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잡스' 다이슨을 만나다
비틀스만큼 유명한 가전회사 '다이슨'
청소기에 먼지봉투가 왜 필요해?…
이 남자 앞에선 100년 된 고정관념도 뒤집힌다
회사는 맘스버리(Malmesbury)란 소도시에 있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인구 5000여명의 중세풍 도시다. 이곳에는 7세기 처음 세워진 맘스버리 성당과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올드 벨’(1220년 건축) 말고도 명물이 하나 더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비틀스만큼 유명한 가전회사 다이슨(Dyson)이다.
2001년 엘리자베스 여왕도 다녀갔다는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리셉션 데스크에 앉은 여직원을 제외하고 모든 직원은 청바지나 면바지 차림이다. 벽에는 미술 작품 대신 가로 2m, 세로 1.5m 크기의 대형 설계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날개 없는 선풍기(제품명 에어멀티플라이어)’의 설계도였다. 2009년 타임(Time)이‘올해의 발명품’가운데 하나로 꼽은 선풍기이다. 가운데가 뻥 뚫린 동그라미 안에서 마치 마술처럼 바람이 나오는 모습은 직접 봐도 쉽게 믿기지 않는다.
사무실 출입문에는 보라색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그 중 하나에 이렇게 쓰여 있다. “ 전기를 이용한 최초의 선풍기는 1882년 발명됐다. 날개를 이용한 그 방식은 127년간 변하지 않았다.”
이 회사의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63·Dyson)은 선풍기에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선풍기는 꼭 날개를 써야 하지? 돌아가는 날개 때문에 바람이 중간중간 끊기고 날개를 청소하기도 어렵잖아. 더구나 아이들은 늘 손가락을 넣고 싶어해 위험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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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임스 다이슨과‘날개 없는 선풍기(에어멀티플라이어)’. 이 제품은 2009년 미국의 시사 잡지‘타임’이 선정한‘올해 가장 혁신적인 제품 톱10’에 뽑혔다. /AP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선풍기의 틀이 깨지는 데는 4년이 걸렸다. 높이 50㎝ 크기의 프로토타입(시제품)을 시작으로 개발을 거듭한 결과였다. 작년 10월 영국에서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 제품은 겨울에도 구하기 어려운 초인기 상품이다.
한국에는 이르면 올겨울에나 들어올 예정이다.
영국 산업계의 이단아,‘ 영국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는 제임스 다이슨은 요즘 전 세계 기업가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을 단 청소기는 비싼 가격(국내 판매가 65만~100만원)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북미시장에서 1등을 달리고 있다. 그가 히트시킨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 덕분이다.
최초의 현대적 진공청소기는 1901년 영국 발명가 부스(Booth)가 개발했다. 그 뒤 일렉트로룩스나 후버 같은 대형 가전회사들이 100년 가까이 전 세계 가정에 수억 대의 진공청소기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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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이슨사가 제작한 첫 진공청소기 모델인 DC-01. /다이슨 제공
하지만 그 100년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먼지봉투다.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돼온 진공청소기는 먼지봉투로 공기에서 먼지를 거른 뒤 봉투째 버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먼지가 봉투의 작은 구멍을 막기 때문에 금세 청소기의 흡입력이 떨어진다. 여기에 분노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다이슨이다.
그는 1979년 집에 딸린 낡은 창고에 들어가 5년간 5127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고, 마침내 세계 최초의 먼지봉투가 필요 없는 청소기를 개발했다. 원심분리기처럼 공기를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 먼지를 분리해 내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특허를 팔고 원래 직업인 디자이너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시제품을 들고 2년간 미국과 유럽의 회사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당시 세계 1위 업체였던 후버를 비롯해 일렉트로룩스, 블랙앤데커 등 세계적 기업들은 기존 제품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람들이 먼지봉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죠? 사람들은 먼지봉투 방식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는 안 팝니다. 먼지봉투 판매는 우리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결국 남자는 자기 이름을 딴 회사를 세워 직접 제품을 만들었고 2002년 미국 시장 진출 이후 3년 만에 후버를 제쳤다. 비틀스 이후에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영국산(産) 제품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직원들이“JD”라고 부르는 제임스 다이슨의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다이슨은 개인 기업인 이 회사의 오너이지만, 지난 3월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지금은 수석엔지니어 직함만 가지고 있다. 일이 더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다.
"성공은 99%의 실패로 이뤄진다… 직원들이 실패하게 하라"인터뷰는 12시 30분 시작됐다. 그의 오전 일정이 밀리면서 인터뷰는 1시간 늦춰진 상태였다. 다이슨은 점심도 건너뛴 채 질문에 답했다. 얼마 전 무릎 관절 수술을 해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새로운 기술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마치 소년처럼 눈이 반짝였다. 그는 처음 보는 것, 다른 것,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꺼내 들자 "어디 제품이냐" "기종은 뭐냐"며 꼼꼼히 물었다. 인터뷰 내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공격적인 질문에는 지기 싫어하는 고집이 느껴졌다.
■우리는 경험이 없는 직원을 원한다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다른(different)'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는 예전과 다른 환경에서 남과는 다른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길 원합니다(We want to do something different, do it differently, in a different environment)."
