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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4)
퇴계 선생의 고매한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4일] 4월 7일(목) 미음나루(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한여울(국수역) (29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7일 퇴계 선생]
○ 김취려(金就礪)는 나흘 밤이나 묵으면서 나를 따라왔다가 한여울에서 이별하였다. — 《퇴계집》
◎ 이날 선생은 ‘미음나루’에서 배를 타고 소내나루를 지나 두물머리[兩水里]에서 오른쪽 물길인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여울’에서 묵었다. 선생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와 함께 이곳까지 동행했던 제자가 있다. 김취려(金就礪, 1526~1594)이다. 그는 경기도 안산에 살았으니 책상자를 지고 도산까지 천리 길을 왕래하면서 공부한 제자였다. 마지막 귀향 당시 선생이 서둘러 한양을 떠나느라고 서울 건천동 집에서 가꾸던 매화 화분을 그대로 두고 왔는데, 얼마 뒤 선생의 맏손자에게 부쳐 배에 실어 보내준 것도 김취려였다. 이 매화분도 선생의 적적한 서울 생활을 염려하여 한 해 전에 그가 드렸던 것이다. 선생은 그때의 기쁜 마음을 시에 담아 이렇게 읊었다.
일만 겁의 붉은 먼지를 깨끗이 벗어나 脫却紅塵一萬重 탈각홍진일만중
세상 밖으로 찾아와 늙은이와 짝이 되었네 內從物外伴癯翁 내종물외반구옹
일 좋아하는 그대가 날 생각지 않았다면 不緣好事君思我 불연호사군사아
해마다 빙설 같은 이 모습을 어찌 보리오 那見年年氷雪客 나견년년빙설객
―《退溪集》
서울에 두고 온 분매를 일을 좋아하는 김이정(김취려)이 손자 안도편에 부쳐서 배에 싣고 왔다. 기쁜 나머자 절구 한 수를 읊었다. (都下盆梅 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 船載寄來 喜題一絶云)
1570년 12월 임종 직전 선생이 ‘물을 주라’는 매화 화분이 바로 이 분매(盆梅)이다. 이정(而精) 김취려는 뒷날 선생의 상(喪)을 당하자 임금의 명을 받고 장례일일 감독하는 직책을 수행했는데, 상복을 입고 묘소 옆에 종일 앉아서 한 달을 넘겼다.
* [2022년 4월 7일 목요일 귀향길 재현단]
▶ 오전 8시, 귀향길 재현단은 ‘미음나루’(공원 주차장)에서 둥글게 둘러 서서 하루의 출행식을 가졌다. 이날 아침에는, 이동수 전 안동문화원장께서 출발에 즈음한 인사말을 하고, 이어 재현단 전원이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제3곡을 반주음에 맞추어 함께 노래했다.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짓말이
인성(人性)이 어질다 하니 진실로 옳은 말이
천하에 허다영재(許多英才)를 속여 말할 손가
‘예부터 내려오는 순박하고 좋은 풍속이 없어졌다고 하는 말이 진실로 거짓말이다. 사람의 성품이 어질다 하는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로다.’ … 선생은 세상 사람들의 풍속이 순수하다는 것과 사람의 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천명(天命)과 인간의 본성(本性)이 원래 착하다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성현[孟子]이 이르기를 ‘인성본선(人性本善)’이라고 하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평생 공경심으로 생애를 사신 선생의 후덕과 학문적 지향을 말하는 것이다.
맑은 하늘, 유유히 흐르는 한강
▶ 4월의 아침,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끼어있었으나 비교적 쾌적한 날이다. 필자(오상수)는 오늘 간편복을 입고 이동신 별유사와 함께 선두에서 향도를 했다. 도포와 갓[衣冠]을 갖추어 입은 이한방 교수를 비롯한 이동수 원장, 박경환(참공부모임) 님, 홍덕화 님, 이원필·이재찬·이필상 님 등 후손방손, 송상철·오상봉(종주단)에 이어, 평상복을 입은 이장우 박사, 조민정, 이상천 님 등이 뒤를 따랐다.
미음나루 강가에 한 그루의 벚꽃이 눈부시게 만개해 있었다. 미음나루를 출발하여 수석리고개—(조말생묘소가 있는 석실마을)—(한강공원 삼패지구)—덕소를 지나 팔당까지는 강변의 자전거길-인도를 따라서 걷는다. 일행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역사문화 지리에 해박한 이한방 교수가 유창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석실마을 — 장동 김씨의 성세(盛勢)
▶ 찻길과 자전거길 그리고 인도가 하나로 도로로 이어지는 수석리 고개를 넘으면, 어제 오후, 이한방 교수의 안내로 일행이 다녀온 석실마을 앞을 지난다. 고개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수석리 토성’이 있다. 수석리 토성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으로 쌓아 만든 군사유적이다. 흙을 모아서 쌓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예로부터 ‘토미재’ 혹은 ‘퇴미재’라고 불러왔다.
