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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아침기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저녁기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끝기도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
철학자이고 순교자인 유스티노는 2세기초 사마리아 지방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여 많은 글을 썼다. 그 중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 두 가지만 보존되어 내려온다. 로마에 학원을 세워 여기서 공개 토론을 개최했다. 165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도들은 체포된 후 루스티쿠스라는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법정으로 끌려 나아가자 총독 루스티쿠스는 유스티노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먼저 제신들을 믿고 제왕들에게 순종하라." 그러나 유스티노는 "우리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발당하고 억압받을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는 무슨 교설을 신봉하느냐?" 하고 루스티쿠스가 물었다. 유스티노는 대답했다. "저는 온갖 교설을 알아보려고 노력한 후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받아 들였습니다. 비록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그러자 총독은 "이 불쌍한 녀석아, 그게 바로 네가 신봉하고 있는 교설이란 말이냐?" 하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스티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이기에 따르고 있습니다."
총독은 물었다. "그건 무슨 가르침인가?" 유스티노는 대답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태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고, 구원의 전달자와 탁월한 가르침의 스승으로서 사람들 가운데 오시리라고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저는 이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해 올바로 말할 자격이 없는 일개 인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리 말씀 드린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예언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예언의 힘을 필요로 함을 알고 있고 또 그분께서 사람들 가운데 내림하시리라고 예언한 예언자들은 그 예언의 힘을 하늘에서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루스티쿠스는 "그렇다면 너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냐?" 하고 물었다. 유스티노는 "예,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총독은 유스티노에게 말했다. "너는 스스로 학식 있고 참된 교설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 내 말을 듣거라. 내가 너를 매로 치고 목을 자른다면 너는 천국에 올라가리라고 믿느냐?" 유스티노는 대답했다. "제가 만일 귀하가 말하는 것을 견디어 낸다면 주님의 집에서 살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삶을 살아간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날이 되면 천상 상급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총독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천국에 올라갈 때 어떤 합당한 상급을 받으리라고 상상한단 말이냐?" 유스티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건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총독은 말했다.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핵심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일은 이것이다. 너희는 함께 앞에 나와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라." 그러나 유스티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아무도 참된 신앙을 포기하고 거짓 신앙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총독은 고집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무자비하게 고문당할 것이다." 유스티노는 대답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문당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 - 그것이 우리 소원입니다. 이 고통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어 주고 우리가 구세주이신 주님의 준엄하고 공정한 심판대 앞에 나아갈 때 자신감을 줄 것입니다." 모든 순교자들도 똑같이 말했다. "귀하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상에게 제사 지내지 않겠습니다." 총독은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이자들은 제신들께 제사 지내기를 거부하고 또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이자들을 끌어내어 매질을 하고 법에 따라 처형하라." 거룩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늘 형을 집행하던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 곳에서 참수형을 당함으로써 구세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성 유스티누스(Justinus)
1. 생애
유스띠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트리폰과의 대화}에 묘사되어 있는 자신의 입교과정과 그에 관한 순교록을 통해 어느 정도의 골격을 잡을 수 있다. 그는 100에서 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의 플라비아 네오폴리스(지금의 나브루스)에서 이교가정의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며, 진리를 찾아나서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플라톤 사상에 연이어 몰두해 보았지만 끝내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유스띠노는 체사리아의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그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그분은 이 모든 것과, 여기에서 다 이야기할 수 없는 다른 것들도 들려주고 나서는 나에게 이것들에 대해 숙고해 보라고 권하면서 떠나갔다. 그후 나는 그분을 더이상 뵙지 못했다. 그런데 내 영혼안에 갑자기 섬광이 일어났고, 나는 예언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마음속으로 곰곰히 되새기면서 이 철학이야말로 참되고 유익한 유일한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철학자가 된 과정과 이유이다. 나는 모든 이가 나와 같은 체험을 하여 구세주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기를 바란다}(트리폰과의 대화 8). 여기서 말하는 {철학}(philosophia)이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플라톤 학파의 제자였을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제 2호교론 12). 그는 이제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 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게 된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유스띠노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것은 130년 경이다.
