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이 생겼다.
어제 석가설산에 간 사람들의 평가가 아주 극단적으로 나쁘니 마음이 심란하다.
이곳 샹그리라에 정을 못 붙인 사람들은(약 1/2) 아침 8시 버스로 먼저 리장으로 내려 간다고 하고
우리도 12시까지는 숙소로 돌아와야 2시 버스를 탈텐 데...
고를 곳은 두 곳...
송찬림사라는 라마교 사원과 석가산..
헌데 사원은 후에 티벹가서 보면 될 듯해 마음 내키지 않는데, 석가설산은 안 좋았다 하니...
그래도 절보단 산이 낫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날씨(하늘과 바람 상태)를 살펴본 후 아내와 단둘이 설산에 오르기로 결정..
어제 미리 산 간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7시 40분 숙소문을 '열려라 참깨' 소리치며 진격!!
주차장에서 빵차를 60원에 대절후
8시도 안 되어 입구에 도착했는 데 이렇게나 황량하구나...
최고의 왕꼬물 케이블카(220원 - 상하행 환승 1회씩 포함 -- 입장료는 안 받는 듯.)...
탑승시 자동 저속 장치가 없어 일일히 수동으로 속도를 늦추니 가,감속이 예사롭고,
심지어 공사용 자재를 싣게되면 운행중 몇분간 그대로 공중에서 정지까지 하였다..
허나 ...
중간에 내려 다시 옮겨타는 2번의 운행 동안
1000m이상의 고도를 높이며 변하는 지상 세계의 아름다움은 매우 감명깊었고,
또한 케이블 카에서 차분히 감상할 시간이 많은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단, 케이블 카 창문이라도 잘 딱고 내부 청소도 신경 썼으면...
탈적에는 푸른 잎이 울창했는 데,
고도의 변화에 따라 침엽수림, 그리고 곧 수목 한계선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상부에 내리니 갑자기 바람소리가 귀를 때린다.
날이 지극히 맑은 대신 바람만은 양보 못하는 지...
히말라야 산맥에서 날아오는 듯 매섭고 대단하긴 했으나
치매예방 설악산 중청 산행시의 대청봉 바람보다는 견딜만 했다는 게 아내의 의견...
더구나 4500m 이상의 고산에 계속적으로 산소를 보충하는 효과도 있을거라며 자위했다...
인적 없는 해발 4500m 표지판...
원래 이곳은 샹그리라에서 가장 높은 고도의 관망처로
매리설산을 비롯한 3대 설산을 조망하는 것이라하는 데...
이렇게 한번에 3 곳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단다...
자기 몸이 찢기는 고통을 감수하며
타르쵸가 경전을 세찬 바람에 실어 멀리 멀리 퍼뜨리는구나..
다음에 올라갈 옥룡설산....
아직 정상이나 중간의 케이블카 교차지점등에 공사가 많이 진행중인데
역시 말들이 아침부터 한 몫 거들고 있구나..
중간 환승처에 내려오면 식당과 기념품점, 그리고 이런 너른 목장이 있고...
간이 무대에선 소수 민족 젊은이들이 10시반 공연을 관람하라며
산쪽을 보고 앰프를 키우고 소리를 질러대며 몸을 흔들다,
여행객 자체가 없자 쑥스러운지 자리를 피하기도 하더구나....
움막이 있어 들어가니 목동 부부가 옆의 자신들 목장에서 나온거라면서
덮힌 우유와 방목한 소고기구이를 권했다
50세 전후반인 주인네가 묻지도 않는 손주 3명 자랑을 하며 남의 약점을....
역시 여장부들의 건설대가 추가 건물을 짓고 있고...
하산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아까의 목부 움막..
많은 자손과 함께 돈 많이 버시고 행복하게 사시길...
석가설산에 대한 평가가 주관에 따라 극단적일 수가 있을 듯하다.
단지 우리 내외는 좋은 날씨와 색다른 경험으로 가치가 있었다고 동의했다..
바쁜 경우 옥룡설산만 올라도 무방할 듯...
11시 다시 숙소에 도착하니 시간이 어중간해 마지막 고성 관찰중이다.
왼쪽의 서양인들이 꼬치가 먹고 싶은 듯 자리를 뜨지 못한다.
아주, 아주 오래된 흙담과 고성 상가들의 나무지붕...