▶ 거기 토성 가까이에 지금은 없어진 석실서원이 있었고, 그 산록에는 조말생의 묘소가 있다.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이었던 김상용·김상헌 형제를 기리기 위해 1656년에 세워진 서원으로, 뒤에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이 배향되었고 또 그 이후에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을 비롯하여 김원행, 김이안, 김조순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이후 이곳은 김창협의 손자 김원행(金元行)의 강학장소로 유명하였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경기도 일대에서 노론 서원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석실서원은 장동(신 안동) 김씨 문중서원으로 소위 * ‘삼수육창(三壽六昌)’이 성세를 누렸는데, 1871년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훼철된 뒤에 지금은 표석만 남아있다. 사라진 서원의 윗자리에 조말생의 묘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안장되어 있던 조말생의 묘가 명성황후의 능이 들어서면서 이곳으로 이장된 것이었다.
* [장동 김씨(莊洞金氏)]—[삼수육창(三壽六昌)] *
◎ 조선시대 후기 한양의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안동(安東) 풍산의 소산마을에 살았던 집안이다. 신(新) 안동 김씨의 시조는 ‘김선평’이다. 성종 때 10세 김계행은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을 지냈다. 그런데 10세 김계권(金係權)은 학조(學祖), 영전(永銓), 영균(永鈞), 영추(永錐), 영수(永銖) 등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제5자 김영수가 바로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고조부이다. 김영수의 두 아들 김영(金瑛)과 김번(金璠, 1479년(성종 10)~1544년(중종 39))이 문과에 급제하면서, 안동 소산마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김영(金瑛)은 한양의 청풍계(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김번(金璠)은 장의동(지금의 궁정동)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어, 후에 말을 줄여 '장동(莊洞)'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번(金璠)의 아들 김생해(金生海, 1512~1558) 때부터 본격적으로 ‘장동 김씨’(莊洞金氏)라고 칭한다. 이렇게 안동 김씨는 김상헌의 증조부 때 상경하여 서울의 장의동[장동]에 자리 잡고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서인의 대표적 인물로 병자호란 당시 명(明)과의 의리를 선택한 척화파의 대표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부터 집안이 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김번부터 김극효까지의 3대가 안동 김씨의 입경(入京)과 정착기라면,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이후는 성장을 거듭하며 번성을 구가하는 시기였다.
병자호란 당시 형 김상용(金尙容, 1561년~1637)은 강화도에서 순국하였고 김상헌은 청의 심양까지 끌려가서도 당당하게 행동했던 인물이다. 김상헌은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핵심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일 것이다. 그 시대에 그의 판단과 처신이 옳았는가 하는 측면은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명료한 이념을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이념과 실천은, 그 뒤 ‘북학파’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정계와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장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소위 ‘삼수육창(三壽六昌)’이다.
‘삼수(三壽)’는 작은 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입적한 김광찬(金光燦)의 세 아들로 김수증(金壽增, 공조참판), 김수흥(金壽興, 영의정), 노론 대표 송시열과 사우 관계였던 김수항(金壽恒)을 말하는데, 김수항은 송시열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숙청된다. 그리고 ‘육창(六昌)’은 김수항의 6명의 아들을 말한다. 노론 4대신으로 ‘삼수의 옥’의 희생자로 영조에 대한 의리를 지킨 김창집(金昌集, 영의정), 노론의 이론가 김창협(金昌協, 대사헌, 대사성),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이다.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김달행(金達行)-김이중(金履中)을 거쳐 김조순(金祖淳)에 이른다. 그러므로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金祖淳)은 김창집의 4대손이다. 김조순은 노론 시파의 핵심 인물로 정조가 신뢰하며 미래를 위해 남겨두었던 인물이다. 순조의 정비가 된 순원왕후 김씨는 바로 김조순의 딸이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소위 장동 김씨가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이어간다.
퇴계 선생을 흠모한 김창흡(金昌翕)
▶ 이한방 교수에 의하면, 노론 경화사족의 낙론을 대표하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퇴계 학설에 대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보였다. 김창협—도암 이재—미호 김원행으로 이어지는 학맥은 김원행의 제자 담헌 홍대용 단계에서 북학파로 발전해 나갔다.