그는 132년과 135년 사이에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가졌으며, 이것을 토대로 155년에 {트리폰과의 대화}를 저술하였다. 그후 생애의 절반을 로마에 머물렀으며, 로마의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schola)를 세웠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후에 호교론자가 된 타찌아노가 있었다. 유스띠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에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을 썼으나, 165년에 로마의 율리우스 루스티꾸스 집정관에 고발되어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로마교회는 그의 축일을 6월 1일에 지낸다.
2. 저서
2.1. 두편의 호교론
유스띠노가 쓴 두 편의 {호교론}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임과 동시에 2세기의 호교론자들의 저서 중에 가장 뛰어난 저서이다. {제 1호교론}은 {원로원과 로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미움을 받고 박해당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중에 한 사람인 프리스쿠스의 아들인 유스띠노는 이들 모두를 위하여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께와, 철학자이며 가장 훌륭한 그의 아들 (말쿠스 아우렐리우스)께 우리의 요구와 주장을 이렇게 전하는 바입니다}는 말로 시작된다. 68장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제 1호교론}은 안토니우스 황제(138 - 161년 통치)에게 직접 쓴 것이며, 제 46장에 {그리스도께서는 150년 전에 귀리노 총독 치하에 있을 때에 태어나셨습니다}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152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제 1호교론}은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부(1 - 20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근거없는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사실을 잘 조사하여 그들이 당하고 있는 억울함을 없애줄 것을 황제에게 간청하고 있다. 그는 허위증언에 근거하여 재판하는 공권력의 남용과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무죄한 사람들이 왜 억울하게 고통과 박해를 받아야 하는지, 그 부당한 처사의 합법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항변하고 있다.
제 2부(21-60장)에서는, 그리스도교와 이교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이교 설화에는 유치하고 저질적이며 부도덕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에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과 교리의 합리성을 설파하면서 이교인들도 이 참된 진리의 교회로 귀의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제 3부(61-68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종교예식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을 부도덕하다고 무고(誣告)하고 박해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또 그렇게 박해하는 자에게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 있으리라고 경고한다.
유스띠노는 마지막 장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미 125년에 아시아의 총독 미누치우스 푼다누스에게 보낸 명령서를 인용함으로써, 당시의 황제 안토니우스에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서는 다음의 4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도 법정에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 둘째, 로마법을 명백히 어겼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처벌할 수 없다. 셋째, 형량은 죄과의 경중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넷째, 허위증언은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그리고 15장으로 되어 있는 {제 2호교론}은 161년 경에 로마의 집정관 율리우스 루스띠쿠스로부터 부당하게 박해받아 순교당한 3명의 처형문제를 항의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며, {제 1호교론}의 후편 또는 보완편이라 할 수 있다.
2.2. 트리폰과의 대화
유스띠노의 2편의 호교론이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호교론적 저서라한다면, [트리폰과의 대화]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유대인들을 향해 쓴 호교론적 저서이다. 이 저서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132년과 135년 사이에 에페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유대교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를 토대로 155년에 편집된 글이다. 142장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이 저서를 크게 3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도입부분(2 - 8)에서 유스띠노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그리스도교로 입문하게된 경위를 고백하고 있다.
제 1부(9 - 47장)에서는 구약성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을 설명하는데, 구약의 율법은 한시적인 권위를 가질 뿐이지만 신약의 가르침은 전인류를 위한 새롭고 영원한 법이라고 강조한다. 제 2부(48 - 108장)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흠숭하는 이유와 정당성을 설명한다. 제 3부(109 - 142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계명을 따르는 민족들이 새로운 이스라엘,하느님의 참다운 선민이 된다고 설파한다. 이 저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약이야 말로 구약의 완성이며 따라서 구약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구약만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권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3. 신학사상
3.1.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
유스띠노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로고스]에 관한 신학을 전개한다. 로고스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그리스도이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역사하셨으며, 구약의 성조들과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계시하셨고, 인간으로 강생하셔서 만민을 구원하셨으며, 세상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오실 분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창조, 구원,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구세사에 역사하신다.
