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시(詩) /매화(梅花)와의 이야기
김 삿갓이 함경도 최북단의 종성을 찾은 것은 그 옛날 한때 인연을 맺었던 매화라는 기생을 잊지
못해서였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자기 고향은 종성이고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후일 혹 종성에 들으시거든
꼭 찾아 달라고 했었다.
종성으로 향하는 김 삿갓의 무딘 가슴에는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얼마나 정겨운 여인이었던가. 시문(詩文)에 능하여 바로 서로를 알았고,
매화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우면서도 다정다감했던 그였다.
애정이 깊어 가던 무렵 김 삿갓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보인 일이 있었다.
却把同調難 (각파동조란) : 처음에는 손 뿌리쳐 어울리기 어렵더니
還爲一席親 (환위일석친) : 자리를 같이 해 보니 쉽사리 친해지네.
酒仙交市隱 (주선교시은) : 주선이 시정에 숨은 선비와 사귀려니
女俠是文人 (여협시문인) : 여장부 그대는 과연 문장이로다.
太半衾合期 (태반금합기) : 이불 펴려는 마음 서로 맞을 무렵
成三意態新 (성삼의태신) : 달과 술과 여자가 어우러져 마음 새롭네.
相携東郭月 (상휴동곽월) : 동곽의 달빛 아래 서로 끌어안고
醉倒落梅春 (취도락매춘) : 봄 매화 떨어진 위에 취해 쓰러졌어라.
달콤한 추억에 젖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종성 고을에 당도한 김 삿갓은
어느 주막에 쉬면서 주모에게 혹 매화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 좁은 고장에서 매화를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면서
향교 뒤에 조그만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이 바로 매화의 집이라 했다.
김 삿갓은 주모의 말대로 향교 뒤에 있는 매화의 집을 찾아갔다.
날은 어느덧 저물어오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 집에서는 난데없는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는가.
가만히 들어보니 채조곡(採藻曲)이 분명하였다.
그 옛날 매화가 귀제곡(歸薺曲)을 즐겨 불렀던 일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라 감회가 새삼스러웠다.
잠시 후면 꿈에 그리던 매화를 직접 만날 수 있겠기에 재회의 감격을 그려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었다.
一從別後豈堪忘 (일종별후개감망) : 헤어져 있었기로 옛정을 잊을쏘냐.
汝骨爲粉我首霜 (여골위분아수상) : 너도 늙었겠지만 내 머리도 세었노라
鸞鏡影寒春寂寂 (난경영한춘적적) : 거울 빛은 차갑고 봄기운은 적적한데
風簫音斷月茫茫 (풍소음단월망망) : 소식 끊긴 지 오래 달빛조차 막막하구나.
早今衛北歸薺曲(조금위북귀제곡) : 지난날은 귀제곡 즐겨 부르더니
虛負周南採藻曲(허부주남채조곡) : 지금은 헛되이 채조곡이 웬 말이냐
舊路無痕難再訪(구로무흔난재방) : 어딘지 간 곳 몰라 만나 보기 어렵다가
停車坐愛野花芳(정차좌애야방방) : 이제야 거름 멈추고 들꽃 향기 즐기노라.
김 삿갓은 매화와의 재회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와서 거문고 소리를 들어가며 시까지 읊었다.
이윽고 거문고 소리가 끊기자 김 삿갓은 큰기침을 하고 나서 사뭇 정겨운 목소리로 매화를 불렀다.
매화(梅花)의 집에서는 매화는 보이지 않고 생판 모르는 여인이 방문을 배시시 열고 내다보더니
매화는 몇 달 전에 강 건너 청국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면서 손님은 혹시 삿갓 양반이라는 분이
아니시냐고 묻는다.
김 삿갓은 가슴이 철렁하여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매화가 시집을 갔다는 것은 무슨 소리이고,
나를 어떻게 알아보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그를 방으로 안내하고 나서 자기는 퇴기 추월(退妓 秋月)
이라고 소개한 후에 매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삿갓 양반을 매양 그리워하던 매화는 그에게 매달려 있는 아홉 명의 식구가 굶어 죽을 형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청국 부자의 첩으로 팔려가면서 온 식구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아주 뙤 땅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김 삿갓은 <뙤땅>이라는 말에서 "뙤땅에는 꽃이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고
노래했던 왕소군(王昭君)의 고사(故事)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라 매화가 그렇게도 삭막한 곳으로 팔려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김 삿갓의 심사를 짐작한 추월이 술 상을 보아 와서 술을 권한다.
술을 연거푸 몇 잔 마시면서 '그놈의 돈이 뭐 길래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팔려간단 말이냐'라고 중얼거리자
추월은 죽은 사람을 살려 내기도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을 이제껏 몰랐느냐며
나무란다.
유리걸식을 하면서도 돈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김 삿갓에게 이처럼 돈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과연 그대 말이 옳은 말일세.' 하고 울부짖듯 외치다가 그는 즉석에서 돈에 대한 시를 이렇게 읊었다.
周遊天下皆歡迎(주유천하개환영) : 세상을 두루 돌아도 모두가 환영하고
興國興家勢不輕(흥국흥가세불경) : 나라와 가문을 일으켜주는 그 위세 대단하다.
去復還來來復去(거복환래래복거) :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며
生能捨死死能生(생능사사사능생) :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구나.
김 삿갓의 허무함이 그대로 묻어 나는 시다.
그처럼 간절히 만나기를 기대하고 매화를 찾아갔지만 돈 때문에 가족을 위해 팔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김 삿갓의 마음은 오죽 아팠겠는가. 가히 짐작이 간다.
<옮긴 글>