▶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황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평생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처사이며, 깊은 학문을 바탕으로 당대 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었으며 조선 후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가문이 가문이니만큼 노론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이한방 교수에 의하면, … 삼연 김창흡이 남긴 〈도산서원〉이라는 시에서 퇴계를 흠모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자리와 지팡이가 옛집에 의연하게 있으나
문득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아 의관을 바로 하네
이곳 산수 자연에 대해서는 감히 글을 짓지 못하네
명종께서 일찍이 그림 속에 옮겨다 보셨네
노론 가문의 대학자가 퇴계가 거쳐하던 도산서당에 놓인 유품을 보며 선생을 직접 뵙는 듯해 저절로 의관을 바르게 한다고 했다. 명종은 일찍이 벼슬을 사양하며 올라오지 않는 퇴계가 그리워 도산의 풍경을 담은 병풍을 곁에 두고 보았다. 그 사실을 알았던 김창흡은 그 도산에 대해 감히 산수경관을 기술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김창흡의 퇴계에 대한 존경심은 두 사람의 공통적인 자연관에서 진하게 느껴진다. —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2021, 도선출판 푸른역사)
덕소의 강변,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다
▶ 석실마을 앞 고개의 내리막길을 걸으면 길은 도로와 분리되어 한강변에서 이어진다. 바이크로드와 나란히 인도가 강안을 따라 이어진다. 홍릉천(남양주시 금곡의 홍릉에서 발원)의 다리를 건너고 나면 너른 한강의 둔치가 펼쳐진다. ‘삼패지구 체육공원’이다. 삼패지구 야구장, 풋살축구경기장을 지나면 넓은 둔치에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이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 강안을 따라 가는 길은 아득하게 뻗어있다.
▶ 우리 재현단 일행은 덕소의 서울-양양간 고속도로 ‘미사대교’ 교각 아래를 지났다. 수석리 고개에서 3km를 걸어온 지점이다. 바이크로드-인도는 덕소의 강안을 따라 고가도로로 건설된 6번 국도(경강로) 교각을 따라 이어진다. 월문천(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백봉산에서 발원)을 지나고 도곡리를 지나면서, 길은 고가도로 교각을 벗어나, 4월의 맑은 햇살이 내리는 강변으로 나아갔다. 강가의 버드나무에 순결한 신록이 물들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은 일자로 뻗어 있고 길목의 양안에도 노란 개나리와 파릇한 기운이 감도는 초목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강 건너에는 하남시의 아파트군이 보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직선의 길을 걸었다. 오전 11시, 팔당대교에 도착했다. 교각 아래에서 잠시 다리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팔당댐 — 팔당호 호반길
▶ 팔당에서부터는 옛 중앙선의 폐선로에 조성된 자전거길-인도를 따라서 걷는다. 직선의 선로를 따라 조성된 길은 산뜻하고 봄 햇살이 내리는 팔당호의 봄 풍경은 아름다웠다. 한참을 걷다보면 ‘팔당댐’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봉안터널’을 지나고 나면 남양주시 조안면, 강은 호수가 되어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인구 2,000만 명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하는 팔당호의 고요한 수면 위에 맑은 햇살이 내리고, 일행이 가는 길목에는 노란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있고 화사한 벚꽃이 막 벙글고 있는 중이었다. 호반의 원근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지금은 폐역이 된 ‘능내역’을 지나면서 동쪽으로 마재의 산록이 보인다.