유스띠노는 이 로고스 그리스도론의 근거로 요한 묵시록 1,8에 나오는, {그분은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라는 말씀을 제시한다. 희랍의 옛 철학자들은 그들보다 훨씬 앞서 살았던 모세의 율법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모세는 바로 로고스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유스띠노는 [계시하시는 로고스]와 [계시를 받는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로고스를 계시의 [씨앗을 주는 로고스](Logos spermatichos)라 하고, 인간이 받은 계시를 [로고스의 씨앗](spermata tou Logu)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계시 자체이신 로고스께서 친히 강생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신약의 그리스도교는 완전한 진리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계시의 강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부분적으로 받은 구약의 유대교, 그리고 그 유대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희랍의 철학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계시와 진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후기 교부들의 그리스도론 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2. 마리아론
{주께서 동정녀를 통해 사람이 되셨는데, 뱀에서 연유된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된 길과 같은 길로 오셨다.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처녀였지만 뱀의 말을 잉태함으로써 불순종과 죽음을 낳았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을 때 믿음과 기쁨을 잉태하셨다.즉 [주님의 영이 당신 위에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당신을 감싸주실 것이다.]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마리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성서가 말하는 분께서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으며, 하느님은 그분을 통해 그 뱀을 파멸시키셨다}(트리폰과의 대화100).사도 바오로는 로마 5,13-21에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와 인간에게 내려진 죽음을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신학을 발전시켰듯이, 유스띠노는 하와와 마리아를 같은 구도안에 도입시켜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역사안에 나타난 최초의 마리아론이라 할 수 있으며, 후에 성 이레네오는 같은 맥락에서 이 마리아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3.3. 성체성사
성체성사에 관한 언급이[제1호교론]65-67장에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세례성사를 받은 신 영세자들을 위한 성찬전례인데(65-66),순서는 이러하다. 신도들은 새로운 형제가 된 신(新) 영세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눈 다음, 본격적으로 성찬전례에 들어간다. 부제가 빵과 포도주를 준비한 다음,사제는 이 제물 위에 성삼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장엄한 기도를 바치면 회중이 {아멘,아멘}하고 응답하며 이어서 영성체를 하게 된다. 성찬전례에는 세례를 받은 신자만 참여할 수 있으며,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가 된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제67장에는 매 주일에 바치는 성찬전례가 묘사되어 있는데 순서는 이러하다. 도시에 사는 신자나 시골에 사는 신자나 모두 함께 모여 먼저 독서를 들은 다음 사제의 강론을 듣고, 모두 일어나 기도(오늘의 신자들의 기도에 상응함)을 바친다. 그 다음 빵과 도도주와 물의 제물을 준비한 다음의 순서는 신영세자들을 위한 성찬전례와 같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主日)에는 성찬전례에 참례하는 것과 함께 전례의 정신에 따라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유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봉헌하고 가난한 이웃, 특히 고아, 과부, 병자, 감옥에 갇힌 형제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형우 신부님, 대구 대신학원 강의록,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교부들의 가르침 : 철학자며 순교자 유스티누스
’그리스도교야 말로 참된 철학’드러내
고성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이연학 신부
고대 교부들 중에는 드라마틱한 생애와 오늘의 현실에도 여전히 쩌렁쩌렁한 울림을 주는 사상으로 말미암아 유난히 시선을 끄는 분들이 있다. 유스티누스는 그 대표적인 한 분이다. 100~110년경 팔레스타인의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seeker)으로 살았다. 참된 구도자들의 여정이 거개 그러하듯, 그의 ’진리 찾기’ 여정도 참으로 눈물겨웠다. 후에 테르툴리아누스(155~212)가 그에게 붙여준 ’철학자요 순교자’란 호칭이 그의 생애의 굵은 선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것 같다. 그는 무엇보다도 가장 참된 의미에서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유스티누스야말로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ia)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도 철학자였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철학자였다. 아니, 그에게는 그리스도교야말로 ’참된 철학’(vera philosophia)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철학한다는 것과 신앙한다는 것은 조금도 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한 몸 안에서 ’철학자’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증언하는 ’순교자’의 삶이 동시에 꽃피어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트리폰과의 대화’는 그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충만한 진리를 만나게 되기까지 걸었던 여정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추구하는 사람의 여정이 흔히 그러하듯 당대의 여러 학파를 기웃거렸다. 