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에 바다로 나갔던 한일호(3.5t)가 항구로 돌아왔다. 꽃게 10kg, 소라 4kg, 낙지 서너 마리, 우럭 세 마리. 오늘 00씨 부부가 함께 바다로 나가 잡은 어획량이다. 요즘 꽃게 시세가 kg당 2만원 이상이어서 그런대로 벌이가 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부부는 통 말이 없다.
수산물을 정리하던 수협 관계자가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며 타박을 준다. 요즘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아 먼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기름값만 20만~30만원씩 든단다. 꽃게잡이 미끼인 고등어 값에다 장비 값을 더하면 두 사람 인건비도 안 나온단다. 예년 같으면 숭어며 놀래미 등이 한창 올라올 때지만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꽃게잡이로 겨우 적자만 면하는 형편이란다.
의향 2리 개목항에서 마을 주민들이 '떨어진 굴'을 까고 있다. 예전 같으면 관광객이나 캐먹으라고 내버려 두던 것들이다.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 2주년을 1주일 앞둔 12월1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에 있는 개목항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배 갑판을 청소하거나, 낡은 통발을 손보는 어민이 더러 있었지만 항구라 하기에는 활기가 없었다. 어선 30여 척은 갈 곳을 잃고 정박해 있었다. 개점휴업 중인 횟집 간판과 오래된 굴 껍데기 무덤만이 이곳이 한때 번성했던 포구임을 말해주었다. 2년 전, 검은 기름이 바닷가를 덮치기 전만 해도 이곳은 먹고살 만한 곳이었다. 여름에는 갯벌에서 낙지를 잡고, 겨울에는 굴을 까 도시 사람 부럽지 않은 소득을 올렸던 이 마을 사람 대부분은 요즘 일손을 놓고 바다만 바라본다.
희망 근로에 목매는 태안 주민
배라도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기름 유출로 300ha에 달하는 굴 양식장이 초토화되면서 삶의 터전은 그야말로 죽음의 바다가 됐다. 이날 항구 구석에서는 노인들이 굴을 까고 있었다. 양식장이 사라진 마당에 웬 거냐 물었더니 철거된 양식장 부근에서 살아남은 굴이란다. 예전 같으면 관광객이나 캐 먹으라고 내버려두던 것들이었다. 지금은 '이거라도' 아쉬운 형편이다. 항구에서 굴을 까던 문무학씨(75)는 "사고 전에야 자기 양식장이 있으니 이럴 일이 없었지만, 요즘에는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주워간다"라며 혀를 찼다.
기름유출 사태 직후 자원봉사자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태안의 바다는 깨끗해졌다.
이러다보니 마을 주민 사이에도 갈등의 골이 깊어간다. 돈벌이가 신통치 않으니 일당 3만5000원짜리 희망근로 따위에 목을 맨다. "왜 저 사람만 일거리를 주고, 나는 안 주느냐"라는 볼멘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희망근로 사업 진행을 돕는 마을 이장이나 어촌계장은 주민의 원성을 듣는 게 일이다. 최근 들어 상당수 지역의 이장과 어촌계장이 갈렸을 정도다. 이충경 의항리 어촌계장은 "사고 이후 피해 배상비 지급이 늦어지다보니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많다. 굴 양식의 경우 내년부터 다시 시작한다 해도 10년 가까이 공을 들여야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막막하다"라고 말했다.
2009년 11월23일 현재 서해안유류사고대책지원본부 집계에 따르면 충청남도 지역 주민의 피해 신고 건수는 모두 7만969건이다. 그중 배상 청구가 접수된 건이 6만4784건이고, 청구금액은 1조300억원에 달한다.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이 추정한 피해액은 5770억원이다. 청구 신청 건 중 IOPC펀드가 청구를 승인한 것은 겨우 1436건(약 2.2%)이고, 실제 배상금이 지급된 것은 589건(약 66억원)에 불과하다. 사고 초기에 지급된 방제작업비와 이명박 정부 들어 실시한 희망근로 사업 임금을 빼면 태안 어민 손 안에 들어온 배상 금액은 거의 없다.
