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작가 아서 C. 클라크가 3월19일 새벽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의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타계했다. 항년 90살. 그는 1956년 스리랑카로 이주했고 1979년부터 2002년까지 모라투와대학의 총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세금을 면제받는 최초의 외국인이기도 했다. 스리랑카를 제2의 조국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그는 순전히 바다에 잠수하러 왔다고 말하곤 했다. 스리랑카의 바다는 그가 우주의 무중력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어렸을 때 앓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장애를 얻은 그가 몸을 온전히 가눌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바다는 <해저 목장>과 같은 그의 해양SF소설의 배경이며, 스리랑카는 그의 장편 <낙원의 샘>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궤도 엘리베이터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에서 스리랑카는 타프로바니로 국명을 바꾸고 적도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야만 했지만.
SF 문학사의 거목 아서 C. 클라크는 죽기 직전까지 젠트리 리, 스티븐 박스터, 프레데릭 폴과 같은 공저자들과 함께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그의 전성기는 그의 마지막 걸작 <낙원의 샘>이 발표된 1979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 뒤로 그는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전성기에 발표된 대표작들(<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라마와의 랑데부>)의 다소 떨어지는 속편들을 발표하며 경력을 이어갔고 <3001 The Final Odyssey> 이후로는 단독 작품도 없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는 그 밖의 면에서도 종종 비교 대상이 된다. 두 사람 모두 빅3라는 SF 황금기 거장들 클럽에 속해 있었고(마지막 한명은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이다), 영향력있는 과학저술가였으며, 가장 명성 높은 SF작가들이면서도 끝까지 문학이라는 매체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SF계에 뉴웨이브 열풍이 분 뒤로, 그들의 평면적인 캐릭터, 나이브한 심리묘사, 뻣뻣한 대사체와 구성은 한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소설도 잘 쓸 줄 아는 과학저술가에 가까웠으며 저서들도 논픽션이 더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 C. 클라크는 여전히 SF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작가들 중 한명이며, 그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비교적 편안하게 SF 팬덤 안의 작은 영역에서 안주했던 아시모프와는 달리 클라크의 작품들은 그레고리 벤포드나 그렉 베어와 같은 직속 후계자들뿐만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나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도리스 레싱 심지어 <V>나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통속적인 할리우드 SF 명상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과학자 보다 더 과학자다운 다소 무리하게 정리한다면 클라크의 세계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엄격한 과학 묘사와 그에 바탕을 둔 장대한 비전. SF작가로서 그는 소설에서 엄격한 하드 사이언스를 고수했다(<신들의 망치>나 <라마와의 랑데부>는 그대로 천문학과 물리학 교재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인류의 진화와 외계 지성에 대해 거의 초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압도적인 희망을 제시했다. 클라크 제3법칙이라고 불리는 모든 기술이 극도로 발전되면 마술과 구분하기 어렵다(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라는 그의 명제는 사실적인 과학과 초자연적 비전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그는 종교를 유해한 바이러스쯤으로 여기는 무신론자였지만, 그의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종교적이었고, 그 믿음의 대상은 인간 지성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비전이 가장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장편인 <유년기의 끝>이다. 이 작품에서 날개 달린 악마의 모습을 한 외계종족 오버로드는 지구를 찾아와 지구인들에게 전쟁과 빈곤이 없는 황금시대를 열어준다. 하지만 나중에 이들은 지구인들을 오버마인드라는 초월적인 존재로 진화하도록 돕는 산파였음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초과학에 대한 믿음은 나중에 작가 자신에 의해 철회되었지만, 소설의 기본 테마는 좀 더 엄격한 하드SF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라마와의 랑데부>, 심지어 외계인이나 인류 진화와는 별 상관없어야 할 것 같은 궤도 엘리베이터 이야기 <낙원의 샘>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의 이런 초월적 믿음은 그가 기본이 단단한 과학자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대학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클라크는 과학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하나 세웠다. 1945년 <와이얼리스 월드> 잡지에 발표한 기고문(http://lakdiva.org/clarke/1945ww/index.html)에서 그는 강력한 로켓이 개발되고 물체를 적도 상공 36000km의 원궤도상으로 쏘아올린다면 위성을 통한 대륙간 전화중계 및 라디오 방송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를 발표해 위성통신의 가능성을 최초로 제안했다. 그는 그 아이디어의 특허를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위성통신 산업에서 쏟아지는 물질적 이익을 거의 누리지 못했지만 이 정지 궤도에는 클라크 궤도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2000년 유럽통신위성단(EUTELSAT)은 통신위성의 이름을 아서 클라크 호로 명명하기도 했다.
가장 위대한 SF명화의 창조자 영화팬들에게 클라크는 스탠리 큐브릭의 1968년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클라크의 단편 <파수병>의 아이디어를 확장시킨 이 영화는 지금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SF명화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1984년에는 이 작품의 속편인 <2010>이 나왔고 그는 이 작품에 직접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다. 소행성 충돌을 다룬 그의 소설 <신들의 망치>는 스필버그에 의해 판권이 구입되었지만 최종 완성된 소행성 영화 <딥 임팩트>는 클라크의 원작과 닮은 점이 거의 없었으며 클라크의 이름도 크레딧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은 데이비드 핀처가 모건 프리먼 주연으로 그의 또 다른 걸작 <라마와의 랑데부>를 영화화할 계획을 몇년째 진행 중이고, 한동안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감독 킴벌리 피어스가 <유년기의 끝>의 각색 계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이 언제 다시 현실화될 수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2007년 아흔 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그는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스리랑카 내전 종식, 청정 에너지원 개발, 외계 지성의 존재 입증. 2001년을 넘어 7년을 더 살았지만 그는 그 어느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더이상 클라크에게 소식을 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분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듀나 djuna01@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