스토아 학파와 소요(逍遙)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 학파를 두루 거치며 배우던 유스티누스는 어느날 해변을 걷다가 도인풍(道人風)의 신비로운 노인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충만하고 참된 지혜이신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된다. 노인은 유스티누스가 마지막으로 심취해 있던 플라톤 철학이 결코 자기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면서 성서의 예언자들을 길잡이로 삼으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누구를 높이 보거나 두려워함도 없이, 그리고 영광을 얻으려는 욕구에서도 자유로이, 진리를 보고 선포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노인과의 만남에 대하여 후에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후 나는 그 노인장을 다시 뵙지 못했지만, 내 영혼 안에 어느듯 불꽃이 이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른의 말씀을 속으로 곰곰히 되씹으면서, 이 철학이야말로 참되고 유익하며 유일한 철학이라고 깨달았다. 이리하여 (비로소) 나는 철학자가 되었고, 또 이런 이유로 (비로소) 나는 철학자가 된 것이다. 모든 이가 나 비슷한 체험을 해서, 구세주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트리폰과의 대화’ 8). 이처럼, 진리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과 추구가 그를 그리스도교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원리나 이치로서의 진리를 넘어서, 드디어 ’어떤 분(위격)’이신 살아있는 진리,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대략 이런 경위로 그는 130년 경 에페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그리스도교를 열렬히 전파하고 옹호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참된 철학’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철학자’로 생각한 나머지 당대의 철학자들이나 순회 교사들이 착용하던 망토(pallium)를 걸치고 다녔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교사요 집필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유스티누스는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의 로마 집정관 유니우스 루스티쿠스에게 고발되어 6명의 동료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로써 그는, 한참 후배뻘 되는 또 다른 그리스도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55)가 진리를 두고 갈파한 바 있는 무시무시한 깊이의 경구(警句)를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진리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되는 데 있다.’
그는 다작(多作)의 저술가였지만 우리에게 전해오는 작품은 ’트리폰과의 대화’와 두 권의 ’호교론’ 뿐이다. 방대한 규모의 이 저술들에서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우리 시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그의 신학 사상, 이른바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대해 지극히 짧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구원 경륜’(oekonomia salutis)이라 일컫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충만히 실현되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이성(logos)을 타고 났다는 점에서 이 영원한 말씀(Logos)에 참여하는 한 ’부분’이다. 말씀은 창조 때에도 일하신 분이므로, 사람은 이미 창조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semina Verbi)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교 철학자들이 가르친 모든 진리도, 비록 아직 어둡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속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결국에는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제 2 호교론’ 10; 13,4 및 ’제 1 호교론’ 23,1). 유스티누스의 이런 확신의 근저에는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는 성서 말씀이 있다. 비 그리스도교 철학에 대한 이런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통찰은 문화 일반, 특히 복음이 뿌리내리고 있는 특정한 토착 문화와 여러 세계 종교의 경전에까지 얼마든지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리하고도 신중한 신학적 분별 아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와 이 땅에서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성숙해야 할 깊이있는 토착화 작업 및 참신한 ’문화의 신학’을 위해 든든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 시대에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 종교간 만남과 대화의 성숙을 위해서도 의미심장한 착안점으로 남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1월 12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22. 교부편 (3) 유스티노
한평생 설교.저술로 교회수호
성인이자 교부이며 순교자였던 유스티노(Justinus, 100/11?~165)는 이른바 「평신도 신학자」였다. 2세기 호교 교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 꼽히는 유스티노의 구도의 자세와 신앙의 열정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구도의 모범이었다고 할 만하다.