배상금 보상 절차가 지지부진한 까닭은 IOPC펀드가 주민의 청구를 '짜게' 받아들여서다. 실제 피해보다 과다하게 돈을 청구한 주민도 있고, 소득을 증명할 수 있는 증빙자료가 부족한 주민도 많다는 게 IOPC펀드측 설명이다. 이른바 '태안특별법'에 따라 IOPC펀드의 지급 한도액을 넘는 돈은 우리 정부가 주민에게 지급하기로 돼 있지만, IOPC펀드 측은 계속 까다로운 실사를 벌이고 있다. 앞으로 있을지 모를 유류 사고의 '선례'가 되는 데다 우리 정부가 IOPC펀드 조사를 바탕으로 피해 보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정부는 IOPC펀드가 추정한 피해 사정액 5770억원 중 지급 한도액인 3216억원을 넘긴 나머지 2554억원만 낼 계획이다). 배상금 지급 건수가 적은 것은 피해 주민이 IOPC펀드의 까다로운 피해액 승인에 반발해 배상금 수령을 거부해서다.
삼성이 내놓기로 한 지역발전기금은?
지금도 태안 주민들은 삼성을 사고 가해자로 지목한다. 삼성중공업 크레인선단이 악천후 속에 무리하게 이동하다 유조선을 들이받아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3월 법원이 태안 기름유출 사고의 책임을 제한해달라는 삼성 측의 신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삼성은 56억원만 배상하게 됐다. 주민들은 법원의 결정에 반발해 즉시 항고했고, 12월15일 고등법원 결정을 앞두고 있다. 책임제한 결정이 확정되면 주민들이 별도로 벌이고 있는 삼성과의 배상 소송에서 많은 배상액이 선고되더라도 56억원 이상은 받을 수 없다. 정부가 주민에게 피해액을 먼저 보상하고 나중에 삼성중공업을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하기도 어려워진다.
이충경 의항리 어촌계장은 "마을 주민 간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진다"라고 말했다.
사고 발생 후 2년이 됐지만, 아직도 삼성은 태안을 떠나지 않고 있다. 군청 부근에 현판도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상황실을 차려놓고 피해 지역에 마을회관을 짓거나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사회공헌활동을 벌이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그동안 사회공헌활동으로 200억원 정도를 썼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사고 후 삼성이 내놓기로 한 지역발전기금 1000억원의 행방이다. 이 돈은 현재 공중에 뜬 상태다. 삼성 관계자는 "지난해 2월에 1000억원을 내놓기로 하면서 회사 재무제표에도 반영한 상태이지만, 아무도 이 돈을 안 가져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 부처와 지자체가 돈 달라는 소리를 안 한다는 이야기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피해 지역 간에 합의가 안 된 터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한 피해 지역 마을 이장은 "삼성이 마을회관을 지어준다고 해놓고 일이 진척되지 않아 내가 삼성 사람을 쫓아다니며 하소연하고 있다. 어쩌다보니 가해자인 삼성 앞에서 꼴이 우습게 됐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태안 주민에게 삼성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09년 12월, 태안의 바다는 '검은 재앙'으로부터 크게 벗어났다. 피해가 극심했던 의항리나 신두리 해수욕장에서도 기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지난 11월까지 피해 지역을 조사한 '생태지평연구소'에 따르면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지역과 바다 건너 섬에는 아직도 기름이 묻어나오는 곳이 있다고 한다. 12월1일 취재진이 아직도 기름이 남아 있다는 한 지역을 찾았으나 그곳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게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 역시 행여 관광객 유치에 찬물을 끼얹을까 쉬쉬하는 분위기다. 최악의 기름유출 사태 2년, 그렇게 태안의 아픔은 외부로부터 차단돼 있다. 12월10일, 태안 주민은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피해 배상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연다.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시사IN 구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