능내역 — 마재의 다산 정약용
▶ 폐역이 된 ‘능내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생가 ‘여유당(與猶堂)’과 다산(茶山)의 묘소가 있다. 1569년 당시 퇴계 선생 귀향의 뱃길은 마재마을 앞을 지났다. 어쩌면 퇴계 선생은 마재마을 건너편 광주시 퇴촌면 분원리 나루에서 잠시 정박하였을지도 모른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충청도 아산의 금정찰방으로 재직하였던 1795년 초겨울에 〈도산사숙론(陶山私淑論)〉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웃노인에게서 《퇴계집》을 빌려 매일 아침 퇴계 선생의 서간문 한 편씩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울림이 있는 구절을 하나씩 인용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적은 것이다. 모두 33편의 글이므로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사숙(私淑)이라는 책 이름을 통하여 퇴계 선생의 정신과 마음을 배우고자했던 다산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다산이 존경하였던 성호 이익의 〈이자수어(李子粹語)〉와 함께 기호학자들이 퇴계학 이해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퇴계 이황 선생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은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 주문모사건에 연루되어 우부승지(종3품)에서 충청도 금정찰방(종7품)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지은 것이다. 다산의 〈금정일록〉에 따르면 1795년 11월 19일에 다산은 ‘퇴계집’의 일부를 얻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새벽에 세수를 마치자마자 퇴계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한 편씩 읽었다. 그리고 낮 동안 편지에서 미끄러져 나온 생각을 부연하여 자신에게 비추어 읽었다. 그 방식은 다산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서문에 상세하다.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은 도산의 퇴계(退溪) 선생을 혼자서 사숙한 기록이다. ‘도산(陶山)’은 퇴계의 별호이며, ‘사숙(私淑)’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배우지 못하고 다만 그 분을 스승으로 삼고 그 분의 저서(著書)를 통하여 도(道)와 학문을 닦는 것을 이르는 말로, 《맹자(孟子)》 ‘이루(離婁)’장에 나온다. 책의 제목에 퇴계를 흠모하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다산이 읽은 내용은 퇴계가 벗이나 문인에게 준 편지글이었다. 모두 33통의 편지에서 짧은 한 단락을 끊어 인용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퇴계의 편지를 통해 퇴계를 사숙하는 일은 처음엔 반성문의 모양새로 시작했던 것인데, 뜻밖에 다산에게 마음의 평정과 잔잔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익운에게 보낸 〈이계수에게 답함(答李季受)〉에서 당시 일을 다산은 이렇게 적었다.
“제가 근래 퇴계 선생께서 남기신 문집을 얻어 마음을 가라앉혀 가만히 살피니 진실로 심오하고 아득하기가 후생말류(後生末流)가 감히 엿보아 헤아릴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정신이 펴지고 기운이 편안해지며 뜻과 생각이 가만히 가라앉고 혈육과 근맥(筋脈)이 모두 안정되고 차분해져서, 종전의 조급하고 사나우며 날리던 기운이 점점 내려가는군요. 이 한 부의 묵은 책이 과연 이 사람의 병증에 꼭 맞는 약이 아닐는지요.”
서학(西學, 천주교)에 연루되어 지방 관리로 강등되어 극심한 번민 속에 있던 다산에게 퇴계 선생의 글은 자신의 암울한 병증을 치유하는 생명수와 같았다. 다산시문집에는 이와 별도로 당시의 심경을 노래한 시(詩)가 한 수 실려 있다. 〈퇴계 선생이 남기신 책을 읽다가(讀退陶遺書)〉가 그것이다.
한가할 제 겨우 보니 일마다 다 바쁘더니 閒裏纔看物物忙 한리재간물물망
이 속에서 세월을 붙들어 맬 길이 없다. 就中無計駐年光 취중무계주년광
반생은 낭패 속에 가시밭길 연속이라 半生狼狽荊蓁路 반생랑패형진로
일곱 자 몸이 싸움터를 어지러이 떠돌았네. 七尺支離矢石場 칠척지리시석장
만 번 움직임이 한 차례 고요함만 못하거니 萬動不如還一靜 만동불여환일정
뭇 향기가 외론 향기 지킴만 같겠는가? 衆香爭似守孤芳 중향쟁사수고방
도산과 퇴계가 어디인지 아노니 陶山退水知何處 도산퇴수지하처
아스라이 높은 풍모 흠모함 끝이 없네. 緬邈高風起慕長 면막고풍기모장
다산이 퇴계를 얼마나 존경하였는지 잘 보여주는 시다. 조용히 돌아보니 이제까지 자신의 인생은 낭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난의 화살이 어지러이 날아드는 전쟁터 아닌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 성취해보겠다고 부산하게 살아왔지만, 시골 역참의 하급관리가 되어 고요히 자신을 돌아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다. 다산은 퇴계 선생의 글을 통하여 자신을 가다듬었다. ‘끊임없는 욕심을 내려놓고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 자신의 본연의 향기를 지켜나가야겠다.’ 다산은 퇴계의 글을 읽고 이런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과 성호(星湖) 이익(李瀷)
*〈이자수어(李子粹語)〉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이황(李滉)과 그의 문인들의 저서에서 인격수양에 긴요한 문구를 뽑아 유문별(類門別)로 편집한 책이다. 성호는 퇴계를 공자와 맹자에 견주어 특별히 ‘이자(李子)’라고 하였다. ‘수어(粹語)’란 순수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성호는 평소 이황의 문집 및 『삼경석의(三經釋義)』·『사서석의(四書釋義)』·『계몽전의(啓蒙傳疑)』·『이학통록(理學通錄)』등을 읽다가 인격 수양에 긴요한 구절에 방점을 찍어 표시한 뒤에, 그것을 초록하여 40여 년 동안 늘 가까이 두고 보아온 것이다. 제자인 안정복(安鼎福)·윤동규(尹東奎) 등과 상의하여 초록을 다듬어 유문별로 편집하였다. 그 뒤 이황의 문인들이 저술한 연보나 저서 등에서도 뽑아 종류별로 덧붙여 편집한 것이다. 주자(朱子)와 그의 문인들의 기록인 『근사록(近思錄)』의 예를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제목을 〈도동록 道東錄〉이라고 했다가 1753년에 완성하면서 〈이자수어(李子粹語)〉로 바꾸었다.
