인 사격 이외에 24일 계엄군 사상자가 발생한 또 다른 오인사격도 있었다.
24일 오전 10시 31사단 모 대대 중대원 30명이 트럭을 타고 영광 쪽 호남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섰다. 당시 이들은 사단 본부에서 대대본부로 이동 중이었다. 이때 전교사 소속 기갑학교 하사관 생도들이 이들을 시위대로 오인해 집중사격을 가해 김명철·최필양·강용태가 즉사하고 송준욱 중대장과 안문영·서보원·장태산 등 5명의 장병이 중상을 입었다.
31사단 피격 사고에 시민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같은 날 일어난 오인사격이라는 점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 쪽에서 무전으로 매복조에게 “시민군 트럭이 통과 중”이라고 가짜 정보를 알려 준 것인지 조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5월24일 발생한 사건사고들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분석해 온 A씨는 본지에 “이날 발생한 한 건의 매복 피습은 (무장그룹이) 무전을 도청해 계엄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한 뒤 이동 경로상에 매복 기습을 가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송암동 오인사격은 도청 상황실에서 (무장그룹이) 계엄군의 무전을 도청한 후 이를 역이용해 가짜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을 하게끔 유도한 고도의 도시게릴라 작전을 펼친 데 우리 군이 놀아난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