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부정성으로 오염된 영혼을 덮어 주시어 정결케 하옵소서.
자격 없는 자,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갑니다.
진리를 보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본문 주해)
12~16절 :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임하는 시련의 불길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불같은 시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험당하신 그리스도와 긴밀한 연대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험이나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복된 자이다. 성도의 고난이 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러 계시며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보증으로서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는 자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당할 때 부끄러워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 복된 자이지만,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부끄러운 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고난받을 때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기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모든 고난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15절)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생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도리어 사망에 이르는 고난이다.
17~18절 : “심판의 때는 왔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먼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먼저 심판하신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말로가 어떠하겠습니까?
의로운 사람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치 못한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공동번역)
복음을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면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18절은 잠언을 인용한다.
“의인이 이 땅에서 한 대로 보상을 받는데, 악인과 죄인이 그 값을 치르지 않겠는가?”(잠11:31, 새번역)
19절 : 이제까지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짓거나 종말론적 신앙과 관련시켰다.
그런데 결론 구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 신앙과 섭리 신앙으로 전환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혼란스럽고 비관적인 세상 역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되, 자기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며, 선한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
(나의 묵상)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내가 겪는 고난이란 것은 다 내 죄로 인한 것이다.
세상 것을 가지고 비교할 때 느끼는 불안감, 더 인정받고 싶은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과 그에 따른 시기와 질투....삶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것들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나의 실패와 불안과 불만족이 (복음을 알기 전) 나의 고통이요, 고난이었다.
그러니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라, 탐심이 가득한 내 죄로 인한 고난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뒤 나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누군가에게 핍박당하는 일이 아니다. 아무도 나를 핍박하지 않는다.
나의 고난은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세상 것들-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것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고난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십자가를 향할 때 받은 모든 모욕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육체적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피땀 흘리며 괴로워하시며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괴로움(고난)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분리였다.
창세전부터 함께 계셨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죄로 인해 끊어져 버리는 일이었다. 물론 그 죄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다 뒤집어쓰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분리라는 그 고난을 통해 내게 하나님 아버지를 선물로 주셨다.
복음을 알고 매일 말씀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저 기독교의 한 상징물, 장식물로만 여겼던 십자가가 내 마음에 확 들어오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이 십자가로 인해 고난받기 시작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내게 시작한 작업이었으니,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 나를 더 이상 옛 사람의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자로 몰고 가신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푹 빠져 살았던 것, 자기의와 자기자랑이 하늘을 찔렀지만, ‘~인 척, ~아닌 척’ 하며 위선을 떨었던 것, 하나님 앞에서도 나를 주장하기를 겁 없이 했던 것.....
이 모든 행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게 하시니, 그때마다 생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런데 그것은 죄범벅이인 나를 정결케 해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임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러한 고난을 이상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게 된다는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고난은 즐거운 일이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서 이미 있는 것을 상실하든지, 간절히 소망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될지라도 그것을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 예수님과의 연합이 더욱 강력해지고 튼튼해진다.
예수님과의 이러한 연합이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준다.
주님의 십자가는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기까지 한 세상 것을 내게서 끊어낸다.
살아가는 동안 이 고난은 늘 있겠지만, 그 정결케 된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묵상 기도)
주님,
세상살이의 모든 것을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은혜로 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미 죽었던 존재를 보혈로 구원하여 주시고,
십자가에 연합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기라는 말씀을 알아듣고 기뻐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님께 연합되어 살아가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