고성안에 대장정에 대한 박물관이 있었는 데,
내 생각으론 20세기 최대의 인간승리라 믿고 관심도 많았기에,
시간에 여유가 있고 해설자가 도와주었으면 많은 시간을 할애 했으리라..
아랫글은 임의로 인터넷에서 요약해 퍼온 글인바 작가에게 감사드립시다.
중국의 대장정은 그 과정이 극한상황의 연속이어서 규모와 인력, 피해정도 등에 대한 기록이 일정치 않다. 수 만명에 달하는 부대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엄청난 화력을 지닌 추격부대와 싸우면서 이동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마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한 미국 언론인이 대장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면담하고 그 코스를 따라 여행한 뒤 만든 자료에 따르면, 2만5천리의 대장정은 원래 8만6천여명의 남녀병사가 출발했으나 일년 뒤인 1935년 10월 19일 모택동과 함께 산시성에 도착한 병력은 겨우 4천명에 불과했다. 모택동은 대장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험한 중국 오지에서 강 24개와 천 개 이상의 산을 돌파하면서 장개석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군하고 싸우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 전개된 끝없는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대장정은 한마디로 모택동이 장개석을 물리치고 붉은 중국을 탄생시킨 역사적 과정이었다. 대장정이 있기 전 모택동은 장개석과 1930년부터 대결을 벌여 장개석이 전개한 1~4차 초공전에서는 승리했다. 그러나 신식무기와 새로운 전략으로 무장한 장개석 군이 1933년 10월부터 1년 동안 전개한 5차 초공전에서 모택동은 견디지 못하고 패퇴, 대장정을 시작한다. 당시 장개석 백군은 90만 대군 동원했으며 비행기 400대, 기관총 등 신식무기무기를 동원한 반면 모택동의 홍군은 병력 18만명에 소총 10만정에 불과한 절대적 열세였다.
홍군에게는 대장정에서 살아 남는 것 자체가 승리라 할만큼 절박한 싸움이었다. 이들은 전체 대장정 기간인 368일 중 234일을 주간에 그리고 18일을 야간에 행군하면서 평균 130km 마다 1번의 휴식을 취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홍군은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1만여 km 행군했는데 이는 미국대륙을 두번 횡단한 거리와 맞먹었다. 그 과정에서 18개의 산맥, 24개의 강, 12개의 성(省) 통과하면서 62개의 마을과 도시를 점령했다. 홍군은 약 9만의 병력이 출발했으나 1년뒤 4/5가 죽거나 낙오했다. 여성의 경우 35명만 살아남았다--
1934년에 있었던 공산군의 퇴각은 중국의 정치적 지배권을 둘러싸고 수십 년간 계속된 보다 큰 투쟁의 일부였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행군이었다. 1934년 10월 장개석 총사령관 휘하의 국민당군에 완전 포위된 10만의 공산당원들은 중국 남부의 강서, 복건성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은신처를 찾아 출발했다. 이들은 군수품과 반란정부의 온갖 물자들(인쇄기, 기계류, 선전물, 각종문서 등)을 등에 지고 처음에는 서쪽 방향으로, 그 다음에는 북쪽으로 후퇴의 길에 올라 마침내 1년 후에는 중국 서북지역의 오지인 섬서성에서 그들의 피난처를 찾았다.
이들은 11개 성을 통과, 9600킬로미터를 행군하며 추격하는 국민당군과 각 지역에 웅거하고 있는 군벌군, 그리고 적대적인 부족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험악한 강과 산과 늪지를 통과했다. 공산군은 소집단으로 나뉘어 봉쇄망을 뚫고 곧장 서쪽을 향해 강서성의 험난한 경계지역을 넘어 광동성, 호남성, 광시성을 통과하였다. 그동안 이들은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애초에 10만 명이 출발해서 불과 7000명만이 모진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1년간이나 계속된 이 참담한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인원은 처음 출발한 인원의 13분의 1에 불과했다.
버스 터미날에 도착후 맞은 편 2층 식당에서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6명이 느긋하게 샹그리라의 마지막 점심(105원)을 먹었다..
송이 버섯 요리까지 포함해도 의외로 값싸고 푸짐했는 데,
송이 요리 한 그릇 더 안 시킨 것이 지금도 후회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