다름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직원 채용에도 적용된다. 그는 "직원을 채용할 때 해당 분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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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임스 다이슨과 그가 직접 개발을 지휘한 다이슨의 소형 진공청소기. ‘흡입력은 같으면서 크기는 작은 청소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5년간 48명의 엔지니어가 뛰어들어 모든 부품을 새로 만들었다. /다이슨 제공
―직원 교육 비용이 커지지 않나요?
"우리가 원하는 마케팅 직원은 경험이 부족한 마케팅 직원입니다.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마케팅 전문가가 아니에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선입견이 없고, 맡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마치 탐험(pioneering)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우리 회사 청소기의 경우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고객서비스센터 번호를 붙여놓습니다. 15년 전에 우리가 처음 이 일을 했을 때 경쟁사들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죠. '당신네 청소기는 쉽게 고장 나니까 그런 일을 하는 거지'라고요.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언제든 쉽게 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 아이디어는 제가 낸 게 아니고, 우리 고객 상담 직원 중 한 사람이 낸 것입니다. 그도 신참 직원이었죠."
그러고 보니 기자를 안내한 한국 판매 담당 매니저는 외교관 출신이었다. 직원들에 따르면 이 회사 연봉은 높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서울을 좋아하듯 갓 대학을 졸업한 영국 젊은이라면 런던을 선호하는 게 당연한데, 젊은 인력들이 이 시골까지 내려온다. 직원 마리오씨는 "다이슨에 없는 단어가 있는데 '불가능(impossible)'"이라며 "이런 분위기의 회사는 영국에서 여기뿐이고 다이슨에서 일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경력"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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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이슨 본사 건물 문 손잡이에 붙어 있는 홍보 문구. 1882년 최초의 전기 선풍기가 나온 이후 127년간 전기 모터로 날개를 돌려 바람을 일으키는 방식에 변화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박수찬 기자
■직원들이 실패하게 하라. 빨리 배울지니
숱한 실패 끝에 성공을 이룬 그의 지론은 "성공은 99%의 실패로 이뤄진다"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실수하게 하면 일을 빨리 배운다"며 실패를 장려한다. 그래서일까? 다이슨이 내놓는 제품들은 개발 기간이 길다. 청소기가 5년, 날개 없는 선풍기는 4년이 걸렸다. 1999년 첫 시제품을 공개했던 로봇청소기의 경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발 중이다. '완벽한 제품'을 위해 더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진공청소기 개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죠. 빚은 계속 늘어가고 대기업들에는 문전박대를 당하셨는데 포기하고 싶단 생각은 안 들었나요?
"제 성격이 원래 포기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제가 올해 63세인데, 그 중 40여년간 실패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실패에 익숙해요. 엔지니어나 과학자의 삶에 실패는 늘 따라다닙니다. 성공이 오히려 드물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직원들이 개발 스케줄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실패만 하고 있으면?
"물론 프로젝트를 제때 끝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제품을 내놓는 일입니다. 저는 직원들이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문책하지 않아요. 전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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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디자인 중심 기업이라고? 우린 기술 중심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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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2008년 다이슨을
애플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디자인 중심 기업(design oriented company)이라고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다이슨은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성공한 회사'로 알려졌다. 경영대학보다 미술대학에서 더 많이 소개되는 것도 그 이유다.
―다이슨이 애플과 더불어 디자인 중심 전략으로 성공했다는 분석에 동의합니까?
"아니요. 하버드 경영대학이 우리 회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군요. 우리는 절대 디자인 중심 회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술 중심 회사(technology oriented company)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니까요.
다만 이왕 제품을 팔면서 디자인이 엉망인 제품을 내놓을 필요는 없지 않으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가 디자인이 아니라 기술을 중심에 놓고 제품을 판다는 겁니다. 다이슨 제품의 포장 박스나 광고를 보세요. 그 어디에도 디자인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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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맘스버리에 있는 다이슨사 건물 지붕은 물결 모양을 하고 있다. 2층 사무실은 칸막이 없이 트여 있어 마치 비행기 격납고처럼 보인다. 칸막이를 두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제임스 다이슨은“최고의 아이디어는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나온다”면서“소속 부서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박수찬 기자
―다이슨은 연구·개발·디자인(RDD)을 통합적으로 하고,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디자인 능력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이 서로 분리돼 있다는 생각 자체가 20세기적인 사고입니다. 디자인 전문가가 제품의 외양을 멋지게 꾸밀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접근에 반대합니다.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제품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일에 돈을 쓰기 싫어요. 그런 건 일종의 마케팅이죠. 저는 마케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품은 그 자체의 공학으로 말해야 합니다. 제품은 그 속에서부터 빛이 나야지 겉만 멋지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직원 가운데 대학의 디자인 전공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10% 정도 될 겁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디자인만 공부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을 모두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디자인을 사물의 겉모습(How something looks)으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진짜 정의란 제품 안에 쓰인 기술부터 제품의 내구성, 안전성을 포함해 제품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디자인은 산업 제품에 근사하고 멋진 예술을 입히는 것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제품의 여러 특성 가운데 시각적 경험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죠. 이건 분명 잘못된 접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