북한강을 건너다 — 두물머리 양수역
▶ 다산의 마을, 능내역을 지난 재현단 일행은 조안면 ‘기와집 순두부’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청량리역에서 안동이나 평창-강릉으로 가는 중앙선은 KTX 개통과 함께 새롭게 직선화된 선로가 건설됨으로써 구 철로는 바이크로드-산책로로 조성해 놓았다. 귀향길 재현단은 북한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에 들어가기 위해 이 옛 중앙선 북한강철교[步道橋]를 건넜다. 파란 하늘 맑은 햇살 이 내리는 인도교 위의 강바람이 시원했다.
일행이 양수역에 이르렀을 때, 전 안동대 안병걸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현단 일행을 격려하기 위해 싱싱한 바나나를 준비하여 나왔다. ‘귀향길 걷기 안내서’를 집필한 안병걸 교수는 함께 걷고 싶었지만, 그 동안 극심한 허리통증으로 인하여 고생하다가 오늘 겨우 몸을 세워 나온 것이라고 했다. 따뜻한 성원의 말씀이 재현단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양평군 신원역 — 몽양 여운형
▶ 양수역을 출발하여 중앙선 폐선로에 조성된 부용산을 지나는 용담터널 등 여러 개의 터널을 지나 신원역에 도착했다. 여기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는 *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여운형은 조부 여규신의 영향으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을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어렸을 때에는 한학을 공부했으나, 성장과정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에 나서서 상하이와 중국을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또한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에도 노력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지웠는데,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알려진 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일장기말소사건).
해방공간에서는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활약했다.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우합작위원회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 — 신원역 앞 벽에는 몽양의 육필 글씨 ‘血濃於水’(혈농어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分則倒合必立’(분열되면 망하고 합하면 반드시 나라가 선다)을 각자해 놓았다.
한여울나루 — 잠재(潛齋) 김취려(金就礪)
▶ ‘한여울’은 신원역을 지나면서 다시 한강변으로 내려가 시민공원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서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지금의 한여울 지역은 팔당댐 건설 이후 수몰되어 깊고 큰 호수가 되어 있다. 1569년 당시 한여울나루에서 남한강을 조망하면서 퇴계 선생은 김취려(金就礪)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김취려는 서울에서부터 이곳 양평의 한여울까지 스승을 배행했다. 한여울은 지금의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에 있었던 여울로, 강 건너편 양평군 강하면 운심리을 연결하는 나루였다. 여울은 넓고 컸는데 강바닥에 큰 돌이 많고 물살이 매우 빠르고 거칠어서 위험하기로 소문이 났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인하여 큰 호수로 변해버렸으므로 예전의 정경을 찾을 길이 없다. 한여울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는 나루가 있던 대심리로 들어가기 이전 양서면 도곡터널을 나오면 바로 있다.
국수역 — 오늘의 도착지
▶ 남한강의 한여울 지역을 벗어나 다시 강에서 떨어진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4월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기울어지는데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다리가 아프고 온 몸이 천근이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들녘, 정적이 흐르는 산 아래 가옥들이 고즈넉해 보인다. 직선으로 난 아득한 바이크로드, 재현단은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 여기서 한참 떨어진 한여울나루, 저녁놀이 물든 여울을 바라보는 퇴계 선생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 오후 6시, 오늘의 도착 지점인 국수역(菊秀驛,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국수리)에 도착했다. 국수역 앞에는 귀향길 재현단을 지원하는 도산서원 스태프들이 나와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안동에서 올라온 후손들 몇 분이 내일의 걷기에 동참하기 위해 미리 도착해 있었다. ― 일행은 국수리의 한 식당에서, 하루의 고단한 몸을 풀면서 다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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