유스티노가 살았던 2세기는 선교활동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크게 확장되던 시기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해, 그리스도교 교회는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아프리카 등의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교가」들은 먼저 그리스도교를 사람들의 비방과 철학자들의 비판에서 보호하고, 하느님이 단 한 분 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됐음을 보여주면서 우상숭배와 다신교를 논박해야 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성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과 개념으로 소개했다. 평신도 신학자 유스티노는 호교 교부로서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박해에 항의해 여러 권의 호교서를 저술함으로써 당시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교를 수호했다.
유스티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에페소에서 유다인인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적은 「트리폰과의 대화」에 묘사된 입교 과정과 그의 순교에 관한 보고,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와 에피파니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진술 등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는 팔레스티나의 사마리아 지방에 있는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에서 100~110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의 성장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된 철학, 진리를 찾아 다니던 그는 당시 유행하던 철학 사조들에 몰두했다. 교부시대를 풍미하던 철학 사조에는 스토아 철학이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 그리고 피타고라스 철학 등이 있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색하기 위해 이러한 철학 사조들을 탐구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플라톤 철학에서 「안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날 가이사리아의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대화 중에서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 비로소 그리스도교에 입교한다. 그는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이 순간을 회상함으로써 자신이 신앙에 귀의한 경위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나는 그분을 더 이상 뵙지 못했다. 그런데 내 영혼 안에 갑자기 섬광이 일어났고 나는 예언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됐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면서 이 철학이야말로 참되고 유익하며 유일한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모든 이가 나와 같은 체험을 하여 구세주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기를 바란다』(「트리폰과의 대화」 8).
유스티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이유는 또 있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태도에서 느끼게 된 깊은 감동이었다.
『플라톤 학파의 제자였을 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 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제2호교론」 12).
마침내 130년 경 에페소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유스티노는 이후 진리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참 진리에 매료돼 그 진리를 설파하고 전하는 설교가가 되어 평생을 봉헌된 삶을 산다. 그래서 그는 떠돌이 설교자의 표시로 철학자의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생애의 말기를 로마에서 보낸 그는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했지만 그 중에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단 세 편 뿐이다. 첫째와 둘째 호교서, 그리고 트리폰과의 대화를 담은 저술이 그것들이다.
2세기 호교론자들의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제1, 2 호교론은 각각 안토니오 피우스 황제와 원로원에 보낸 것이다.
「제1호교론」(Apologia prima)은 68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억울함과 부당성을 항의하고 그리스도교와 이교 사상을 비교하면서 모든 이교도들이 참된 진리의 교회로 귀의할 것을 호소하며,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종교 예식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15장으로 된 「제2호교론」(Apologia secunda)은 특별히 웅변가 프론톤의 공격에 대한 답변으로 여겨지는데, 전권의 후편 또는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161년경 로마의 집정관 유니우스 루스티쿠스로부터 박해받아 순교한 3명의 처형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쓰여졌다. 「트리폰과의 대화」는 「호교론」이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유다인들을 향해 쓴 호교서로 유다교 랍비인 트리폰과 사제로 있었던 대화를 바탕으로 155년에 편집된 저술이다. 142장으로 된 방대한 저서이나 불행하게도 머리말과 74장 대부분이 소실됐다.
유스티노는 말년에 로마에서 오래 머물며 설교와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수호했다. 그러다가 165년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유스티노가 신앙에 귀의하고 그 신앙을 증거해나가는 모습은 흡사 조선시대, 박해의 서슬 속에서도 서학을 익히고 그 안에 있는 참 진리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던 우리 신앙 선조들을 연상케 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6월 27일, 박영호 기자] |
첫댓글 6월1일-성 유스티누스가 에페수스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그는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것이다. 그는 132-135년 사이에 에페수스에서 유대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가졌으며, 이것을 토대로 155년에 “트리폰과의대화를 저술하였다.그는 순회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안토니우스 피우스황제가 있는 로마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을 썼다. 그로인해 참수당한다. 성인을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