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출전할 때
눈을 감아요 나는
내가 안 봐야 그녀가 이기거든요
드레스 리허설까지만 지켜보고
나는 퇴장합니다
오늘 새벽 프리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볼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어요
피겨 퀸은 빙판 위에
댄싱 퀸은 콜라텍에 (밀양강 놔두고
무심천가에 와서 노래하는 일을 다시 시작한
밀양 이모, 환갑 다 된 과붓집이 위장하듯
화장을 하고 레깅스로 강조한 엉덩이 흔들며
노래하는 꼴이란,
이천 원 입장료로 온종일 죽치고 노는
노인들의 콜라텍에서 쌍쌍이 눈이 맞아
모텔도 가고 공원도 가는 옛날 공단 지역
창고 같은 곳에서, 춤도 아니고 들썩임도 아닌
이상한 스텝을 밟는, 뭐야, 도살장으로 실려와
죽음을 눈치채자 교미에 열을 올리는 돼지들
같잖아요, 안 와도 되는데 뭐 하러 왔나?
네 에미가 가보라든? 옷은 이게 뭐냐,
애늙은이같이, 중략, 자칭 댄싱 퀸)
그 허구 속에 자기가 있다고 말하라 했다던
보르헤스처럼
보든지 말든지
당신이 믿는 실체라고 하는 게 사라져야
실체가 나타난다는 말
분장 뒤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그녀가 경기를 할 때 나는
오후 세 시의 스톡홀름 낮처럼 어두워져서
눈보라 치는 감라스탄 구시가
골목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눈앞의 투명 프롬프터를 읽듯 대사를 전달했죠
죽을 때까지 적을 수는 없거든요
쇼는 계속되고 촛불은 많아요
그녀가 입김을 불어 나를 꺼줍니다
매월당은 김시습을 연기하고
연극하세요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을
스웨덴 숲에서 내가 쇼를 할 때 (홍대 앞 파티
용품 가게에서 사서 가져간 삼천 원짜리 은색
가면을 이탈리아 가면으로 오인하여 환호하는
관객들 앞에 내 얼굴을 숨기자마자 스스로를
망각할 수 있었으므로, 일종의 정신병, 후략)
김연아는 김연아가 되고 싶죠
맨주먹은 주먹의 반대말
맨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시즌 스웨덴 거리
촛불 사이 드문드문
아니스캔디가 든 유리 항아리 옆에 잠시
쇼윈도를 바라보면서 나는 홑겹입니다
내 안에는 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