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주)
* 시작 기도
주님...
밤새도록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천둥 번개로 심장이 쫄깃해지기도 합니다.
천둥이 치면 건물이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지축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아닐까 하여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동녘에 여명은 밝아옵니다.
주께서도 아버지가 정한 시간에 오시겠지요.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사모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궁금해 했던 모든 것이 그 날에는 알게 되겠지요?
아무리 좋았던 것도 끔찍하게 싫었던 것들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를 속박하던 모든 것에서 자유케 될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하던 모든 고통 역시 끝날 것이며 나아가 찬란한 주 영광 볼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날을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바라는 바라며 입을 벌리고 있지 않게 하시고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늘 말씀으로 교제하는 자로 그 날을 기다리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도 곳곳에서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 위에 성령의 충만함이 넘치게 하시어 주를 만나는 경험이 있게 하옵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전 5:1-7
제목 :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곤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 나의 묵상
베드로는 장로로써 편지를 받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직접 보았고 또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동참하게 될 자들이다.
따라서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무리를 보살피되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감당하여야 한다.
돈을 생각하여 섬기지 말고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자기의 소유물인 양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양 무리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섬기면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결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은 장로들, 곧 웃어른들에게 순종하고, 서로 겸손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항상 머물며 겸손할 것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하는 모든 염려와 근심은 다 주님께 맡겨라.
왜냐하면 주께서 그들을 항상 돌보시실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12절은 흩어진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와 성도의 산 소망으로 인하여 찬송할 것, 그리고 시련 중에 있지만 성도의 기쁨과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격려하는 도입부다.
1:13-4:19절은 본 편지의 수신자들이 로마의 공권력에 의해 크게 고난과 박해 당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고난 가운데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성도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거룩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라고 하는 실천적 권면을 보여주는 본론부이다.
마지막으로 5:1-14절은 서신을 마무리하는 결론부로써 성도들을 향해 겸손과 인내를 권면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장로의 의미는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
평신도이지만 귀족 계급에 속한 구성원들이나, 유대인들의 회당 공동체에서의 장로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당시 그 회중 가운데서 세운 지도자들이나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을 나타낸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자기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하면서 같은 장로들에게 편지한다고 한 것은 당시 감독과 더불어 초대 교회의 전반적인 일들을 관리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베드로가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인 장로들을 위하여 특별히 권면하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로 서야 교회가 굳건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2-3절에서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무리를 목양할 때 억지로 하거나 강압적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섬길 것이며 또한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한다.
특히 더러운 이득, 즉 돈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기쁨으로 감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전도사로 섬길 때부터 규모가 있는 교회를 섬겼다.
전도사 때는 개인적으로 가정을 심방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강도사나 목사가 되어서는 심방전도사와 함께 가정별로 심방을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심방 받는 가정에서 봉투를 주는 것이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다.
예배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 심방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집에서 봉투 하나를 주었다.
그 봉투를 받아서 성경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차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까 돈이 몇 만원 들어 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을 받아도 되나? 이런 것 받으면 안 되는데....”
갈등하는 마음과 함께 고민하다가 그냥 용돈이라 생각하고 사용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다른 집에 심방을 가는데 글쎄 ‘이 집에서는 봉투를 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에 맴도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고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심방을 마쳤다.
그 후로도 각 가정을 심방할 때 봉투를 주면 받아 챙겼다.
처음에는 가슴이 떨리고 갈등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당연한 듯 받아 챙기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기대를 하고 갔는데 봉투를 주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마저 들기도 하였다.
나는 그러면서 점점 돈의 노예가 되어 갔다.
물론 큰 돈은 아니다.
그렇다고 많은 가정에서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받는 돈 봉투는 점점 나의 양심을 좀먹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고, 몇 안 되는 가정이지만 이들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다.
점점 새 가족들이 모이고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가정들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하루는 새가족 등록심방을 갔는데 돈 봉투를 내미는 것이다.
물론 그 봉투는 나를 주는 돈 봉투가 아니라 심방감사헌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봉투를 받는 순간 내 안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 돈을 내가 쓸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내가 지금 도둑질 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내 안에 가룟 유다가 살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날 결심하기를 심방을 이유로 성도들에게 절대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돈에는 묘한 마력, 마성이 있다.
그래서 한 번 받으니까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가보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가정을 심방하면 성도들이 아주 가끔씩 봉투를 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서 봉투에 그 가정 이름과 심방감사헌금이라고 적고 바로 여전도사에게 넘겨드린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헌금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내게 주는 봉투 역시 절대로 받지 않는다.
극구 주시는 분들에게는 그 분 이름으로 해서 교회에 헌금을 하도록 여전도사에게 주었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한 것처럼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일하게 되니까 신앙 양심이 무뎌지고 점점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 받는다고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받지 않는다고 삶이 힘든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 번 받기 시작하니까 내 마음이 온통 거기에 지배당해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돈의 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타락한다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다.
아주 사소한 일 하나로 인하여 넘어지지만, 그것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결정타가 되기도 한다.
지금 한국 교회 목사들의 경우, 이 돈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깨지고 박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세상적으로 경기가 어렵다고들 난리인데, 교회들은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자칭 성전(?)들을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멀쩡한 예배당을 뜯어내고 새 예배당을 짓는데, 어떤 교회는 2-3부 예배드리는 것이 번거롭다고 한 번에 드리기 위하여 새 예배당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교회는 재건축 부지로 편입되어 보상을 받아서 예배당을 새로 지었는데 교회가 돈이 너무 많다 보니까 목사와 성도들이 돈 때문에 싸우기 시작하다가 결국 교회가 산산조각 나고 성도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돈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선한데 쓰면 선하고 악한데 쓰면 악하다.
그러나 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타락하기 시작한다.
목사는 교회 돈을 자기 주머니의 쌈짓돈처럼 쓰려고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일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나는 돈에 대한 나의 약함을 잘 안다.
그렇기에 더 철저히 내 자신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 어디서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돈에 노예가 되어 죽기에만 합당한 나를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선한 양심을 발동시켜 다시금 일으켜 주심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주의 일은 돈, 즉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불사르며 기쁨과 감사로 기꺼이 해야 하는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 앞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양심에 화인 맞아 감각도 없이 무뎌져 버린 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거리낌도 없어지고 두려움도 사라져서 결국 지옥으로 달려가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오늘 묵상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약함을 잘 아시는 주여,
돈을 사랑하는 데로부터 나를 건져주소서.
세상의 정욕을 즐기는데서 구원하소서.
오직 주의 품안에서 기쁨으로 누리며 살기 원합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 품속을 사모하듯 아버지의 품속을 사모하오니 그곳이 나의 놀이터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직 주의 눈이 나의 눈이 되게 하시고, 주의 손이 나의 손이 되게 하시며, 주의 발이 나의 발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나의 지체를 사용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